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12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역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1 So here's what I want you to do, God helping you: Take your everyday, ordinary life--your sleeping, eating, going-to-work, and walking-around life--and place it before God as an offering. Embracing what God does for you is the best thing you can do for him. 2 Don't become so well-adjusted to your culture that you fit into it without even thinking. Instead, fix your attention on God. You'll be changed from the inside out. Readily recognize what he wants from you, and quickly respond to it. Unlike the culture around you, always dragging you down to its level of immaturity, God brings the best out of you, develops well-formed maturity in you."

증인

신17: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우상숭배하는 것이 목격되면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2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증인의 진술에 의해 누군가를 죽일 때, 제일 먼저 돌을 들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증인이었다. 이것은 증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일이며 책임있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떠도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도 몰아갈 수 있다. 우리는 증인이 된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야 했던 책임감처럼 누군가를 향한 평가와 논평에 돌을 드는 심정으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8/29/12

하나님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우상숭배

신16:21-22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우상숭배는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다. 본문은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제단 곁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곁에 다른 아세라상과 주상(sacred stone)들을 세웠다.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그 자리에서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면서 사역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사람들로 부터 받는 칭찬과 인정이 우상이 될 수 있고, 돈이나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보다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가만히 보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하는 우상숭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지 않고 바로 하나님 바로 곁에서 우상숭배는 일어날 수 있다.

8/27/12

복음이 결혼생활에 영향력이 있는 아홉가지 이유

  1. Because of the gospel, Christians have become new creations (2 Corinthians 5:17). Therefore, in our marriage, our past does not define us, confine us, or determine our future.
  2. Because of the gospel, we are forgiven (Ephesians 1:7). Therefore we can live free of all guilt and condemnation for every sin, and we can trust that God, in his mercy, will be gracious to us.
  3. Because of the gospel we can forgive, just as Christ forgave us (Ephesians 4:32). Nothing done against us compares to our sin against God. Therefore all offenses, hostility, and bitterness between Christians can be completely forgiven and removed.
  4. Because of the gospel, we are accepted by God (Romans 15:7). Therefore we are not dependent on a spouse for who we are or what we need.
  5. Because of the gospel, sin's ruling power over us is broken (Romans 6:6, 14). Therefore we can truly obey all that God calls us to do in our marriage, regardless of any circumstance or situation.
  6. Because of the gospel, we have access to God through Christ (Hebrews 4:14-16). Therefore we can at any time take any need in our marriage to the One who can do all things.
  7. Because of the gospel, we have hope (Romans 5:1-4). Therefore we can endure any marital difficulty, hardship, or suffering, with the assurance that God is working all to our greatest good (Romans 8:28).
  8. Because of the gospel, Christ dwells in us by his Holy Spirit (Galatians 3:13-14). Therefore we are confident that God is always with us and is always at work in our marriage, even when progress is imperceptible (1 Thessalonians 5:23-24).
  9. Because of the gospel, we have power to fight and overcome remaining sin , which continues to dwell and war within us (Romans 7:19-21, 24-25; Galatians 5:16-17). This indwelling enemy represents the essence of what is called the doctrine of sin.

Love That Lasts: When Marriage Meets Grace (Crossway, 2006), 22–23

8/26/12

사랑의 역설

신15:16-17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

신명기에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구체화시켜놓았다. 매 7년이 돌아올 때마다 빚을 탕감해주거나 7년마다 종을 자유케 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계속 종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시고, 귓볼에 표시를 남기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귓볼을 볼 때마다 그들이 '자유의 종'임을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 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과 율법, 사회적 인습과 고정관념, 두려움과 염려, 중독과 죄된 삶에서 자유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삶은 종된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편지때마다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불렀고, 예수는 제자의 삶은 서로를 섬기는 종된 삶이라 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종됨의 기초는 의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갈5:13)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랑의 신비를 보여준다. 사랑은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사랑은 우리를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든다. 사랑은 스스로를 낮추게 만든다. 사랑은 부모들로 하여금 자식들을 향한 수고를 기쁨으로 여기게 만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사랑은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종됨은 자칫 율법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자신의 종됨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된다.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구해야 한다.

