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11

단지파의 교훈

사사기 18장의 단지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은 블레셋과 가장 가까운 접경지역이었다. 블레셋이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터라 이들은 감히 자신들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보내서 자신들이 거주할만한 평안한 땅을 구하러 나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땅이 때로 블레셋 접경지역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땅, 거주한다 해도 계속되는 블레셋의 공격이 예상되는 불안한 땅, 그래서 우리는 다른 땅을 찾아 나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에는 내가 역부족인 것 같고, 고난과 시련이 예상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찾아 나선다. 결국 그들이 정착한 땅은 나중에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의 진원지가 되고, 그리고 어느샌가 단지파는 이스라엘 지파계열에서 사라진다.

인생의 성공은 사람들의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성공인 것이다.

10/25/11

미가의 종교, 스마트 종교

사사기 17장에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는 한 사례로 미가의 일을 말하고 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잃었던 돈을 되찾은 기쁨으로 그 돈의 일부를 여호와께 드리기를 원했다. 이에 미가는 자기를 위해 신상을 만들고 자기 집에 신당을 만들고, 미가는 스스로 제사장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 믿는다. 미가의 종교는 자기를 위한 종교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미가의 종교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가는 또 드라빔을 만들었다. 라헬이 안장 밑에 숨길 정도로 드라빔은 작은 신상이었다. 우리는 인형같은 하나님,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처럼 만지작 거릴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거기서 내가 원하는 메세지를 얼마든지 선택하여 들을 수 있고, 우리는 공동체에 참여함없이 해변가에서, 낚시터에서, 골프장에서 스마트 종교로 주일예배를 대신할 수 있다. 물론 스마트 종교에서는 전국의 예배실황을 골라서 드릴 수 있다. 예배가, 혹은 설교가 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 예배를 선택해서 다른 설교를 들을 수도 있다. 스마트 종교에서는 공동체에서 오는 갈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스마트 종교에서는 미가가 자기를 위해 신상을 만들었듯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가게 된다.

미가의 종교시대에, 스마트 종교시대에 우리는 다시한번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10/22/11

하나님의 부재

오늘 아침 사사기 말씀: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20)

하나님은 이미 자기를 떠나가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를 수가 있다. 우리는 이 말씀앞에서 냉혹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한다.

10/21/11

위험한 장난

사사기 16:1-10에 보면 삼손은 위험한 장난을 한다. 그를 죽이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의 영토로 넘어가 여인들과 사랑놀음을 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실제로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블레셋 군인들을 물리치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위험한 장난으로 파멸하고 만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에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파멸이될 수 있는 환경에 서성거린다. 그동안의 기도생활이나 말씀생활 때문에, 혹은 이제까지의 신앙여정 때문에 "나는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정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은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에게 유혹이 될 수 있는 '블레셋의 영토'를 피하는 것이 지혜다.

10/20/11

엔학고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삿15:19)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쳐죽였다. 들판의 버려진 나귀의 턱뼈가 삼손의 손에 들리자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도 인생의 들판에 버려진 나귀 턱뼈와 같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주워 하나님의 일터에서 쓰임받게 하신다. 이것을 "나귀 턱뼈의 은혜"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우리는 그 은혜로 오늘을 산다.

삼손이 레히 골짜기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지만, 극심한 갈증으로 거의 죽을지경에 이르렀다. 종종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고 사역을 성취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치고 피곤하고 영혼은 메말라 죽어가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이를 영적 침체라고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탈진이라 부른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이런 경험을 하고, 우리들도 자주 이런 경험을 한다.

어찌하면 좋은가?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샘물을 터뜨려 그를 소생시키셨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샘물을 "엔학고레"라 불렀다. 뜻은 "부르짖는 자의 샘물"이란 뜻이다. 그리고 소생되었다는 말은 영어로 "revive" 요즘 우리 말로 "부흥"이란 말이다.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은혜다. 하나님은 샘물을 터뜨려 부흥을 경험케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샘물을 터뜨려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막혔던 교제의 샘을 터뜨리시고, 기도의 샘을 터뜨리시고, 무미건조했던 말씀에서 새롭게 샘물을 터뜨려 우리를 부흥케 하신다. 오늘 나는 이 엔학고레의 은혜를 사모한다.

10/04/11

나와 너

사사기 9:19-25 말씀은 진실에 기초하지 않은 관계는 결국 깨어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당장의 실리로 아비멜렉을 선택한 세겜 사람들에 대해 요담은 "이 일이 진실하고 의로운가"라고 두번씩이나 질문한다.

결국 이 연합은 깨어지고 원수가 된다. 진실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 쇼맨쉽과 재치로 시작된 관계는 그것에 싫증이 나면 관계도 끊어진다. 실리로 시작된 관계는 실리가 없어지면 관계도 끊어진다.


마틴 부버는 "나와 그것"의 관계와 "나의 너"의 관계가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인간관계가 "나의 그것"의 관계로 치닫는다. 이런 관계는 이용하고 배신하고 깨어지는 상처를 남긴다. 이런 상처난 세상을 치유할 교회의 힘은 거대한 프로젝트나 집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만큼은 진실한 "나의 너"의 관계를 갖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영원한 당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