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14

진취적이라는 것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1:9)

우리는 뒤쳐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시대정신에 뒤쳐질 수 있고 새로운 기술문화에 뒤쳐질 수도 있다. 

혹은 정체됨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발전되지 못한 모습으로 한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우리는 갖고 있다.

그래서 진취적이 된다는 것, 혹은 개혁적이 된다는 것은 늘 매혹적이다.  

그런데 앞서 간다는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본문의 "지나쳐"라는 구절을 새번역은 "앞질러 나가서"라고 했다. 앞서 간다는 것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발전되어야 것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있어야할 것이 있다.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은 발전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계셔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앞서간다는 가르침이 다른 가르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요한의 시대에도 앞서간다는 가르침을 좆았던 사람들이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에 빠졌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본문에 '그의 교훈에 거한다'는 것은 그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교회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지나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8/29/14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간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1:6)

사람들은 늘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원리와 원칙을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식고, 사랑에 치우치다 보면 원칙을 타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어느 하나를 희생하지 않으신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정점이었다.

사실 진리와 사랑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요한이서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1. 진리추구가 사랑을 가능케 한다. 요한은 우리가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2절)라고 말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함께 딛고 서있어야 할 지반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고향이라든가 같은 취미, 같은 배경 등의 지반은 늘 흔들리고 만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지반이 필요한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 밖에는 없다.


2. 진리추구의 목표는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계명이었다(5절). 하나님의 계명(진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말씀을 듣고 말씀을 공부하는 이유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반대로 사랑이 뒤따르지 않는 진리추구는 목적을 상실한 것들이다.

3. 우리의 사랑은 진리의 순종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느낌과 환경에 의존한 사랑은 쉽게 메말라버린다. 아무리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도 이 땅에 영속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며, 이는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요한은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6절) 말한다.  

즉 사랑은 순종이다.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그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 내 앞에 숙제로 남겨주신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다.

8/28/14

서로 다른 길에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0-22)


영성에는 칼라가 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어떤 이들은 성령을, 어떤 이들은 사회적 참여를, 혹은 수도원적 묵상을, 혹은 삶의 청빈을 추구하는 등 각가지 신앙의 길이 있다.


모든 길에는 나름 성경적 배경도 있고 체험도 있고 현실적 의미도 있다. 


교회는 각자의 길을 걸어온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교제하는 곳이다. 서로의 길이 다르다고 해서 교제를 거부하고 분파를 만들어 온 것이 아픈 기독교 역사다. 


그러나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고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교제를 위해 바울은 유용한 지침을 준다.


1. 무시하지도 맹신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가르침 외에 예언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형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바울은 그것을 멸시하지는 말되 헤아려(시험해) 보라고 권한다.


2. 헤아려 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  모든 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약점도 있다. 배우는 자세와 분별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내게 없는 것은 배우되, 배우지 말아야할 것을 분별할 수도 있어야 한다.

8/27/14

복수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성경에는 복수를 금하는 말씀이 여러번 나온다.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마음엔 보복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어한다. 말로 당하면 말로 갚고, 수치를 당하면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당했다는 것, 혹은 피해자라는 것이 악을 정당화할 수 있다. 내가 상처를 받았기에 그에게 상처를 돌려주는 것은 정당하다는 심리다.


역사의 끔찍한 악들은 그렇게 시작된 경우가 많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에게 상권을 다 빼앗겼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상처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권리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며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우리의 상처까지도 그분에게 위탁한 것이다.


상처받은 자 예수님은 우리의 악을 대신 갚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들의 구원이 되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길로 사는 법을 보여주셨다. 상처를 섬김의 기회로,  상처준 이를 내가 섬겨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길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고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8/25/14

우리가 소망하지 않는 이유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2)

초대교회는 우리들보다 예수의 재림에 대해 더 열심히 가르쳤고, 기다렸던 것 같다. 바울은 이들이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2절)고 말한다.

우리 시대에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잘 가르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을까?

핍박의 부재는 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도 지구의 한편에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기에 예수의 재림을 강렬하게 소망할 만한 이유들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세속화. 세속화는 모든 것을 현재로 바꾸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모든 관심을 현재로 바꾼다. 내일의 천국보다 지금의 여기가 더 중요하다. 세속화에 감염된 교회에서는 오늘을 위한 가르침만이 중요하다.

잘못된 교리들에 대한 지나친 방어의식. 이단들은 특히 예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해왔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자들은 예수 재림의 가르침을 무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진 것이  아닐까? 사랑하면 사모한다.  

신앙이 사랑이 아닌 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을 위한 일이 주님께 대한 사랑의 여백을 다 지워버릴 수 있다.  그 메마름 속에서 예수님을 소망할 만한 여유도 없이 사는 것이 오늘의 나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본다.

