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9

창4장 에녹, 에노스, 그리고 에녹


가인의 아들은 에녹이었다.
셋의 아들은 에노스였다.
그리고 다시 여섯번째에 다시 하나님의 동행자 에녹이 있다.

가인은 하나님의 유랑자 천형을 거부하고 에덴의 동쪽에 성을 쌓았다.
막연한 하나님의 보호의 표징보다는 자기가 직접 성을 쌓아 자기를 지키고자 했다.
가인의 성은 가인이 안전지대였다.
그러나 성경은 가인의 삶을 이렇게 진단한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가인은 그렇게 쌓아놓은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 에녹이라 했다.
에녹의 뜻은 새로운 시작이란 뜻이다.
가인은 하나님 없는 새로운 시작을 뜻했다.

그리고 그의 후예들에는 많은 발전이 있는 듯 했다.
장막을 만드는 건축업, 양을 치는 목축업, 악기를 만드는 예술, 기계와 무기를 만드는 과학도... 문명이 꽃피우는 듯 했다. 
그러나 라멕의 모습은 가인적인 삶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보여준다.

라멕은 최초의 일부다처주의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류사상 가장 오래된 노래를 남겼다. 그런데  그 노래는 '칼의 노래'이며 '피의 노래'이다.
살일은 자랑삼아 노래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이 가인적 삶의 결말이었다.
그리고 인류가 가고있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인 것 같다.

그러나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다른 씨를 주셨다.
셋을 주셨고, 에노스를 주셨다.
가인이 아들 에녹과 흡사한 셋의 아들 에노스...
에녹이 새출발이란 뜻이라면, 에노스는 허약함이란 뜻이다.
셋의 후예들은 가인들이 추구하는 삶에서 파괴를 보았다.
문명이 있고, 예술이 있고 과학적 발전이 있고, 성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을 떠난 인간은 그저 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허약함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드디어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 '에녹'이 등장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이 등장한다.

우리의 새로운 출발은 인간의 허약함을 의식할 때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시작된다.

1/17/09

시편 3편 친구들의 배신을 느낄 때


시편 3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피신하면서 기록한 시이다.
본문을 보면 다윗은 단지 자기 아들이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보다는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조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슬퍼한다.  1-2절에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세번이나 등장한다.

인간사에 믿음을 주었던 이들의 등을 경험하는 것보다 마음 아픈 것이 없다. 자기의 친구들, 자기의 부하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을 경험하면서 다윗은 아파한다. 예수님도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셨다. 3년간 함께 지낸 제자 유다가 은삼십이라는 얄팍한 금전에 친구의 우정을 배신했다. 왜 주님이라고 안 아팠겠는가?  이점이 성경에 미리 예언된 것만 봐도 주님께도 매우 심각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그러나  이 상항에서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의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을 바라보는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선의 전환을 단행하면서이다. 3절말씀에 "여호와여..."  그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친구의 배신을 겪는 등 아픔을 경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일어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3가지를 묵상한다. 
첫째  하나님은 방패가 되신다.  방패는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다윗은 쫒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를 따르던 신하들도 불안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그 어떤 안전장치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지대인 것을 기억하면서 힘을 얻는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이시다. 다윗은 잠시 왕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도망자가 되어서 쫒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와중에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영광이 덧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영광은 돈에 있지 않고 명예에 있지않다. 인간의 진짜 영광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시다. 어떤 배경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신다. 히스기야왕은 이 점에 있어서 실수 했다.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를 당하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도움이 될수 있는 힘을 찾아다녔다. 이집트와 바벨론의 힘을 얻고자 했지만, 이것은 장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짐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머리를 다시 드시는 분임을 고백한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그에게 평안을 가져온다.
그래서 이제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진친다 해도"  자기는 두렵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 위험한 정황에서 평안히 잠을 자고 일어난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 그리고 용기를 준다. 인생을 다시 힘내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1/09/09

창세기 2장에서 발견하는 성경적 가정관의 특징들



창세기 2장을 보면 성경적인 가정관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때로 성서적 입장이 우리 문화적 특성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성경적인 입장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서 발견하는 부부관계에서의 질서.

기본적으로 성경은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상호복종도 얘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질서도 얘기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남편을 머리라하고, 아내에게 순종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내의 역할을 '돕는 배필'로 설명하고 있다.

2.일과 가정의 균형.

아담은 가정을 갖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일이 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비쳐진다. 일만으로는 인생의 풍성함을 살 수 없다.  인생의 만족은 일과 더불어 가족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이것은 성경전체의 강조점이다. 성경은 가정과 일의 균형을 강조한다.

3.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담에게 하와를 이끌어오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결혼관계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셨음과 만남을 이끌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시작한다.

4. 부부관계의 우선권.

동양적 전통에서는 부부관계보다는 효사상을 더 중시했고, 현대 가정들에서는 자녀들이 우선시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가정의 핵심은 부부관계이다. 심지어 이 부부관계의 우선권을 위해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1/06/09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기사를 읽는다.
한가지 의문은 하나님은 안식이 필요하신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피곤을 모르시는 신이기에 안식이 필요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마치시매"가 그 대답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완전한 모습을 끝났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스스로 평가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다."

마치 대제사장 예수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마치시고,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서서 있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완벽한 그분의 창조작품이다.
그리고 그분은 내 인생에 있어서도 최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작품이 완전이듯이,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길이 최선이라는 것을....


1/05/09

인간됨의 축복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영광은 인간창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복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인간됨이 무엇이 복이란 말일까요?  이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인간됨을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됨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인간됨이 축복인 이유 몇가지 :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생물체중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다른 것을 다스실 수 있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다른 모든 생물체는 바로 우리의 먹을 거리가 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인자를 천사보다(원문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됨의 축복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영광은 인간창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복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인간됨이 무엇이 복이란 말일까요?  이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인간됨을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됨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인간됨이 축복인 이유 몇가지 :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생물체중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다른 것을 다스실 수 있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다른 모든 생물체는 바로 우리의 먹을 거리가 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인자를 천사보다(원문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