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09

창12장 축복이 되는 사람 저주가 되는 사람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승계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디가든 축복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자문해 봅니다.
나는 이웃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인가?
솔직한 우리네 경험은
축복인줄 알았는데 저주가 되는 사람도 있고,
그냥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축복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는 것은
내 선함만으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선하고 주님께 열심도 있는데 내게 저주가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내게는 까탈스러운 사람도
알고보니 내게는 축복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내 선함 이상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 같습니다.
"내가...하리라"는 하나님의 의지만이 신뢰할 수 있고,
사람이 어떠하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아
이웃에게 진정 축복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25/09

고전 11장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이 부럽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엥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심정으로 그리했을까?
물론 바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면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아마 바울도 속으로는 찔금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 이면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라는 말에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완성품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완성품을 보여줄 수는 없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우리의 모습, 우리의 과정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이어트 광고를 보면 항상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다군요.
우리의 이전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이후에 대해서 더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겠습니까?
저런 인간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문구는 평생의 소망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본받고 싶은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분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고, 언젠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그분의 겸손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주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발씻음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겨주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분의 메세지였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그분도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평생에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 뿐 아니라, 모든 질서에 대한 순종을 배우고 싶습니다.

3/22/09

딤후2장 충성된 사람이란


교회 사역의 열쇠는 사람이다. 충성된 사람이다. 건물이나 기구, 조직, 돈이 있어도 사람이 없으면 사역은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이 있으면 모든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사역은 꽃 피울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내게 배우고 본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딤후2:2)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충성된 사람이란 누구인가?
바울의 이어진 3가지 비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충성된 사람을 이야기 하면서 바울은 병사, 경주하는 자, 농부를 예를 들었다.  병사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사람은 병사의 자격이 없다. 충성된 사람이란 올바른 우선순위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경주하는 자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원칙이다.  경주하는 자가 법대로 경주하지 않으면, 상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다운 원칙이 있다. 때때로 원칙을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은 이런 유혹의 시간에도 자기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농부에게 배워야할 것은 인내이다. 농부의 수고는 당장에 결과를 볼 수 없다. 오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의 끝에 농부는 결과를 볼 수 있다. 충성된 사람은 인내의 사람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나는 과연 충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3/20/09

룻기에서 보는 가정의 의미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 1:16-17)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불러서 각기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돌아갔는데, 둘째 며느리 룻은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는 것 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고 뜻을 전합니다.

가족이란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때로 가정사에 가족들이 함께하지 못할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이란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오해 때문에, 때로는 배우자에 대한 실망 때문에 함께 해야할 사람들이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가족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룻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하겠다는 이 고백은 아마도 그가 시집온 이후에 받아들인 여호와 신앙 때문인 것 같습니다. 룻의 고백의근저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가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 가족도 함께 하지 못할 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메마름입니다. 나오미는 자기의 상황을 "하나님께 징벌받아서"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가족 안에서 영적인 메마름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만났는데, 누군가가 영적으로 메마르고 신앙이 냉담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마라"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란 뜻이고, 마라라는 뜻은 "쓰다"라는 뜻입니다. 쓰디쓴 상황들을 경험했습니다. 가족사의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란 이런 마라의 고통에서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경제적 궁핍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간다는 것은 당시의 과부들이 경제활동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계속적인 경제적 궁핍을 겪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제적 궁핍이 가끔은 가족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가족이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개인적 행복의 포기였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것은 개인적으로 새남편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가족이 함께하기 위해서 때로는 개인적인 만족을 포기해야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감수해야합니다.

가족이란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3/15/09

벧전2장 영적 성장의 3가지 비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자라갈 것을 권면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으로 자라갈 수 있는가?
베드로는 3가지 영적 성장의 비밀을 공개한다.

첫째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버릴 것이 있다.

"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절.

우리 각자는 버릴 것이 있다.  잔은 비어있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다.
영적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것이 있다.


둘째는 사모해야할 것이 있다.
"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2절.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입맛을 개발해야 한다.  이전에 입맛들이던 것을 버리고,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순전한 맛, 새로운 인생의 맛,  말씀의 맛, 예배의 맛, 기도의 맛을 들여야한다.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의 입맛을 들여야 한다.


셋째는 드려야할 것이 있다.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

이제 우리는 성전이 되고,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는 성전을 위한 산돌로서, 영적 제사를 위한 제물로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야한다.  로마서12:1은 우리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드린다는 말은 영어성경 Message 번역으로 보면, "우리가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쉬는 것...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을 하나님 눈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상사를 하나님께 예배의 행위로 드려야한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열쇠이다.

3/13/09

창19장 롯의 아내와 딸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창세기 19장은 롯의 가문에 찾아온 비극을 보여준다.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롯과 딸들은 소알 성에 머물다, 그것도 두려워 어느 산속 동굴 속에 숨어지내고, 후손의 단절을 두려워 비정상적으로 딸들은 아이들을 임신하게 된다.

이것은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을 떠날 때의 롯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때 롯은 넘쳐나는 가축떼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고,
신앙적인 아브라함의 양보로 일대에서 가장 좋은 땅들을 선택하고 거기 머물렀다.

그런데 롯의 일련의 선택의 과정을 보면 그의 선택은 물질주의적이다.
아브라함과는 달리, 그는 항상 물질적인 이득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요소들은 중요시 하지 않는다.
결국 소돔 성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성은 매우 부패하고 문란한 도성이었다.
그는 이 성이 자기 가족에게 미칠 영향 보다는 이 성이 주는 매력을 더 중요시 여겼던 것 같다.
나중에 소돔 성문 앞에 앉아있는 롯의 모습도 보이는데, 고대사회에서 성문 앞에 앉아있다는 표현은 보통 그 성의 관리 혹은 유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성공한 이민자였다.

그러나 물질을 추구하는 것의 끝은 비극이었다.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자신과 두 딸들은 아무 것도 없이 산속 동굴 속에 기거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아무 것도 약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추구한 아브라함의 생애는 지금도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