8/22/14

존경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게 되고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살전4:12,공동번역)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하신다. 존경을 이맇는 이유가 여러가지나 본문에서는 자기 직업에 충실하지 않는 것 때문이다(11절).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간증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자기 일에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활동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 얼마나 열렬히 찬양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또는 교회에서 어떻게 봉사하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함께 일하는 직업의 현장이다.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정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직장에서의 일 자체가 선교다. 우리는 교회에서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8/21/14

욕심을 내려놓으면 보인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미화시켜도 거룩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다. 본문에 나타난 분명한 사례는 형제의 아내에게 향하는 것이다(6절).


어떤 이유에서건 이로 인해 형제를 해하고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신원"(복수)하신다고 말한다.


욕심이 과하면 눈이 흐려진다.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다가도  욕심이 발동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킨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순간 우리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너무 강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싶어진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보인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뜻이 보인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킬 줄 알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아담의 후예인 인간이 진정으로 항복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십자가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갈2:20)

8/20/14

다시 오실 주님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3:13)

오늘 아침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난다. 바울의 글을 읽어보면 그는 늘 이것을 의식했던 것 같다. 앞에서도 데살로니가인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앞에서 자랑하겠다고 했다(살전2:20).

주님의 다시 오심을 의식하면 오늘은 그날이 있기까지의 과정이다. 오늘의 승리와 실패도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다 거두어진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시간과 같고 언젠가 모태에서 나오듯,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아 그분과 함께 영원을 살 것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C.S.루이스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저 책의 겉표지에 불과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책의 진짜 내용이 펼쳐질 것이라 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의식하면 오늘의 삶은 언젠가 하나님을 만날 준비의 날들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말씀처럼 그분앞에 섰을 때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서는 것, 그렇게 되도록 준비의 오늘을 살자.

8/18/14

우리가 세움받은 목적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3:3)

우리가 위하여 세움을 받은 '이것'은 환난이다. 우리는 고난을 위해 세움받은 이들이다. 즉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이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다. 고난을 피하고 복음을 위해 살 수는 없다. 복음적 삶에 고난은 필연이다.

빌립보서에서도 은혜를 주신 까닭은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생활에 고난은 필연이다.

왜 필연이어야할까?  그것은 고난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성숙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우리의 기도는 '이 고난을 빨리 치워주소서'가 아니라 '이 고난을 통해 주님 닮게하소서'이어야 한다. 이 고난의 목적을 이해해야 고난 속에서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8/16/14

각자의 길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2:14)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싸움이 있다. 유대교회들은 유대인들에게서, 데살로니가인들은 동족에게서 고난을 받았다.


고난이 찾아올 때, 자신만이 고난 속에 있는 것 같고, 자신의 고난만이 커보인다. 고난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만이 커보일 수 있고, 자신의 헌신과 희생만이 더 커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의 싸움이 있듯 그들에게는 그들의 싸움이 있다. 우리가 주께 충성하듯, 다른 모습으로 주께 충성하는 이들이 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는 엘리야의 함정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숨겨진 7000인도 있다. 숨겨진 이들이 있다. 나만 고난받는 것도 아니고 나만 충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모두 다르다. 예수님은 요한의 장래를 묻는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인가? 너는 다만 나를 따르라" 하셨다. 베드로는 순교했고,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전해진다.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베드로는 그 나름대로 주님을 따랐다. 그들은 각자 주님께 충성했지만, 각각의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으면 된다. 내가 싸워야할 싸움이 있고, 내가 받아야할 고난이 있고, 나에게 요구되는 충성이 있다. 


각자에게 주신 길,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 부른다. 그 소명에 충실하자 

8/15/14

초연하기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살전2:6)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초연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갈망이다. 

사람들의 칭찬은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에 격려하라는 말 속에는 칭찬도 들어있으리라. 부모의 칭찬 속에 자라난 아이들이 건강하다. 칭찬은 고래도 움직인다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칭찬이 우리의 동기를 다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에 배고픈 이들은 이에 과도히 집착한다. 사람들 사이에 칭찬이 오감은 아름다운 것이나 집착이 되는 순간 병이 된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칭찬받을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복음을 전해야할 때도 있고,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엄중히 말해야할 때도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얘기하는 것은 사역이나 자녀양육을 망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바울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바울이 그렇게 사람들의 칭찬에 초연할 수 있었던 비밀을 12절에서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우리를 불러 그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더 깊히 사모하게 되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초연함을 배우게 된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할 때 사람들의 영광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8/14/14

말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4절)

오늘 아침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가 말할 때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신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해도 마음이 깨끗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말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말의 추함 뿐만이 아니다. 마음이 깨끗지 않으면 미사여구가 동원된다 해도 추한 말이다. 

본문에서 추한 마음으로 하는 말 몇가지가 있다.

