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10

교회는 공동체일 수 있는가?

느헤미야 3장을 묵상하면서 공동체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1인 목회자가 교회와 대등시 되는 요즘 느헤미야 자신은 쏙 빠지고 거기에 참여했던 이들의 수많은 이름들이 거론되는 예루살렘 재건의 현장은 오늘의 교회 재건현장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공동체의 승리였다.
그런 공동체를 위해서 세가지가 중요한 것 같다.
1.그 공동체의 꿈은 무엇인가?
2.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솔선수범하고 있는가?
3.그 공동체원들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는가?

7/30/10

더 깊은 은혜

왕하 8장에서 두명의 유다 왕은 모두 아합의 죄와 관련이 있었다. 한번 허용한 죄의 뿌리는 그렇게 깊다. 그러나 성경은 아합보다 훨씬 이전의 다윗을 기억한다. 다윗 때문에 멸하기를 보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 보다도 더 깊다

7/29/10

엘리사의 눈물, 우리 시대의 처방

엘리사는 능력의 사람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하사엘의 앞날을 내다보기도 하였다. 우리 시대에도 능력의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엘리야처럼 눈물을 가진 이는 많지 않다.

'주여 애통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7/28/10

시간은 주님께 속해 있으니...

엘리사의 권고대로 기근을 피해 다녀온 수넴여인은 자기의 재산권 문제로 왕에게 호소 해야만 했다 마침 그 때는 게하시가 왕에게 엘리사가 이 여인의 아들을 살려준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타이밍인가?

"조급하기만 한 우리, 주님의 시간에 나를 맡기는 연습을 좀더 해야겠습니다. "

7/27/10

믿음은 도전이다

왕하 7:10-20에서 나병환자들이 전해준 시리아군의 퇴각 소식에, 성경은 왕과 한 장관의 반응을 상세히 보고한다. 특히 엘리사가 전해준 말씀에 대한 이들의 불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나라면 나병환자들이 이런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별반 다르지 않았을까?  믿음은 도전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11:6) 이 말씀도 도전이다.

7/26/10

사람이 위대해지는 순간

열왕기하 7장의 나병환자들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죽을 판이기에 차라리 음식이 풍족한 적군 시리아군에 가서 구걸하고자 갔다가 황급히 떠나간 그들이 남긴 풍성한 식탁과 의복을 정신없이 탐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보통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의 것들만 챙기다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람이 위대해지는 순간이라 믿는다. 그들이 비록 나병환자들일지언정,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한 위대한 사람들인 것이다.

7/23/10

여자의 마음

프로이트가 친구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 "30년간 여성의 마음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결코 답을 들어본 적이 없고 나 역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입니다."
-아멘드 니콜라이, 루이스 vs 프로이트

책을 읽다가 웃었습니다. 여자의 마음이란!!!


7/22/10

눈을 열어주소서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하 6:17)

엘리사가 사환를 위해 기도한 제목이다. 사환의 눈은 자신을 둘러싼 적군을 보았다. 엘리사는 그들보다 강한 하나님의 천군천사를 보았다. 홍해 앞에서도 같은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추격한 애굽 군대를 보았다. 모세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라'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사환과 홍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같이 사용된 단어가 있다. "두려움"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인생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제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엘리사의 도끼, 낯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엘리사의 도끼는 우리에게 편안하지 않다. 제자 중 하나가 도끼를 강물에 빠뜨렸는데, 엘리사가 나무 가지를 꺽어 그곳에 던졌더니 도끼가 떠올랐다는 얘기는 좀 불편하다.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다. 차라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더 편안하다(비록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해도). 엘리사의 도끼에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교훈을 추출하기도 어렵고, 이것을 오늘의 내게 어떻게 적용시켜야할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이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당혹스럽고, 낯설은 곳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상식에 어떤 충돌을 일으키고, 우리의 정서에 불편함을 주고, 우리의 이해의 파일에 정리되기가 쉽지 않은 낯설은 지점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그 낯설음 때문에 돌아서기도 한다.
단지 기적 뿐 아니라, 때로는 고난의 문제에서도 내 이해의 폭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낯설은 하나님의 넓은 폭을 느낀다. 여기서 돌아서서 그동안 많은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만들어준 편안한 길로만 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지점이며, 내가 그분을 만나야할 지점이기도 하다.
체스터톤이 말한바 '신앙은 당황의 연습'이란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7/20/10

게하시의 변명

게하시는 변명할 것이 있었을 것이다.
사역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졌으니 사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기 민족의 침략국인 아람 장군에게서 무엇을 받은 들 어떠하랴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람을 따라 다니느라 가족의 생계를 챙겨주지 못함이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아무리 정당화해도 죄는 죄다. 돈 문제로 인해 사역자가 추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하나님이여, 돈 문제에 있어서 늘 깨끗하게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