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14
8/29/14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간다. 8월 29, 2014
8/28/14
서로 다른 길에서 8월 28, 2014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0-22)
영성에는 칼라가 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어떤 이들은 성령을, 어떤 이들은 사회적 참여를, 혹은 수도원적 묵상을, 혹은 삶의 청빈을 추구하는 등 각가지 신앙의 길이 있다.
모든 길에는 나름 성경적 배경도 있고 체험도 있고 현실적 의미도 있다.
교회는 각자의 길을 걸어온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교제하는 곳이다. 서로의 길이 다르다고 해서 교제를 거부하고 분파를 만들어 온 것이 아픈 기독교 역사다.
그러나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누구든지 와서 기도하고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교제를 위해 바울은 유용한 지침을 준다.
1. 무시하지도 맹신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가르침 외에 예언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형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바울은 그것을 멸시하지는 말되 헤아려(시험해) 보라고 권한다.
2. 헤아려 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 모든 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약점도 있다. 배우는 자세와 분별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내게 없는 것은 배우되, 배우지 말아야할 것을 분별할 수도 있어야 한다.
8/27/14
복수 8월 27, 2014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5:15)
성경에는 복수를 금하는 말씀이 여러번 나온다.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마음엔 보복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어한다. 말로 당하면 말로 갚고, 수치를 당하면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당했다는 것, 혹은 피해자라는 것이 악을 정당화할 수 있다. 내가 상처를 받았기에 그에게 상처를 돌려주는 것은 정당하다는 심리다.
역사의 끔찍한 악들은 그렇게 시작된 경우가 많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에게 상권을 다 빼앗겼다는 피해의식도 있었다.
상처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권리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며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우리의 상처까지도 그분에게 위탁한 것이다.
상처받은 자 예수님은 우리의 악을 대신 갚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들의 구원이 되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길로 사는 법을 보여주셨다. 상처를 섬김의 기회로, 상처준 이를 내가 섬겨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길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고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8/25/14
우리가 소망하지 않는 이유 8월 25, 2014
8/22/14
존경 8월 22, 2014
8/21/14
욕심을 내려놓으면 보인다 8월 21, 201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미화시켜도 거룩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다. 본문에 나타난 분명한 사례는 형제의 아내에게 향하는 것이다(6절).
어떤 이유에서건 이로 인해 형제를 해하고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신원"(복수)하신다고 말한다.
욕심이 과하면 눈이 흐려진다.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다가도 욕심이 발동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킨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순간 우리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너무 강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싶어진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보인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뜻이 보인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킬 줄 알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아담의 후예인 인간이 진정으로 항복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십자가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갈2:20)
8/20/14
다시 오실 주님 8월 20, 2014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3:13)
오늘 아침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난다. 바울의 글을 읽어보면 그는 늘 이것을 의식했던 것 같다. 앞에서도 데살로니가인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앞에서 자랑하겠다고 했다(살전2:20).
주님의 다시 오심을 의식하면 오늘은 그날이 있기까지의 과정이다. 오늘의 승리와 실패도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다 거두어진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시간과 같고 언젠가 모태에서 나오듯,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아 그분과 함께 영원을 살 것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C.S.루이스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저 책의 겉표지에 불과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책의 진짜 내용이 펼쳐질 것이라 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의식하면 오늘의 삶은 언젠가 하나님을 만날 준비의 날들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말씀처럼 그분앞에 섰을 때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서는 것, 그렇게 되도록 준비의 오늘을 살자.
8/18/14
우리가 세움받은 목적 8월 18, 2014
8/16/14
각자의 길 8월 16, 2014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2:14)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싸움이 있다. 유대교회들은 유대인들에게서, 데살로니가인들은 동족에게서 고난을 받았다.
고난이 찾아올 때, 자신만이 고난 속에 있는 것 같고, 자신의 고난만이 커보인다. 고난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만이 커보일 수 있고, 자신의 헌신과 희생만이 더 커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의 싸움이 있듯 그들에게는 그들의 싸움이 있다. 우리가 주께 충성하듯, 다른 모습으로 주께 충성하는 이들이 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는 엘리야의 함정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숨겨진 7000인도 있다. 숨겨진 이들이 있다. 나만 고난받는 것도 아니고 나만 충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모두 다르다. 예수님은 요한의 장래를 묻는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인가? 너는 다만 나를 따르라" 하셨다. 베드로는 순교했고,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전해진다.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베드로는 그 나름대로 주님을 따랐다. 그들은 각자 주님께 충성했지만, 각각의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으면 된다. 내가 싸워야할 싸움이 있고, 내가 받아야할 고난이 있고, 나에게 요구되는 충성이 있다.
