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14

헛된 위로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욥21:34)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헛된 위로라 한다. 왜 이들의 위로가 헛된 위로였을까?

첫째 들음이 없는 위로였기 때문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내 호소를 들어다오. 들어주는 것만이 위로가 되겠네"(21:2, 공동번역)라 한다. 위로의 시작은 이해다. 그리고 들음없이 상대방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둘째로, 현실과 동떨어진 위로였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악인심판론을 말하지만, 욥은 현실속에서 과연 그러냐고 반문한다. "악인들의 등불이 꺼진 적이 있느냐..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처럼 된 적이 있느냐"(17-18절)고 한다.

친구들은 당장 심판이 없으면 그 자손들에게라도 있을 것이라 하지만 욥은 "죄지은 그 사람이 받아야 한다"(19절, 새번역)고 반박한다.

욥이 느끼는 현실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매 한가지로 흙속에 눕고"(26절)  악인들이 죽을 때 보니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행렬을 따르는"(33절, 새번역) 현실이다.

이것은 욥이 느끼는 현실적인 고민이었지만, 친구들의 위로는 현실을 눈감은 원칙론이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위로는 "거짓"이라고 말한다(34절).

셋째로 친구들의 위로가 헛된 것은 원칙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인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욥의 고뇌의 궁극적 지향점은 하나님이었다. 이해가 될 수 없는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원칙의 틀로는 설명이 안되는 하나님 때문에 고민스러웠는데, 친구들은 계속 원칙론만 말하니 헛된 위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고수하는 원칙대로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며, 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셈인데, 욥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22절)고 반문한다.

위로는 새로운 만남의 장이다. 진지한 들음을 통해 고통당하는 이를 새롭게 만나는 것이고,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들의 현실적 고민과 만나는 것이며, 때로는 당황스럽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위로는 주는 것이기 보다는 받는 것이다. 고통 당하는 이와 함께 하면서 새로운 만남에 눈뜨게 되는 것이기에 위로받는 이 뿐만 아니라 위로자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눈 뜸이 없으면 우리는 헛된 위로자가 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