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35:6-7)
이 말은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욥의 푸념에 대한 엘리후의 답변이다. 엘리후는 욥이 진술은 인간이 자신의 경건으로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진단했다.
엘리후의 진단이 욥에겐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겐 적중될 때가 많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도,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도,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를 명하신 것은 그분의 필요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헌금을 말씀하심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며, 찬양을 명하심은 칭송에 굶주리셨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존할 필요가 없는 스스로 계신자다.
엘리후는 우리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 해도 하나님께 어떤 유익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점에서 엘리후는 옳았다.
그러나 엘리후가 간과한 것이 있다.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의미를 가진다.
나의 죄가 그를 분노케 하며, 우리의 헌신과 성장이 그를 기쁘시게 한다. 신문지상의 범죄기사가 나에겐 작은 반향도 던지지 않을 수 있지만, 자녀의 거슬리는 행동 하나가 나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라면 십자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 삶에 개입해 들어오셨다.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전 우주의 초월적 통치자가 작고 미약한 나와의 관계를 위해 엄청난 값지불을 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