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5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출18:24)

모세는 경청할 줄 아는 리더였다.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혼자 감당하던 일을 분담하게 되었다.

모세가 경청하는데 장애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라는 점이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는데 방해할 수도 있었다. 사실 자리가 높아질수록 경청보다는 지시가 많아진다. 

조언을 했던 장인이 이방인 제사장 출신이라는 점도 방해물이 될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의 문화를 몰랐을 것이고, 여호와 신앙에 대해서는 아직은 깊은 지식이 없는 이였기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드로의 조언은 모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첫째, 짐을 나누게 되었다.  모세는 처음에 혼자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드로는 모세의 탈진을 우려했다. 탈진상태(burn-out)의 예방책은 분담과 위임이다.  리더가 모든 사소한 일에 다 관여하면 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둘째, 백성들의 리더십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 사람들을 선별하여 일을 맡김으로 그들이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고, 그들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셋째, 백성들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출애굽에 급급했던 그들인지라 지파와 가계에 따른 장로들은 있었지만, 체계적인 조직은 아직 없었던 상태였다. 그들을 10명단위, 50명단위, 100명단위, 그리고 1000명 단위로 그룹화함으로써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아이디어를 내어야만 리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이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리더의 특징이 된다.

2/27/15

이드로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출18:11)

이 고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고백이다. 혹자는 모세의 여호와 신앙이 이드로에게 영향받은 것이라 하는데, 본문에 의하면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모세가 그와 동거했을 때, 신앙에 대해서 서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그는 과거 '미디안의 제사장'이었고, 이제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희생제사까지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변화가 있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애굽으로 향할 때 모세에게 가족은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에서 장인에게로 돌려보냈다. 아들의 피할례 사건 직후라고 생각되는데, 아내와의 마지막 장면은 모세를 향한 아내의 원망 섞인 한탄이었다.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에게 여호와의 소명을 이해시키고, 아내가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면 출애굽의 영광 속에 모세는 쓰임받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이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떤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

종종 그것은 우리에게 순종의 테스트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나머지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마6:33). 결국 이방인 제사장인 장인의 입에서 여호와 신앙의 고백이 이루어졌고, 이해할 수 없었던 모세의 결단을 이해하게 되었듯, 우리들에게도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이다.

2/26/15

기도의 능력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

성경에서 기도의 능력을 생생한 그림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이 본문이 아닌가 싶다. 광야의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여호수아는 전투에 앞장서고 모세는 기도한다.  기도하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아멜렉이 이겼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내가 직면한 상황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기도다. 주님을 정말 신뢰하고 있다면 주님께 기도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 믿음을 주께 보였다.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주께 부르짖었고, 아멜렉 전투에서는 기도의 손을 올렸다.

나는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가?  오늘 아침  주님이 주시는 도전이다. 관념적으로 그렇다 하면서도 실제적인 문제 앞에선 자주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

2/25/15

광야에서 살아남기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9)

아이들이 어렸을 때 즐겨보단 만화 중엔 '사막에서 살아남기'가 있었다. 광야에서의 그들의 삶은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광야의 뜨거운 바람과 햇볕, 밤에 몰려오는 추위, 집단 생활에서 오는 전염병의 위험, 광야 여행객을 노리는 약탈꾼들....

그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명하신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은 생뚱맞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때때로 하나님의 자상함은 명령의 형태로 온다.

사람들은 그 광야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단없이 행진을 계속했다면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안식일이 있기에 쉼을 통해 재충전하고, 새롭게 행진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명령의 형태로 강제력을 행사하셨다. 우리는 반드시 쉼이 필요하다.

심지어 만나를 거두러 가는 수고도 하지 않고 온전히 안식하도록 전날에 두배를 거두도록 하셨다.  다른 때와 같이 남겨두어도 상하거나 냄세도 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이 세밀한 배려였다. 

평소보다 더 많이 가졌을 때, 우리는 소유의 가속도에 빠지기 쉽다. 점점 더 많이 가지려고 안식을 잃어버리기 쉽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안식일에도 거두러 나왔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만나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많이 소유할 수록 짐이 되고, 소유해도 그것은 곧 상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주셨다면 단 한가지, 우리의 안식을 위함이다.  