각자에게 주신 길,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 부른다. 그 소명에 충실하자
8/15/14
초연하기 8월 15, 2014
8/14/14
말 8월 14, 2014
8/13/14
양떼와 군중 8월 13, 2014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데살로니가인들이 신앙을 갖게된 경위에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바로 메시지가 인격과 함께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았고(5절) 본받았다(6절). 메시지만 전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인들이 그렇게 빨리 변화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은 삶으로 증명된 복음이었다. 바울을 보았고 본받았고, 다른이들에게 본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인격적 환경의 회복이 필요하다 본다. 바울은 삶을 오픈했고, 사람들은 그를 지켜보며 그와의 인격적 교감 속에서 복음을 배웠고 그를 본받았다.
양떼가 군중이 되는 순간 복음의 인격성을 상실한다. 군중들은 메시지는 배울 수 있지만 본을 통해 삶을 배울 수가 없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무력한 이유가 될 것이다.
군중 속에 있는 양떼 또한 삶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메시지를 받는 무리 속에 있으면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는 있지만 삶을 보여줄 필요가 없으니 메시지 속에서 얼마든지 삶을 감출 수 있다.
누군가를 본받자면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양떼를 이끄는 목자는 양떼에게서 멀리 떨어져 지휘만 하는 자가 아니라 양떼 가운데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하는 자다.
프란치스코 교황 열풍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제는 양떼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떼들과 섞여있기 위해 바티칸의 고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그의 몸무림이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인 것 같다.
8/12/14
겸손 8월 12, 2014
8/09/14
징계 8월 09, 2014
8/08/14
만군의 하나님 8월 08, 2014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학2:6-9의 짧은 네 구절에서 매 구절마다 "만군의 여호와"가 언급된다. 성전을 다시 지으려면 많은 재원이 필요했지만, 유다인들은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임을 힘주어 강조하심은 모든 필요는 자신이 해결하시겠다는 의도다. 세상의 은금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열국을 흔들면 그들이 보배를 가지고 이 성에 올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면 우리들은 자신의 손에 무엇이 있는가를 계산할 때가 많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족속에게 가라 명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는 분이요, 마지막까지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다.
이들이 짓는 초라한 성전을 이전 영광보다 더 영화롭게 하실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만군의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짓는 일은 그들의 몫이요,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의 사역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은 초라함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신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이것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몫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만들려하면 피곤하고 인위적 조작을 하게 된다.
성전의 영광은 메시아의 영광의 그림자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셨고 이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않았으나 세상의 빛이요, 영광 중에 영광이 되신다. 그분은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셨으나 세상의 빛이 되셨다.
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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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14
게임 8월 06, 2014
8/05/14
심플함 8월 05, 2014
8/04/14
변질 8월 04, 2014
8/02/14
회개한다는 것 8월 02, 2014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1:17-18)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용서함 받은 우리가 해야할 것들이 있다. 우리가 풀어야할 것들은 풀어야 한다. 회개한다는 것은 청산과 변상까지도 포함한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었다. 복음을 통해 영적인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오네시모와 그의 옛주인 빌레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님을 알기 전에 빌레몬에게 잘못을 행한 일이야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죄용서함을 받은 그는 빌레몬을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했다.
회개는 회개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 회개의 진정성은 주님의 용서 뿐 아니라 자신의 책임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바로 잡아야할 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해야 한다.
주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셨다. 회개했다 말하지만, 그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심복이 되었다고 말하고,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13절).
그러나 먼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회심 후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 바울은 이 회복의 과정까지도 돕는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고 오네시모가 갚아야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회심 뿐 아니라 회복까지 돕는 것을 의미함을 바울을 통해 다시 배운다.
8/01/14
두가지 접근법 8월 01, 2014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몬1:8-9)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나 전도를 하였다. 사연을 들어본즉 자신이 알고있는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로마로 도망쳤다가 무슨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자였다.
오네시모의 출소가 다가오자 바울이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내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이 때 바울의 태도를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명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간구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령하면 순종할 것도 알았다(21절).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이는 어떤 사안에 대한 우리의 두가지 접근법을 보여준다. 하나는 포지션(지위)로, 다른 하나는 관계로 접근하는 것이다.
포지션은 힘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그 힘이 없으면 다른 이의 것을 이용해서라도 힘으로 문제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 힘이 있으면 문제를 쉽게 풀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풀고자 했다. 힘이 있으되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없는 자처럼 부탁한다. 빌레몬의 사랑에 호소한다.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 딱딱하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디가는 것 같으나 따뜻하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나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힘이 없는 자 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