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13

다시스의 진실

"..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3)

요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몇가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다시스의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나가 다시스에 가서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펼친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 성공이 아니다. 요나가 있어야할 곳은 니느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소명이었고, 선지자로서 그가 있어야할 곳이었다. 유진 피터슨은 오늘이 목회자가 니느웨를 피해 다시스로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다시스는 재미있는 곳이며 사람들이 이상향처럼 그린 곳이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다시스를 추구하는 것과 오늘의 교회가 놀랍도록 닮았다고 말한다.

둘째는 다시스를 향하는 요나를 위로함이 진정한 위로가 아니다. 바다 위의 요나의 장면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요나를 위로해야 한다.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고 그는 바다에 던져진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당했고 그는 위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읽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거기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요나가 그 바다에서 모든 시련을 잘 감당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는 한 그를 향한 모든 위로는 무의미해진다. 그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고민을 던지는 대목이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는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용기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스토리가 숨어있을 수 있다. 위로가 아닌 방향전환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시스가 아닌 니느웨로 가야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모든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 다시스에 잘 도착하라고 하는 것은 달콤하지만 그에게는 독이다. 그러나 달콤함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달콤함의 메세지를 늘 찾아다닌다. 그들은 다시스를 철회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다시스를 향하는 배에서도 하늘의 추적자를 만난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도망가고 도망갔다. 본문에는 두번이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을 사용한다. 도망자 요나를 본다. 그리고 도망자인 우리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스로 가는 그 바다에서 끝까지 우리를 추적하고 찾아내고 마는 하나님을 만난다.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39:9-10). 시인 프랜시스 톰슨도 이 추적자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는 이 추적자를 "하늘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 불렀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그리고 눈물의 안개 속에
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고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
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 그리고 발보다
더 급한 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
"네가 나를 배반하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제 곁에 저 발자국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
"아, 어리석고. 앞못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
너는 나를 쫓아 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쫓아 버렸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