안식은 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안식은 '여호와 앞에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이었다. 광야의 치열함이 주는 최대의 위기는 생존의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을 잊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그들이 애굽을 떠난 이유도, 그 광야의 고통을 참는 이유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보여주듯 사람들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곳이 지옥이다.  

안식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우리의 관심사를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살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며, 삶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삶이 치열할 수도록 우리에겐 안식이 필요하며, 안식이야 말로 우리의 광야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다.

2/24/15

하나님의 해결방식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16:15)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수는 성인 남자만 60만명이니 대략 150만에서 200만명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들을 이끌어 광야에서 훈련하셨는데 우여곡절 끝에 40년의 시간이 걸렸다. 40년 동안,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동일하게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시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해결책은 예상치 못한 해결책이었다.  하늘에서 무엇인가 내려왔을 때 그들은 "manhu"  즉 이것이 무엇이냐 외쳤다. 결국 그것이 만나로 명명되었는데, 이 음식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음식이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 우리에게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던 음식을 주셨듯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도 일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둘째, 하나님의 해결책은 풍성하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아침에는 만나가 온 지면을 뒤덮을 정도로 풍성했다.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만큼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에 먹은 만나의 양은 어림잡아 1톤 트럭 4,600대 분량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40년 동안 지속되었다.


셋째, 하나님의 해결책은 우리의 수고를 포함시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을 스스로 거둬들여야 했다. 해가 뜨면 없어지니 그전에 나가 수고해야 했다. 그것도 매일 반복해야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과정도 동일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웬일인지 한번에 일주일치를, 혹은 한달치를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만일 그렇게 주셨다면 광야를 여행해야했던 그들에겐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매일의 수고가 필요했지만, 오히려 그런 방식이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였다. 

오늘 아침 이 구절이 새롭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2/23/15

배부름이 축복만은 아닌 이유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16:8)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의 배경은 사람들의 불평 때문이었다. 출애굽 이후 꼭 한달만에 그들의 모든 양식은 떨어진 것 같다. 그리고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불평을 쏟아냈고, 하나님은 이를 들으시고 먹을 것을 내려주셨다.

이 기적의 의미는 백성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이상이었다. 모세는 이 기적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애굽에서 그들은 건져낸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될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바로에게 기적을 행할 때 마다 하셨던 말씀이다. 

기적을 통해 바로의 완고함을 다루셨던 하나님은 이제 기적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 불평이 결국은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아셨고 그 배후에는 우리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원망을 들으셨다는 표현이 본문에 네번이나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들의 원망을 심각하게 여기셨다는 증거다.

그리고 기적을 통해 이것을 다루기를 원하셨다. 기적은 축복인 동시에 훈련이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배워야 했다. 그들은 매일 하루치만 거둠으로 광야의 안전은 먹을 것을 비축해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배워야 했다. 오늘의 광야를 걷는 우리들이 배워야할 교훈도 마찬가지다. 

기적은 축복인 동시에 시험이었다. 시편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시편 78:29-31)

그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노여움을 당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배부름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축복으로 여겨졌던 그 일로 그들은 노여움을 당하게 되었다.  배부름은 축복인 동시에 시험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무엇인가를 누린다고 여겨졌을 때가 더욱 긴장해야할 때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어떤 자리가 주어지자 무너지고, 물질이 주어지자 망가지고, 사람들이 추종하자 기도의 무릎을 푼다.

2/22/15

하나님께 나가기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출15:24-25)

딱 3일만이었다. 홍해를 지나 하나님을 찬양하던 회중들은 3일의 여행을 하고 모세를 원망한다. 그들이 도착한 마라의 물은 쓴 물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감사는 쉽게 변하고 수명이 짧다. 

이번에도 표적은 모세였다. 홍해를 만나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리로 데려왔느냐" 하던 그들이 마라의 쓴 물을 마시자 또 모세를 원망한다.  그리고 이것은 광야의 어려움을 만날 때 마다 일종의 패턴이 되었다. 사람들은 힘들면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다.

