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8:35-43에서 소란스러운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한 맹인이 예수가 지나간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지른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인들에 이것은 소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제지하고 꾸짖자 맹인은 더욱 소리질러 소란을 일으킨다. 맹인의 소란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치유하신다. 그리고 맹인의 소란을 믿음으로 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때로 사람들에게 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 믿음, 즉 예수만이 참 구원자라는 우리의 믿음은 사회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킨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하였는데,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는 치유자일 뿐 아니라 약속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예수를 메시아로 보는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맹인을 제지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어떤 메세지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일으킨다. 맹인을 꾸짖듯이 기독교를 비난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에 굴할 수도 있고, 본문의 맹인처럼 '더욱 크게 소리 질러'(39절) 우리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다. 아파트에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성대를 거세시키듯이, 이 사회는 우리가 소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진짜 메세지는 거세당한채, 이 사회에서 수용하기 좋은 메세지들만 우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메세지는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고, 바울의 메세지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사도행전 16장)라는 소리를 듣게 하였지만 우리들은 이런 소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복음의 야성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메시지 뿐인가? 한국 교회는 기도의 야성이 있던 교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끄러운 기독교 대신에 조용한 기독교를 선택했다. '얼마든지 조용하게 기도하면서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최근의 경향은 관상기도, 수도원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나 또한 그런 관상기도의 영성의 중요성을 믿는다. 하지만 한편 우리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영성의 원동력이 되어왔던 기도의 그 야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맹인의 기도는 시끄러운 기도였고 단순한 기도였다. 보기를 원하는 그 간절함이 소란을 야기시켰다.
한 친구 목사의 기도는 늘 시끄럽게 기도하는 스타일로 주변인들을 번거롭게 했다. 담임목사님은 그를 불러 "목회의 센스"로 그를 교훈했다. 사람들에 대한 '센스'를 가져야 목회에 성공한다는 말씀이셨다. 나 또한 친구 목사의 기도스타일을 따라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왠지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내 친구 목사 편을 들어주실 것 같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 소란스런 그 친구를 이뻐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