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13

아웃사이더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갈2:6)

바울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다. 예수님께 직접 교육받은 것도 없었고, 사도들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심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사도들과 바울의 만남은 바울의 복음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그에게 더해줄 것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아웃사이더들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단시하고, 마녀재판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카테고리는 절대불변의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넘어 일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 예수님도 당시 종교인의 카테고리에 딱 맞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

교회의 어떤 시도가 사회적 카테고리에 잘 들어맞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비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는 복음의 정통성과 다양성을 함께 인정한 첫 케이스였다. 그 모임에서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바울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양하게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첫 복음의 기초석을 잘 놓았다. 복음에 대해선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카테고리의 사람들과도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었다. 만일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바울을 거부해버렸다면 기독교는 엄청난 축복을 놓쳤을 것이다.

아웃사이더들은 우리의 카테고리를 넓히는 기회다. 초대교회는 아웃사이더 바울을 통해 이방인 선교에 문을 열게되었다. 

11/28/13

결여가 낳은 풍성함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2:18-19)

바울의 이력은 오늘의 목사채용의 기준으로 볼 때 핸디캡이다. 유명인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유명 단체나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다.  

유명인과 접촉한 것은 아주 잠깐 뿐이었고(15일), 그것도 몇몇 사람 뿐이었다(게바, 주의 동생 야고보). 대부분의 시간은 홀로 지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이 어느 유명인에게 영향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이점을 강조한다. 특별한 이력은 없었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 복음을 배웠다고 말한다. 

사도들과의 접촉은 자신의 복음을 검증받기 위해서였지,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바울을 만들었다.

우리는 정반대로 가려한다. 내세울 수 있는 이력을 많이 만들지만 그리스도와는 빈약하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다. 우리는 은금을 갖고 나사렛 예수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이민목회를 할 때에 교민잡지에  각 교회의 수많은 행사와 프로그램들 광고들이 늘  빼빽하게 있었다. 한국의 유명인들이 와서 인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빈약했다. 우리들은 다른 것이 필요했다.

바울의 이력의 특이한 점은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이력은 그것이 전부다. 광야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다. 

우리들에겐 광야가 필요하다.

11/15/13

시대의 책임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요나서4:14)

우리의 자리는 위로 부터 온 것이다. 본문은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자리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위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야고보도 모든 선한 것은 다 위로부터 온 것이라 말했다.

우리의 자리는 봉사를 위한 것이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냐?' 하나님의 축복에 항상 책임이 따른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이어서 다른 이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더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 우리는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그분의 일을 하신다. 다만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셨을 뿐이다.

봉사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 이 구절에서 "이 때에"란 말이 두번 반복된다. 기회는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엔 자주 '때' 와 '분별'이 같이 등장한다. 시기를 분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쳐버린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할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책임은 여러가지다. 자리가 주는 책임이 있다. 시대가 주는 책임이 있다.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 에스더는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어떤 각오가 필요하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필요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누리는 지금의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11/06/13

요나의 분노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4:1)

오늘의 요나의 모습이 불편한 것은 바다 한 가운데서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그가 보이는 실망스러운 모습만은 아니다.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요나는 이것은 옳지 않다 생각했다.  우리는 니느웨를 둘러싼 정확한 역사적 정황은 모른다. 다만 요나는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할만큼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그것이 그가 도망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2절)

고대전쟁에서는 매우 잔인한 살륙이 이루어지곤했다. 아마도 요나는 그 목격자나 피해자인지 모른다. 이런 악인들을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겼다. 때로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도저히 용서되서는 안되는 사람이 용서받고 인격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의 교회는 날로 성장하고 사업은 번창한다. 우리는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요나처럼 화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감당이 안되어 탕자의 형처럼 심통을 부리고 요나처럼 골이 난다. 요나서 4장에서 "이것이 엃으냐?"라는 말이 강조된다. 우리의 심통 뒤엔 편협한 우리의 정의가 숨어있다. 요나의 정의는 결국 그를 그 성의 동쪽으로 가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재앙이 혹 내리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으로 거기서 그 성을 바라본다. 