그런데 그렇게 비난과 원망을 받을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는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일관된 그의 반응은 "하나님께 나가기" 였다.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온유함이 온 지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라 부른다. 그의 온유함은 바로 이런 반응전략에서 나왔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들에게 일일이 다 설명하고 해명하고 설득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나갔다. 성경이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2/20/15

영광의 기회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출15:17)

우리에게는 두려운 상황이 하나님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추격해 들어오는 애굽 군대로 영광을 얻으시겠다 하신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말씀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바로가 마음을 굳게하고, 약속을 번복하고, 출애굽이 지연될 때마다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에게는 안 풀리는 상황이요, 위급한 상황이요, 두려움에 떨게되는 상황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상황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실 때 영광받으신다.  애굽의 재앙들이 일어날 때 처음에는 애굽의 술사들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곧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나중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인정했었다. 

바로가 약속을 번복할 때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셨다.

지금 또 다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벌어질 기회가 왔다. 이스라엘을은 바다를 등지고 애굽의 군대는 추격해 들어오는 절박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기회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셨다.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으며, 애굽의 군대들은 사라졌다. 그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분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 인생 가운데 행하길 원하신다.  우리에게는 두려운 상황,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기회,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의 상황에 대해 주께 물어야 한다. 혹시 악화된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는 상황인지 묻고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2/18/15

돌아가는 길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출13:17)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루트는 세가지였다. 가장 빠른 길은 블레셋길, 열하루면 갈 수 있었다. 홍해로 가는 광야길은 돌아가는 길이며, 가장 멀리 우회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중간 길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가장  먼 길로 인도하셨다.

18절에 그들이 갔던 홍해길을 가리켜 "돌아" 가는 길이라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빠른 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 때때로 더디게 가는 길, 돌아가는 길로도 가게된다.  그 길은 광야를 통햐는 길이기도 했다. 쉬운 길도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불평할 수 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도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다. 하나님은 빠른 길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블레셋을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끝까지 정복하지 못한 부족이 블레셋인 것을 봐도 그들의 군사력은 강력했고, 벽돌이나 굽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였다.

빠르고 쉬운 길이 항상 우리에게 좋은 길은 아니다. 때로은 천천히 가야하는 길, 돌고 도는 길, 광야같은 길이 우리에게 최선의 길일 수 있다.  비록 더딜지라도 그 길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 된다.

2/17/15

기억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출13:8)

우리가 남길 영적 유산은 기억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그 급박한 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날이 정기적으로 기억되기 위해 두가지를 행하라 하신다. 첫째는 무교절을 지키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무교절은 발교되지 못한 반죽을 가지고 떠나야 했던 출애굽의 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또 사람 짐승을 포함한 모든 처음 난 것을 바치되 작은 짐승은 그대로 제물로 바치고 나귀나 사람의 맏이를 위해서는  작은 짐승으로 대신 제물로 바침으로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어갈 때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던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해마다 혹은 맏이들이 태어날 때 마다 이것을 행함은 하나님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스스로도 기억하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자녀들에게 영적 유산으로 남겨주어 기억하도록한 것이다. 그들은 기억을 공유함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갔다. 

구약의 유월절이나 초막절 및 기타 많은 절기도 기억하기 위함이며, 주님이 성만찬 명령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풍성한 관계에 있어서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망각의 존재인 우리에게 절기 혹은 의식을 명하심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이 기억되기를 원하시고, 기억은 전수되기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했던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주님을 처음 만난 체험, 복음의 말씀이 살아 움직여 내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와 내 인생의 변화를 주었던 체험들, 내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께서 특별하게 말씀해주시고 인도해주셨던 기도응답의 체험들...  이런 체험들이 기억되지 못하면 우리 삶에 영적 메마름이 찾아온다.

이스라엘이 영적 부흥을 경험할 때마다 가장 우선적으로 절기를 회복시켰던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출애굽 시에 보여주었던 긍휼이 이스라엘의 탄생을 가능케 했듯이, 십자가의 체험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분을 기억하는 자들이다.

