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14

균형

"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1:23)

유다서는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고, 성도들이 자기를 살펴 이에 물들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이나 가담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라 한다. 그들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 균형을 갖기가 쉽지 않다.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는 긍휼을 잃게 하기 쉽고, 긍휼은 거룩을 훼손하기 쉽다.

건강한 성숙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다. 사람에 대해서는 늘 따뜻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갖어야 한다.

예수님의 팔복에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와 더불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되다 하지 않으셨는가?

10/29/14

경건

오늘 아침 유다서에서 경건하지 않음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에녹의 입을 빌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15절을 NASB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to execute judgment upon all, and to convict all the ungodly of all their ungodly deeds which they have done in an ungodly way, and of all the harsh things which ungodly sinners have spoken against Him.”

경건하지 않은 이들, 경건하지 않은 행위들, 경건하지 않은 길들, 경건하지 않은 말들이 심판받을 것이다.

경건하지 않음이 네번이나 반복된다. 성경에서 반복은 자주 강조의 의도로 쓰였다. 그만큼 하나님께는 경건치 않음이 참을 수 없는 것이리라.

경건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겅건은 내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하며  행하고 말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A.W. 토저의 "The pursuit of God"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오늘은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볼까나...

10/28/14

본능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

이 구절은 본능적 지식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본능을 따르라고 말들한다. 그러나 본능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유다서에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들이 육체의 방종을 조장하고 초자연적 존재들을 부정하고 비방했던 것은 그들의 본능이 영적인 것과 초자연적존재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본능은 우리를 속이기도 하고, 우리를 무지에 빠뜨리기도 한다. 성경은 이들이"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무지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더 나쁜 것은 본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해서 거부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심지어 천사장도 마귀를 비방하지 않고 다만 "주께서 너를 책망하기 원하신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한다".  결국 이들은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 부른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보여주심으로 깨닫게 되는 지식이다.  본능으로 닫혀진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계시로 열린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보이고, 우리의 죄인됨도 보인다.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비추임이 없이는 어둠 속에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빛되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리라"(요8:12).

10/25/14

오늘 씨름해야할 4개의 단어

벧후3:14-18의 말씀에서 내가 붙잡아야할 네개의 단어를 보여준다.

바라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14절). 오늘 내가 바라보아야할 주의 약속과 소망의 세상이 있다.

힘씀. "점도..흠도..평강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  오늘 내가 힘써야할 될 그리스도의 인격과 모습은?

삼가함. "너희가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17절). 우리가 삼가야할  리더십의  그림자 혹은 어두운 장애물은?

자라감.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8절).  오늘 하루, 그리스도를 더 깊히 알기를 소망하며..

10/07/14

천사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단10:13)

요즘의 신앙생활에서는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좀 생소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천사는 분명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우리의 삶에 관여되어 있다. 오늘의 본문에서 천사들에 대한 몇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사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돕는 천사도 있고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천사도 있다. 흔히 후자를 악한 영들, 혹은 타락한 천사들이라 부른다.

천사들 중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본문의 '가장 높은 군주'를 새번역에서는 '천사장'이라 번역했다. 

한 개인을 수호하는 천사가 있는 반면 본문처럼 나라를 관할하는 천사들이 있다. '바사왕국의 군주'는 바사지역을 관할하는 천사를 의미한다.  20절에는 헬라(그리스)를 관할하는 천사도 나온다.  21절에 '너희의 군주 미가엘'이라 부른 것을 보면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수호천사로 보여진다. 이는 지역에 따라 천사들, 혹은 악한 영들의 활동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악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20일동안 막았고 미가엘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우리의 생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투는 치열하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영적 전투는 진행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승리자이시다. 사탄이 방해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계획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탄으로 인해 전투의 양상이 어찌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다니엘에게 보이고자 했던 먼 훗날에 되어질 그의 계획이 어찌 서겠는가? 승리자 예수가 확실하기에 그의 계획도 확실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승리자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우리도 역시 승리자들이며 천사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는 영들이며,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들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됨이 '천사들도 흠모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THANK YOU ,GOD!

 

10/06/14

말씀의 영광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단10:11)

시간이 흘러 고레스 제 3년에 다니엘은 티그리스 강가에서 또 다른 환상을 본다. 미래에 닥칠 전쟁과 환난에 대한 것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이것을 보여주려 그리스도 처럼 묘사되는 이가 친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10장의 그리스도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요한이 본 그리스도와 흡사하다. 영광의 주님이시다. 

이전 환상에서는 가브리엘을 보내 깨닫게 하셨는데, 이번에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친히 메센저로 오신 것이다. 이는 다니엘에게 보이시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만큼 그의 메세지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니엘보다 더한 영광을 경험한다.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메센저가 아닌 메세지로 오신 것이다. 살아있는 메세지로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다. 

요한이 이 말씀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 고백했듯이 우리 또한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날마다 그를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경험한다(요1:18).

10/02/14

동일시하기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9:11)


다니엘은 문득 이스라엘이 포로생활 70년이 되면 해방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 때가 가까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다.


다니엘은 "우리가 범죄했습니다"라는 고백을 반복한다. 사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루 세번씩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말씀대로 살려고 이방 왕이 진설한 음식을 거부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범죄에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고백하며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자신도 조상들과 동시대 사람들과 동일한 범죄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민족의 범죄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리는 쉽게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며 탄식하고, 작금의 교회현상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이면에는 '나는 아니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 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그런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다니엘처럼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교회의 현상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다니엘처럼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오늘의 현실을 끌어안고 주께 기도하되 그 한 가운데 자신도 책임도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느헤미야도 성벽을 재건하면서 그의 시대의 백성들의 비참함이 자신의 조상들의 죄로 시작해서 자신도 책임있음을 고하며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한다.


회개란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인됨과 책임을 고하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현실에 자신을 예외시키지 말고 동일시해야 한다.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고백하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