8/25/12

인색함은 범죄가 된다.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본문은 인색함은 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는 7년째에는 빚을 탕감해주도록 되어있었다. 그래서 7년째가 가까울 수록 가난한 자들에게 궁핍한 이들의 필요를 외면할 수 있다는 인간본성을 감지한다.

본문에서 몇가지가 관찰된다.
1. 인간의 죄인된 본성은 특수 상황에서 증폭된다. 빚을 탕감해주는 면제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사람들의 죄인된 본성이 발동되어질 수 있다. 인간의 평상시의 평점심은 특수 상황에서는 악마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70년대의 한 실험은 신학생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수업을 마친 후 급하게 어느 지점에 도착해야하는 상황을 주고 중간에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 상황을 연출한 후에 관찰한 결과 거의 대부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 그들이 도착해야하는 지점에 가기 바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수업을 통해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수상황이 주어지자 '강도만난 이'를 외면했다.

2. 인색함은 범죄가 된다. 면제년이 가깝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를 꺼리는 것은 '악한 생각'(9절)이요, '인색한 마음'(아끼는 마음, 개정, 10절)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죄없다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 주변 이웃에 대해서 우리 마음을 주저하게 만들고 인색하게 만드는 상황들은 우리들도 만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마땅히 우리가 도와주어야할 사람들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것도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했어야 하는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신다.

오늘의 말씀은 오늘의 나, 오늘의 교회에 많은 도전을 준다.

8/24/12

우리의 과거를 돌아봐야 할 이유

신15: 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신명기 15장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을 돌봐야 할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 땅에서 "종"이었음과 하나님의 "속량"(구원)을 기억하라 하신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우리가 어떤 죄인이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경험한 자들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의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웃을 향한 발걸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묵상에서 시작된다.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매마르면 이웃사랑도 매마를 수 밖에 없다.

8/22/12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신12: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이 구절은 영어성경 NIV로 보면 "You must not worship the LORD your God in their way"라고 되어 있다. 우상숭배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요, 하나님을 예배하긴 하되 다른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이것은 혼합주의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혼합주의적 요소들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도 혼합주의요, 하나님을 예배하되 걸러지지 않은 대중문화적 요소들을 예배에 끌고 들어오는 것도 혼합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등져서는 안되고 들질 수도 없지만, 아무런 필터없이 우리의 가치관과 교회와 예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되 가나안의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경계하셨던 하나님의 경고를 우리들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8/21/12

누림

신12: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드림"과 "누림"이 모두 필요하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들을 언급하신다. 17절에서는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분명 드림과 내려놓음과 자기부인과 헌신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말씀하신다. 본문 말씀은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18절에서는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수고한 것들로 우리가 즐거워하며 누릴 수 있다.

다만 우리의 "누림"에는 지켜야할 도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이고 둘째는 "레위인과 함께"이다.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누리되 우리의 즐거움이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8/18/12

그 땅이 축복의 땅인 이유

신11:11-12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 애굽에서는 그들이 "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10절) 천혜의 축복이 있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땅은 경작에 적당하지 않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땅이요, 비를 흡수하는 모래땅이다.

자연적인 입장에서 이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땅이 축복의 땅인 이유는 하나님이 돌보아주시는 땅이기 때문이다.

축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였다. 이스라엘이 가게되는 땅은 척박한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돌보아주시는 땅이기에 축복의 땅인 것이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돌보아주시면 거기가 축복의 땅인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환경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8/16/12

찬양은 축복의 행위입니다.

신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찬양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행위다. 축복은 높은 이가 낮은 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본문의 경우는 레위 사람들이 세워진 목적이 하나님을 축복하는 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레위 사람들의 찬양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레위 사람들은 성전의 각종 봉사와 더불어 찬양대 사역을 맡아 구약의 성전예배를 도왔다.

축복은 높여드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축복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다른 이웃들을 축복할 수 있는 한가지는 그들을 존중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높여주는 것이다 레위사람들이 축복을 위해 부르심받았듯이 우리의 존재도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이웃을 높여주는 축복의 삶으로 초대된 것이다.