2/16/15

그날은 갑자기 온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출12:39)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미리 예고된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차례 선포되었다.  그러나 정작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날, 그들은 황급히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발교되지 못한 반죽"은 그날의 급박함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고하게 거부하고, 번복을 반복하던 바로의 모습에 출애굽이 한없이 지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약속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오랬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한 여인의 몸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갈4:4). 그 약속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졌다.

예수의 다시 오심도 그러하다. 성경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수없이 예고하셨다. 그런데 정작 그 날이 오지 않는 것 같은 시간대에 우리는 살고있고, 어느새 그 약속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출애굽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러했듯이, 그분의 다시 오심도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랬동안 기도하며 기다리는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체됨으로 우리는 실망하고, 잊어버리고, 기도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는 경우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도착할 것이다.

2/12/15

마지막 기회


"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출10:28)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9번째 재앙은 미리 바로에게 주는 경고없이 시작되었다. 10번째도 곧 바로 재앙의 선포로 시작되었다.  바로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 바로가 회개할 수 있는 남아있는 유일한 기회는 9번째 재앙이 임했을 때였다.

그들의 최고신인  태양신 "라(Ra)"도 야훼를 맞설 수 없음을 흑암의 재앙을 통해 분명해졌다. 이제 애굽엔 야훼와 경주할 선수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아홉번째 흑암의 재앙 속에 바로는 모세를 부르게 되고 이때가 그가 더 끔찍한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바로는 여전히 흥정하려 든다. 마지막 흥정은 "가축만은 두고 가라" 였다. 그렇게 해도 모세가 요지부동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 모세를 위협하며 쫒아낸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신다. 그러나 언젠가 마지막 기회가 온다.

그의 흥정은 어리석었다. 이스라엘의 가축들에 욕심내다가 애굽인들의 장자들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리석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광 대신 버러지의 형상을 섬기게 하고, 장자의 직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게 하며 가축을 욕심내다가 장자를 잃은 애가를 부르게 한다.

소탐대실! 바로는 이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애굽의 장자들을 잃었다.

죄는 사람을 고집스럽게 만든다. 그는 이미 충분히 보았다. 이 재앙들은  애굽인들의 신들과 연관성이 깊다. 이로 그들의 신들은 결국 재앙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보았고, 하나님을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음을 바로는 보았다.

그러나 그의 고집은 회개를 거부한다. 모세를 쫒아냄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을 쫒아냈다. 알면서도 거부하는 것이 인간의 고집이며 인간의 어리석음임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음의 구절은 바로의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2:4-5)

2/11/15

기준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출10:3)

메뚜기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메세지에 이번에는 바로의 신하들이  나섰다. 이러다간 애굽이 망하게 생겼으니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것이다.

바로는 모세를 불러 누가 갈 것인지 묻자,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들까지도 가야한다 말한다.

번번히 거절을 경험했던 터라 모세는 바로가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백성의 일부만 간다든지, 바로가 원하는대로 남자들만 간다든지, 사람들만 가고 가축들은 두고 간다든지 할 수도 있었지만 모세는 기준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은 타협없이는 살 수 없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내 것만 주장할 수는 없다.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물러서야만 한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요, 주님이라는 우리의 고백은 주변 사람들에게 반발심을 가져온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서의 결혼만을 인정하는 우리의 입장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몰인정한 태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양보할 수 없다. 

모세의 단호한 태도에 화가난 바로는 그를 쫒아낸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비록 값지불을 치루더라도 제자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적당히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살 수 없는 제자의 믿는 바가 있고, 행할 바가 있다. 바로처럼 세상은 "이 땅에서만...", "너무 멀리는..."  "장정들만..." 하면서 우리의 기준을 낮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기준을 낮추는 순간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신세만 될 뿐이다.

2/10/15

밀과 쌀보리

"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출9:31-32)

이번에는 우박의 재앙이었다. 애굽 역사상 최악의 우박이 내리쳐 들에 있는 동물들은 죽고 식물들은 망가졌다.

바로는 다시 뉘우치고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모세는 기도를 하겠지만, 인로 인해 바로가 진정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의 말대로 우박이 그치자 바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이 기사의 한 가운데 삼과 보리, 밀과 쌀보리 얘기가 나온다.