그의 정의는 결국 니느웨의 재앙을 바라는 정의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이 오히려 잘되면 우리는 그 일이 안되기를 바란다. 정의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저주를 바라고 가슴을 황폐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 속에서,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종종 살벌한 정의를 만난다.

요나에게 옳지 않다 여겨진 것이 하나님에겐 옳은 일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옳다 하신 일을 우리가 그르다 할 수 없다. 정의가 하나님의 자비를 만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11/05/13

패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욘3:1)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일정한 패턴 속에서 일하신다. 이런 패턴이 없다면 희랍신화의 신들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실 것이다. 하나님은 일관된 패턴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사람들을 대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패턴을 발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음 반응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인간 지혜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패턴을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더하기 빼기의 산술을 하는 정도를 가늠할 뿐이고 하나님은 고등수학을 넘어서는 지혜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요나서 3장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패턴을 다시 발견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요나는 불순종했고 바다에서 그의 인생이 끝나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시지만, 그를 건져내시고, 다시 그에게 말씀하신다. 1절의 "두번째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다. 첫십계를 받는 동안에도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돌판을 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돌판에 십계를 주셨다. 엘리야는 갈멜 산 이후에 죽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회복시켜 선지자 사명을 감당케 하신다. 베드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기회를 주셔서 초대교회의 기둥 역할을 하게 하신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에 반드시 세우고자 하신다. 니느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요나의 자리이듯, 우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 지금의 우리가 그 자리에서 멀어져있고, 그간의 우리 행적이 부끄러움 뿐이며, 다시 그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합당치 않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셨듯, 우리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이를 위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결코 잔잔한 모습이 아니시다. 요나는 바다의 풍랑 속에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 다행히 요나는 거기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회복의 경험은 감상적인 치유 프로그램이 아니다. 요나의 경험처럼 인생의 풍랑과 우리를 삼키는 거대한 물고기를 만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이상하게도 마지막 선을 넘어가야 하나님을 찾는 경향이 있다.

요나서 2장을 넘어가면 3장이 기다린다.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 하시고, 거기 서게 하신다. 우리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우리를 통해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이 기다린다. 요나의 선포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는 장이 기다린다. 도망자였던 요나를 통해 한 도시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장이 기다린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11/01/13

다시스의 진실

"..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3)

요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몇가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다시스의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나가 다시스에 가서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펼친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 성공이 아니다. 요나가 있어야할 곳은 니느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소명이었고, 선지자로서 그가 있어야할 곳이었다. 유진 피터슨은 오늘이 목회자가 니느웨를 피해 다시스로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다시스는 재미있는 곳이며 사람들이 이상향처럼 그린 곳이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다시스를 추구하는 것과 오늘의 교회가 놀랍도록 닮았다고 말한다.

둘째는 다시스를 향하는 요나를 위로함이 진정한 위로가 아니다. 바다 위의 요나의 장면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요나를 위로해야 한다.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고 그는 바다에 던져진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당했고 그는 위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읽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거기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요나가 그 바다에서 모든 시련을 잘 감당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는 한 그를 향한 모든 위로는 무의미해진다. 그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고민을 던지는 대목이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는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용기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스토리가 숨어있을 수 있다. 위로가 아닌 방향전환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시스가 아닌 니느웨로 가야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모든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 다시스에 잘 도착하라고 하는 것은 달콤하지만 그에게는 독이다. 그러나 달콤함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달콤함의 메세지를 늘 찾아다닌다. 그들은 다시스를 철회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다시스를 향하는 배에서도 하늘의 추적자를 만난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도망가고 도망갔다. 본문에는 두번이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을 사용한다. 도망자 요나를 본다. 그리고 도망자인 우리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스로 가는 그 바다에서 끝까지 우리를 추적하고 찾아내고 마는 하나님을 만난다.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39:9-10). 시인 프랜시스 톰슨도 이 추적자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는 이 추적자를 "하늘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 불렀다.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그리고 눈물의 안개 속에
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고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
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 그리고 발보다
더 급한 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
"네가 나를 배반하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제 곁에 저 발자국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
"아, 어리석고. 앞못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
너는 나를 쫓아 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쫓아 버렸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