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이 땅의 모든 것은 부분적이다. 절대적으로 확신했던 것들도 종종 우리를 속인다. 이 땅에서의 '완전'은 복음 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후일 우리는 그저 부분만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완전한 사랑이라 여겼던 것들이 후일 이기심과 숨겨진 욕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부분적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무언가를 '완전히' 확신하는 자들은 때때로 위험하다. 그들의 '완전'은 다른 이들의 것을 '불완전'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대화의 여지가 없다. 불완전은 완전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이 '부분적'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남들이 있어야 자신이 '부분'이 완성되기 때문에 다른 이를 기쁘게 수용한다. 이 땅의 우리들은 부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부분적'이라는 것이 우리를 목마르게 한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사랑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확신할 수 없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분이 완성되는 완전을 꿈꾼다.
그래서 C.S.루이스는 이 땅의 기쁨은 천국의 표지판이라 했다. 이 땅의 어떤 것들이 아무리 기뻐도 부분적일 수 밖에 없기에 그 부분성에서 오는 갈증은 어딘가 완전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천국만이 완전한 기쁨을 제공할 수 있다.
바울도 우리는 이땅의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구리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파악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부분이 완전으로 완성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사랑은 서로의 부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언하는 자도, 놀라운 지식을 가진 자도, 흠모할 만한 은사를 가졌다 해도 그 모든 것은 부분적이다. 그것을 완전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에서는 분란만 일어난다. 사랑은 서로의 부분성을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며, 그래야 다른 지체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