새싹이 돋았던 삼과 보리는 우박에 맞았지만 아직 밀과 쌀보리는 새싹이 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의 입장에서 애굽 전역의 식량문제에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밀과 쌀보리가 버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인간은 그렇게 조그마한 여지만 있으면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으려 한다. '밀과 쌀보리'로 아직은 버텨보려 한다. 

그런데 결국 바로를 버티게 만들었던 '밀과 쌀보리'가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을 가져왔다.  남아있던 희망이 오히려 재앙의 단초가 되었다. 

우리에게 아직 '밀과 쌀보리'가 남아 있는가? 아직은 하나님께 온전히 앙복하지 않게 만드는 것, 아직은 내가 의지하는 그것들이 우리의 '밀과 쌀보리'다. 아직은 내 마음을 충분히 가난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밀과 쌀보리'다.

차라리 바로에게 '밀과 쌀보리'가 없는 것이 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

2/09/15

가축들까지도?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출9:4)

바로의 불순종의 댓가는 그에게만 머물지 않고, 애굽 사람들, 심지어 애굽인들의 가축에까지 미쳤다.  애굽의 가축들은 죽거나 종기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재앙을 받게 되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다.

순종과 불순종의 댓가는 우리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가 죄와 심판아래 머물게 되었고, 한 분 예수의 순종으로 온 인류의 구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발걸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는 씨앗이 되었고, 바로의 불순종은 애굽인들의 삶에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왜 하나님은 바로의 결단을 촉구하면서 그와의 개별적 대결로 끝내지 않으시고 애굽인들과 심지어 그들의 가축들에게 까지 재앙을 확대하신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시는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인류를 공동체적 존재로 보신다. 

그것이 가족적인 공동체든, 사회적 공동체든, 혹은 교회 공동체든 우리를 개별적 존재가 아닌, 우리를 공동체안의 존재, 누군가와 연계되어 있고, 누군가와 연대성을 가진 존재로 보신다.

그래서 가인처럼  '내가 그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항변하지만, 우리는 이웃을 지키는 자들이며,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이 연결점을 우리가 부정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며, 우리의 선택은 우리와 연결점을 가진 이들에게로 영향이 미친다.

재앙이 애굽인들의 가축들에게도 미쳤다. 죄는 우리가 속한 것들, 우리의 자연과 생태계까지도 신음하게 한다. 반면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가 속한 모든 것이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안식을 명하실 때 이스라엘의 가축들까지도 쉬도록 명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우리를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환경,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신다.  

그리고 우리의 소명은 그 모두를 복되게 하는 것이다.

2/08/15

항복하기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 8:25)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마지 못해 허락하는데, "제사를 드리되 이 땅에서 드리라"고 한다. 후에는 "광야로 가긴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28절)고 한다.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순종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음성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 우리는 바로의 전략을 취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들을 체도 않다가, 이런 저런 하나님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항복은 하게 되는데 "이땅에서" 혹은 "너무 멀리는..." 하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가 바로처럼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때가 많다.

출애굽의 과정이 그렇듯, 우리의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과의 씨름의 과정인지 모르겠다. 내 삶에 무엇인가를 내보낼 것을 결단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우리는 '조금만' '아직은..' 하면서 지연하려고 한다. 때로는 결심을 했다가 슬그머니 철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로와 씨름하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항복이 지연될 수록 댓가는 커진다. 바로는 결국 애굽 땅의 장자들의 죽음을 맛보고서야 항복하게 되는데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게 하나님과 씨름하곤 한다.

바울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하나님을 거스린다 했다. 우리의 옛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바로가 우리의 산증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 삶에 출애굽의 영광을 이루시기까지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싸움을 거신다.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과의 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2/06/15

흉내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출7:22)

모세의 기적들을 어느 정도 애굽의 요술사들도 흉내낼 수 있었다. 그들도 모세처럼 지팡이가 뱀이 되게할 수 있었고, 물을 피로 변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을 세상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복음이 약속하는 치유를 세상의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이 줄 수 있다고 믿고, 또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동체 대신에 세상은 다른 공동체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며, 어느 정도는 그들의 공동체가 더 나아보이기까지 한다.

