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부럽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엥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심정으로 그리했을까?
물론 바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아마 바울도 속으로는 찔금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 이면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라는 말에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완성품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완성품을 보여줄 수는 없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우리의 모습, 우리의 과정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이어트 광고를 보면 항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다군요.
우리의 이전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이후에 대해서 더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겠습니까?
저런 인간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문구는 평생의 소망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본받고 싶은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분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고, 언젠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그분의 겸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주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발씻음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겨주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분의 메세지였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그분도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평생에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 뿐 아니라, 모든 질서에 대한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엥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심정으로 그리했을까?
물론 바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아마 바울도 속으로는 찔금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 이면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라는 말에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완성품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완성품을 보여줄 수는 없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우리의 모습, 우리의 과정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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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전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이후에 대해서 더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겠습니까?
저런 인간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문구는 평생의 소망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본받고 싶은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분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고, 언젠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그분의 겸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주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발씻음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겨주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분의 메세지였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그분도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평생에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 뿐 아니라, 모든 질서에 대한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