속임수의 말(3절). 메세지역에서는 'hidden agenda'로 하는 말이라 했다. 시간은 종종 심판관이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이의 말이 다른 의도가 숨어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첨의 말(5절).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말이다. 칭찬은 좋은 것이나 동기가 상대방이 아닌 자기에게 있을 때 칭찬은 추해진다.

탐심의 말(5절). 뭔가를 얻고자 위장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하는 순간 상대방은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된다. 대화의 상대가 "당신(you)"이 아닌 "그것"(it)이 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신다.

8/13/14

양떼와 군중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데살로니가인들이 신앙을 갖게된 경위에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바로 메시지가 인격과 함께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았고(5절) 본받았다(6절). 메시지만 전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인들이 그렇게 빨리 변화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은 삶으로 증명된 복음이었다. 바울을 보았고 본받았고, 다른이들에게 본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인격적 환경의 회복이 필요하다 본다. 바울은 삶을 오픈했고, 사람들은 그를 지켜보며 그와의 인격적 교감 속에서 복음을 배웠고 그를 본받았다. 


양떼가 군중이 되는 순간 복음의 인격성을 상실한다. 군중들은 메시지는 배울 수 있지만 본을 통해 삶을 배울 수가 없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무력한 이유가 될 것이다.


군중 속에 있는 양떼 또한 삶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메시지를 받는 무리 속에 있으면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는 있지만 삶을 보여줄 필요가 없으니 메시지 속에서 얼마든지 삶을 감출 수 있다.


누군가를 본받자면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양떼를 이끄는 목자는 양떼에게서 멀리 떨어져 지휘만 하는 자가 아니라 양떼 가운데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하는 자다.


프란치스코 교황 열풍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제는 양떼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떼들과 섞여있기 위해 바티칸의 고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그의 몸무림이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인 것 같다.

8/12/14

겸손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이 구절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을 받은 이들은 확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구절은 "이는"(because)으로 시작한다. 즉 4절에 대한 이유이다.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데살로니가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심을 안다고 확신있게 말한다. 

우리 사역에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우리에게 돌릴 때가 많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다거나 가르치기를 잘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마음에서는 교만이 싹트고 부질없는 자부심이 생겨난다.

바울은 그 이유를 섬기는 대상에게 돌린다. 하나님께서 그 대상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바울의 겸손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보는데서 그의 겸손이 나왔다.

우리가 허탄한 자랑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기도하자

8/09/14

징계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학2:17)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을 입맛대로 고를 수는 없다.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하나님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재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의 치심은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유일 수는 있다. 그러므로 재난이 올 때는 혹시 하나님의 치심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본문에서는 곡식을 마르게 하거나 소출이 떨어지게 하는 각가지 재난을 통해 이들을 치셨다. 때로는 질병으로, 사고로도 우리를 치신다.

하나님이 치시는 이유는 그들이 성전짓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중단된 기도, 중단된 십일조 생활, 중단된 예배생활일 수 있다.  

하나님은 치셨으나 사람들은 한동안 돌이키지 않았다. 자신들의 재난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몰랐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학개는 1장에서 그들의 재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우친다.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느끼고도 돌이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간의 죄인됨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집보다 자신들의 집이 더 중요했다.

그들의 돌이키지 않음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느낀다. 그들과 똑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징계임을 느끼면서도 돌이키기를 머뭇거리는 모습은 없는가?

8/08/14

만군의 하나님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학2:6-9의 짧은 네 구절에서  매 구절마다 "만군의 여호와"가 언급된다.  성전을 다시 지으려면 많은 재원이 필요했지만, 유다인들은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임을 힘주어 강조하심은 모든 필요는 자신이 해결하시겠다는 의도다. 세상의 은금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열국을 흔들면 그들이 보배를 가지고 이 성에 올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면 우리들은 자신의 손에 무엇이 있는가를 계산할 때가 많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족속에게 가라 명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는 분이요, 마지막까지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다. 


이들이 짓는 초라한 성전을 이전 영광보다 더 영화롭게 하실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만군의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짓는 일은 그들의 몫이요,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의 사역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은  초라함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신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이것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몫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만들려하면 피곤하고 인위적 조작을 하게 된다.


성전의 영광은 메시아의 영광의 그림자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셨고 이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않았으나 세상의 빛이요, 영광 중에 영광이 되신다. 그분은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셨으나 세상의 빛이 되셨다.

8/07/14

이전 영광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2:3)

다시 성전을 지을 때 이전의 솔로몬 성전을 본 이들이 있었다. 에스라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대성통곡했다. 과거의 영광과 지금의 초라함이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전 영광'이 있을 수 있다.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 이전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 이전의 인간관계들, 교회의 이전 영광 등.