8/15/12

두번째 기회

신10: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기도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 있다. 9장에는 저 유명한 시내산 우상숭배사건이 일어난다. 모세가 십계를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밑에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에 격노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겠다 하셨다. 그러나 이때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이 9장 마지막까지의 사건이다.

그리고 10장에 들어서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씀하신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판을 준비하라 하신다. 하나님은 두번째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모세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연상된다. 우리의 모습은 시내산 밑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우리의 모습은 자주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두번째 기회를 살고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우리의 모습은 벌써 하나님의 진노 속에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주님 때문에 두번째 기회가 주어져 여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8/14/12

자기 의를 내려놓으십시오

신9:4-6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얻은 구원과 축복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동안의 그들의 행적은 끊임없는 반역과 불순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은혜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을 미리 경고하신 것은 인간에게는 자기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깊은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조그마한 성취가 있어도 그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속성이 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하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의 강력한 부족들을 물리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교회가 좀 빨리 성장하고, 선교사역에 열매가 있고, 자신의 일의 결과가 있으면 곧 바로 이런 함정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성취를 널리 알고자 자신들의 노하우를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 그 땅의 진정한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그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의 악행 때문에 새로운 백성들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의가 없지만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들을 새 땅의 주인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실 때문이었다. 여기에 인간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근거는 단 1%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불순종하자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의가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때문이다.

8/11/12

아낙 자손에게 보냄받다.

신9:2-3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지만, 동시에 아낙자손이 기다리는 땅이라 했다. 아마도 아낙 자손은 그 근방에서도 소문난 민족이었던 것 같다. 골리앗이 아낙자손의 후예였듯이, 아낙 자손은 일종의 거인족이었고 상대할 수 없는 민족으로 알려졌던 것 같다.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이 말은 당시에 퍼져나갔던 말이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낙자손들을 만나게 하신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질 것이 뻔한 싸움터로 우리를 이끌어가신다. 그 전장터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나니.."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자리에서도 우리가 도무지 감당못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그 때마다 우리는 샤역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앞에서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무릎꿇게 된다.

8/10/12

기적의 의미

신8:3 "....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길에 먹을 것이 없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주신 기적의 음식이었다. 만나 사건 뿐 아니라 성경에는 무수한 기적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성경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그러나 기적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예수님이 인용하신 그 유명한 말씀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우쳐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요, 우리 인생들이 필요한 모든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떡을 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8/09/12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

신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의 백성"이다. 영어성경에서는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라고 되어 있다. 때때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을 의심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나를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주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이렇게 따사롭기만 한다면 우리가 인생 중에 두려워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8/08/12

번영신학과 복음

신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인기있는 설교자들 중 다수는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분들이다. 번영신학에서는 예수 잘 믿으면 우리 삶에 번영과 축복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복음에는 고난과 값지불이 따른다는 제자도의 가르침을 이들이 소홀이 여기고 있다는 점, 삶의 고난에 있거나 질병이 치유되지 못함을 무조건 우리의 믿음의 부족 탓으로 돌리는 거짓된 죄책감을 줄 수 있다는 점, 영적인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만 몰두하게 한다는 점, 개인의 축복을 넘어서 사회적인 기여를 소홀하게 만든다는 점 등을 들어 번영신학을 거부하며, 그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약속하는 번영(축복)을 모두 포기해야하는가? 오늘의 본문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영어성경에서는 "so that we might always prosper and be kept alive, as is the case today. "라고 되어있다. 성경은 분명 우리의 번영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문제와 직결된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의 적은자"들이라 책망한 것은 제자들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현실적인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혹 우리의 믿음이 지나치게 "영성화"되어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넘어선 영적인 영역에서만 우리의 믿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영역에서는 제외된 그런 하나님은 아닐까? 우리의 "복음"이 우리 삶의 실제적인 영역을 제거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이다.

