11/02/19

포도 한알

다시 김용규의 <신>의 한 대목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루크리스의 능욕>에 나오는 로마 황제 루시어스 타퀴니어스의 아들인 섹터스 타퀴니어스 왕자를 소개합니다. 자신의 가신인 콜라타인의 아내 루크리스를 겁탈하려고 침실로 들어가기 직전, 자신의 번민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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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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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포도 한알의 유혹에 덩굴을 망치고, 순간의 유혹에 영원을 망치곤 하는 이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18/15

악령

"그 악한 자는 나타나서 사탄의 힘을 빌려 온갖 종류의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악랄한 속임수를 다 써서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살후2:9-10, 공동번역)

스콧 팩 박사의 '거짓의 사람들'을 보면 그는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을 상담하면서 사람들의 상처 이면의 섬뜩한 악을 직시한다. 그는 악을 '거짓'으로 규정하는데, 거짓으로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거짓의 사람들이 곳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베트남 전에 참여했던 미군 병사들이 한 마을의 주민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악의 실체가 우리들에게도 있음을 고발한다.

최근 도스또옙스키의 '악령'을 다시 읽었다. 군대귀신들린 성경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그의 글에는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사상들로 파멸해 가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에게 당시의 사회가 군대 귀신 돼지떼로 보였던 것 같다.  거기엔 무언가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을 의도적으로 파멸시키는 이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언가를 불어넣어준 이가 있는데, 저자에겐 그가 악령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마지막 때의 악한 자의 출현에 대해 말한다. 그는 불법의 사람이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하는 거짓의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따라 진리를 거부한다. 악한 자는 "온갖 악랄한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멸망시킨다"(10절). 군대 귀신에 들린 돼지 떼가 낭떨어지기로 향하듯, 악한 자는 사람들을 그렇게 파멸시킨다.

성경은 이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으며(7절), 악한 자의 힘의 근원은 사탄임을 말한다(9절). 우리가 처한 이곳은 영적 전장터다. 우리가 접하는 온갖 거짓들 속에서 악의 실체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들, 생각들, 욕심들, 희망들로 낭떨어지기로 향할 수 있다. 사탄은 사람들을 그리로 유인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용한다. 거기엔 악한 속임수가 있고, 악의 실체가 있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에서 우리를 놓이게 만들 것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4/16/15

물질에서 자유하기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1.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많다. 그런데 꼭 배워야하면서도 배우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자족하는 삶, 즉 물질에서 자유한 삶이다. 바울은 이것을 "배웠다"고 말한다(11절).

2. 우리는 기도나 말씀 등에 대해서는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질에 대한 것은 배워야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나 말씀에 대한 것보다 물질에 대해서 더 많이 가르치셨다.  영적 지표는 물질에 대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물질에서 자유한 삶은 없음과 있음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가난' '궁핍' '고난'과는 연결시키면서도 '풍족함' '번영'과는 그렇게 않으려 한다. 번영만 추구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는 '번영'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12절의 '풍부'에 처함은 영어성경에서는 'prosperity'로 표현되었다.

4.물질에서의 자유는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13절). 물질의 힘은 인간의 의지로 맞서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유다처럼 예수님마저도 팔아넘기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는 물질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5.물질에서 자유한 사람의 특징은 주고 받는 일에 자유한 사람이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의 교제는 물질을 주고 받는 교제였다(15절). 물질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주고 받을 수 없고, 성경적인 이 교제의 비밀을 누리지 못한다.

6.물질에서 자유할 때 사람들과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하다. 바울은 선교를 위한 필요가 있었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선물이 아닌 그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다(17절). 그들의 관계는 부버가 말한 바 "I and it"의 관계가 아닌 "I and Thou"의 관계였다. 

7.물질에서의 자유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었다(19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의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

3/26/15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인간에게 모든 지식이 다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감춰진 지식이 있고, 종말의 때까지 감춰진 지식도 있다. 

마가복음의 그리스도는 종종 자신을 사람들에게 숨기셨다. 자신에 관한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공개하시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당부하시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종말의 때는 종말의 때까지 감춰진 지식이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이단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지식이 있다고 사람들을 속여왔으나, 예수님은 그 지식은 마지막 때까지 감춰진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최초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나무를 범한 아담의 후예인 우리들은 감춰진 것을 알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앞에 허용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지식, 허용되지 않은 관계, 허용되지 않은 욕심, 허용되지 않은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된 인간의 자리다.

사실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나무 외에는 모든 나무가 허용되었다. 이미 우리에게 허용된 것들이 과분할 정도로 많고,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할 지식의 세계는 너무나 넓고 크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에게 펼쳐진 지식의 넓은 초원이 아닌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길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우리의 자리와 경계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길이며, 인간을 피조물로 인정하는 길이다.

3/21/15

그룹의 함정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막12:18)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의 특징은 개인이 아닌 그룹의 특징을 갖는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권위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세금에 대해서, 사두개인이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는다.

이들의 질문들엔 적개심과 함정과 조소가 숨어있었다. 예수님께 대한 저항이 당시의 거의 모든 사회 그룹에서 일어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이 그룹이 되면 다양성보다는 그룹의 지향점과 특성으로 더 좁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룹의 입장으로 나올 때 그 개인의 자유스러움이 죽고 더 경직되는 것을 목격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명처럼 그룹이 되면 비인격화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함정을 파기 원했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룹의 함정 속에 빠져있었다. 그들 속엔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나 그룹의 힘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모인 그룹은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시에 악마화될 수 있다. 그리고 힘이 실려 그룹 속의 개인도 악마화될 수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그룹에 종됨을 자주 교훈하셨다. 그룹속의 개인들이 힘과 권세에 관심을 갖게 되면 천국과 같았던 그룹이 지옥이 될 수 있음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나셨던 그룹과 다른 길로 가셨다.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셨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생명을 꽃피우셨다.

3/20/15

말씀을 훼손함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막12:12)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쫒아낸 일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진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모든 사람을 회개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씀으로 인해 더욱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글에도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할 때 두가지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그 말씀으로 인해 회개하든지, 아니면 그 일로 핍박을 받게 되든지.  

선지자들도 그러했다.  요나처럼 회개를 가져오게도 하고, 예레미야처럼 핍박을 받게도 한다.

가장 주의할 것은 아무런 반대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조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슬리지 않는 수준으로 말씀을 부드럽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평화를 경험할 수는 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게 된다.

3/19/15

성전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11:17)

마가는 성전정화 사건을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에 샌드위치로 배치시켰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은 상징적인 행위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낀 성전정화는 결국 얼마 후에 있게 될 성전이 파괴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열심은 대단하다. 랍비들의 글에는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은 성전이라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 중에 하나도, 그리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이유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해 그들의 열심이 갖는 허위를 고발하신다. 그들은 예배자들의 편의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물을 팔고 환전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함으로 대제사장 일가는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장사하는 장소는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그곳에서 기도하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예배를 방해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준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무화과 나무가 저주로 뿌리부터 말라버린 것은 성전의 운명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성전된 예수로 대치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성전의 휘장의 찢어짐은 이제 성전은 그 운명을 다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 나가는 새롭고 산 길이 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