하나님은 이전과 비교해서 지금이 보잘것 없다하여 포기하지 말라 하신다. 성전짓는 이들 중에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성전의 화려함과 영광 혹은 사이즈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다 해도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면 하나님의 성전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성전이라 하셨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보잘 것 없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엔 영광의 시기도 있고 보잘 것 없는 시기도 있다. 영광도 초라함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이전 영광에 사로잡혀 오늘을 불평만 하고 있다면 오늘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놓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4절)

8/06/14

게임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12절)

종종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누군가를 보내신다. 종종 나를 일깨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있다.

그는 교회의 목장식구일 수 있고, 가까운 이웃일 수 있고, 우연한 만남일 수도 있다. 혹은 우연히 읽은 책자일 수 있고 그날 경험한 어떤 사건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인식되는 순간, 평범한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된다. 그 자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리가 된다.

어쩌면 오늘의 하루는 게임인지 모르겠다. 하루의 배경 속에 배치된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찾아내는 게임말이다. 

그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일상 속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된다.

8/05/14

심플함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1:8)

이 구절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성전은 파괴되어 있었고, 공사는 중단되어 있는 상태였고, 하나님의 뜻은 성전을 짓는 것이었다.

아주 심플하고 명료하다. 우리는 이런 심플한 메세지를 전했던 학개를 이사야나 다니엘보다는 심오하지 않은 예언자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깊이는 무엇이며 심오함은 무엇인가? 담겨진 뜻을 그대로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복음을 관념화하고 철학으로 만들 수가 있다. 복음은 심플하다. 심플한 복음을 심플하게 전하는 하루가 되자.

8/04/14

변질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학1:4)

사람은 외적 환경에 의해서 내적인 동기가 변질될 수 있다. 

539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다민들은 귀환하여 곧 바로 제단과 매일의 제사를 복구하고(에스라3), 이어 성전건축을 시도한다.  

그러나 주변 이웃들의 반대에 직면한다. 이들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앗수르 왕 에살하돈의 이주정책으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게 된 이민족들이다(에스라3:2).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으므로 유다민의 귀환까지 거의 180년을 그 땅에 산 셈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유다민의 귀환이 반가울리 없다. 

그래서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유다민의 성전건축을 방해한다. 에스라 4:4에 의하면 이들은 고레스왕 때부터 캄비세스를 거쳐 다리오가 즉위할 때(주전 522년)까지 그 땅을 관할하는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건축을 방해했다.

즉 성전건축을 시도했다가 약 20년 정도를 주변인들의 반대로 중단한 상태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사이 유다민들이 성전건축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리오왕이 즉위할 때 쯤 주변인들의 방해도 시들해졌기에 학개는 새로운 기회가 왔다고 보았지만 유다민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댄다.

외적인 환경은 우리의 동기를 변질시킬 수 있다. 오랜 방해를 경험하면서 이들은 성전건축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비전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다른 것에 열중한다.  이들은 이제 멋있는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만 열중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위기라는 말이 여기 저기서 들린다. 많은 교회들이 생존을 고민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들이 부흥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앗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 때문에 복음에 헌신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변질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8/02/14

회개한다는 것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1:17-18)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용서함 받은 우리가 해야할 것들이 있다. 우리가 풀어야할 것들은 풀어야 한다. 회개한다는 것은 청산과 변상까지도 포함한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었다. 복음을 통해 영적인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오네시모와 그의 옛주인 빌레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님을 알기 전에 빌레몬에게 잘못을 행한 일이야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죄용서함을 받은 그는 빌레몬을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했다.


회개는 회개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 회개의 진정성은 주님의 용서 뿐 아니라 자신의 책임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바로 잡아야할 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해야 한다.


주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셨다. 회개했다 말하지만, 그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심복이 되었다고 말하고,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13절). 


그러나 먼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회심 후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 바울은 이 회복의 과정까지도 돕는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고 오네시모가 갚아야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회심 뿐 아니라 회복까지 돕는 것을 의미함을 바울을 통해 다시 배운다.

8/01/14

두가지 접근법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몬1:8-9)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나 전도를 하였다. 사연을 들어본즉 자신이 알고있는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로마로 도망쳤다가 무슨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자였다.


오네시모의 출소가 다가오자 바울이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내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이 때 바울의 태도를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명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간구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령하면 순종할 것도 알았다(21절).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이는 어떤 사안에 대한 우리의 두가지 접근법을 보여준다. 하나는 포지션(지위)로, 다른 하나는 관계로 접근하는 것이다. 


포지션은 힘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그  힘이 없으면 다른 이의 것을 이용해서라도 힘으로 문제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 힘이 있으면 문제를 쉽게 풀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풀고자 했다. 힘이 있으되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없는 자처럼 부탁한다. 빌레몬의 사랑에 호소한다.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 딱딱하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디가는 것 같으나 따뜻하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나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힘이 없는 자 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