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11:2)
예수님의 이번 예루사렘 방문은 색달랐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조용한 방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그 앞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호산나' 를 외치며 예수님을 높였다. 이런 방문형식을 예수님이 지시하셨고, 사람들의 높임을 그대로 수용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방문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다. 예수님도 몇번이나 이번 방문 중에 수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방문형식은 이 예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이 자신에게 성취됨을 보여주셨고, 사람들의 기쁨의 환호 속에 입성하심으로 십자가 지심이 우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기쁨에 찬 선택이셨음을 보이고자 하셨고,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심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사적 메시아가 아닌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된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메시아적 성취의 정점에 사용된 나귀는 빌린 나귀였다. 배를 빌려 하나님 나라의 비유을 가르치셨고, 동전을 빌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교훈하셨던 예수님은 나귀를 빌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의 무덤도 빌린 무덤이었다.
소유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소유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권력을 소유하고, 넓은 인맥을 소유하는 등 소유가 많을 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무엇인가를 빌리셔야 했던 가난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인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다. 무소유가 전혀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으셨다. 당당하게 나귀를 요구하셨고 사용하셨다. 만물의 주인되신 예수님은 소유로 자신을 입증하실 필요도 없으셨다.
소유가 존재가치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있음으로 우쭐하고, 없음으로 위축되곤 한다. 그러나 소유에서 자유한 사람들은 없음에도 당당할 수 있고, 무소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해 큰 뜻을 품을 수 있다.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가 아닌 순종을 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