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즈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힘겨웠다. 여기 저기서 박해받는 자들이 속출했고, 교회의 존립이 위협당하는 시점이었다. 베드로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쓴다.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무슨 교회갱신운동이나 교회 내의 윤리회복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 것 같지 않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그 희망을 보았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3절).
소망은 거듭난 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의 거듭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우리를 미리 아셨고, 예수님의 피뿌림을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2절),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도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이다(4절).
우리의 거듭남에 인간의 공로와 선함이 개입될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자에게 하늘의 유업과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신다(4-5절).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며 언젠가 우리에게 나타나기로 예비된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만일 미래가 우리 손에만 달려있다면 희망을 가질 근거가 별로 없다. 인간의 손은 충분히 그 무능력을 입증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나 현실적인 교회의 자기 갱생능력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산 소망이 있음은 죽은 소망도 있고 거짓 소망도 있음을 생각케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 땅의 어떤 공동체도 소망이 되지 않음을 로마와 교회의 쇠락을 경험하면서 써내려간다. 우리의 쇠락과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역사의 소망이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민족도 바벨론 유수를 겪으면서 그들의 공동체가 소망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메시아가 만드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소망이며, 그래서 예수 오심의 제 일성이 '하나님 나라'였다.
거듭남이 산소망인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늘의 기업을 약속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 손이 우리의 미래까지 붙들고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 거기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