8/07/12

우리가 심지 않은 것들

신6:10-1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심지 아니한 것들이다. 우리의 구원, 우리가 심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 우리가 얻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게 되는 것들, 우리가 심은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들이 그러했다.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성들과 그들이 채우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과, 그들이 파지아니한 우물과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주셨다. 물론 그들이 그 땅을 얻게 위해 전투를 해야했고, 치열한 싸움을 해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얻은 것들은 그들이 심지 않은 것들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위로부터 얻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한다.

8/05/12

Be Careful!

신6:3 Hear, Israel, and be careful to obey.......

세상엔 우리가 주의할 것이 많다.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삶의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그 자리를 떠날 때 그들에게 계획된 모든 풍성한 기회들이 사라졌다. 하나님이 여전히 은혜와 긍휼을 베풀긴 하셨지만, 그들은 실락원의 고통과 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우리의 삶을 진정 위협하는 것은 외부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관심과 집중과 주의가 필요하다. 오랜 장거리 여행이 졸음운전을 유발하듯이 긴 인생의 여정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피로감으로 하나님과 멀어져갈 수 있다.

Be Careful!

8/04/12

탐심과 이웃

신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심은 인간의 죄된 본성의 시작이다. 십계명의 다른 죄들도 탐심과 연관이 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께만 속한 것을 갖고자 하는 탐심의 유혹이었다. 우상숭배도 더 나은 신을 갖고자 하는 일종의 탐심이다. 간음과 도둑질도 탐심이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갖고자 하는 탐심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욕구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죄된 것이 아니며,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 하셨다. 그러나 남에게 속한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은 탐심이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에는 "이웃"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된 탐심의 치유책은 "이웃" 사랑이다. 이웃의 것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축복할 때 우리의 탐심은 제어될 수 있다. 사탄은 이웃과이 사이에 벽을 쌓게만든다. 그리고 벽안에 갖혀 이웃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오셨다.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께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셨다. "네가 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

8/03/12

시간의 함정

신4: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시간은 우리에게 시험일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거주한 후, 시간이 많이 지나가게 되면 스스로 부패해져 우상을 섬기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고인 물이 썩듯이 사람은 시간이 오래 지나가면 스스로 부패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을 둘러봐도 시간이 많이 흘러도 처음의 순전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인생길의 고난과 비난과 경제적 곤란과 사역의 성취와 좌절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빛깔이 변하고 청청한 색들을 잃어버리며 사는 것 같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우상숭배를 경고한다. 겸허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던 사역의 기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부패해져 사역의 성취를 우상화하려는 본성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는 바울, 우리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8/02/12

기억하라

신4:9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사람은 망각의 존재다. 지난 일들을 쉽게 잊는다. 물론 잊어버려야할 것들은 과감히 잊어야 한다. 바울도 '내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다. 반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들은 결코 잊지 말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명한다. 영어성경에서는 '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희미해지지 않도록 하라'고 되어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서 희미해져가곤 한다. 이것들이 희미해져버리면 영적 어두운 밤이 우리를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우리에게 명하시면서 '이것들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절기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셨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삶의 여정에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반복적으로 기억하도록 하셨다. 인간들에게는 이런 기억의 장치들이 필요하다. 정기적으로 이런 시간들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우리의 현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것임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비전은 분별력이 필요하다.

신2:5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땅은 참으로 넓었다. 가나안 뿐 아니라 레바논과 유프라테스 접경지역까지 였으니 매우 넓은 영역이었다. 그러나 에서의 후예인 에돔 자손의 거주지는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는 과거 에서에게 주셨던 약속때문이었다.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과 주시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때로는 비전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 포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전은 분별력을 필요로 하며, 분별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생겨난다.

8/01/12

짐을 짊어지는 자

신1:37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모세는 선한 지도자였지만, 백성들의 잘못으로 모세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물론 모세에게도 결정적인 실수가 있긴 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이었다.

이것은 지도자됨의 엄중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바울은 지도자는 사람들의 문제를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 처럼" 하는 사람이라 했다. 우리는 지도자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셨다.

가끔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와 교인들간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했고 목격하기도 했다. 이럴 때 상대방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도 못하고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결국 지도자들은 그들의 약점까지 자신의 짐으로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