모세의 기적을 애굽의 요술사들도 행함으로 바로의 마음이 닫혔듯, 오늘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조차 우리의 복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경쟁할 상대는 아무도 없다. 

사탄은 어느 정도 하나님을 흉내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세상은 어느 정도 복음을 흉내낼 수 있으나 이 세상에 복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엔 훌륭한 공동체들이 많지만 교회의 영광을 대신할 수 있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들이 있는 듯 하지만,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요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2/05/15

함께하기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모세는 스스로 언변에 능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출애굽의 기사에서 보는 모세는 결코 언변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모세를 '말과 행사에 능한 사람'이라 칭했다.

광야 40년 동안 사람들을 멀리하고 양들하고만 보낸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바로를 대면해야하는 중압감 때문일 수도 있는데 모세는 스스로를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하나님이 처방은 동역자였다. 그의 형 아론을 동역자로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했다. 동역은 서로의 부족을 채워 온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을 채워 서로를 온전케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였던 모세도 동역자가 필요했듯이, 우리 모두 지체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훈련은 함께하는 훈련이다.  우리는 함께함으로 서로의 부족을 보충받을 수 있고,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케 할 수 있다. 

물론 함께하는 것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후일 아론도 모세를 대적한 적이 있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세를 실망시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같이 갔다.

우리는 함께함의 마찰음 때문에 너무 쉽게 갈라선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묶어 동역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잠언 말씀은 진리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18:1)

2/04/15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출6:2)

출애굽기 6장에는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다.  모세는 백성들의 노역이 더 심해졌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로가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등을 말하자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이니라" 라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상황에 압도되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이니라'를 계속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다.  상황에 압도되어 눌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언약과 연관해서 계시하신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께 강제력을 행사하실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의무감을 가지실 필요가 없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언약을 자청하셨고, 스스로 그들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길 원하셨고, 스스로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셔야만 하는 강제력 밑으로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을 도와주셔야만 하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임을 모세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언약을 맺은 새언약의 백성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의 돌판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히 아무 것도 요구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아버지되심으로 우리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여호와'이시다.

2/03/15

영원과 현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1)

모세의 순종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가져왔다. 벽돌 만드는 일이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바로를 찾아가 면담을 해보니 바로 모세 때문임을 알게되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며 원망한다.

모세가 부르심받은 일은 이들의 미래와 운명이 걸린 위대한 일이었지만, 이들에겐 눈 앞의 현실이 더 중요했다.  우리에겐 영원보단 현실이 더 크게 보이는 듯 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원하지만,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그것도 외면해 버리곤 한다.

예수님은 영생을 약속했지만, 부자 청년은 현재의 것을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아 예수 따르기를 포기했다. 어떤 이는 예수 따르는 길이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이라는 말에 포기했고, 어떤 이는 예수 따르기 전, 먼저 해야할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증세없는 복지는 없듯 댓가를 치루지 않는 제자도는 없다. 사실 현재의 고통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며, 현재보다 영원을 더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 바울은 말했다.이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2/02/15

거절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바로의 첫번째 반응은 거절이었다. 모세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로에게 갔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일이 더 악화되었다.  백성들의 노역이 자기로 인해서 더 강화되는 심리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실제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르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싸인을 "만사형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악화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 

어찌보면 모세는 이번 뿐만 아니라 몇번이고 몇번이고 실패를 거듭한 셈이다. 바로는 번번히 거절했다.  모세는 단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단번에 사역의 성취를 이루는 경우들도 있지만, 거듭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모세가 거듭된 초기의 실패 때문에 다른 일에 기웃거렸다면 역사는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예민해서는 주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기도하고 시작한 일이 바로처럼 거부하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과가 나지 않거나 사람들의 거부를 경함할 때, 혹은 거듭된 실패를 경험하거나 오히려 일이 악화되는 상황이 될 때 그 때도 자기가 받은 말씀을 계속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역의 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흔들리면 상황에 따라, 혹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