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13

편리성을 넘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우리는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편리성 추구에서 많은 발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편리성 제공을 섬김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도 그 편리함을 주기 위해 많은 서비스를 한다. 편안한 주차, 설교를 돕는 영상과 미디어 사용, 교회 사역을 세세히 안내해주는 각종 안내문들 그리고 스마트 서비스들....

아무리 그래도 복음은 쉬울 수만은 없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은 편리함을 준다해도 복음은 우리를 어려운 대목으로 인도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처럼
어려운 복음의 난제가 있다. 어떤 청년이 복음과 함께 반드시 직면해야했던 문제가 있었던 것같이, 우리들이 부딛혀야할 영역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재물일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복음은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양보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복음은 어렵다. 쉽지 않다. 복음에는 낙타의 바늘귀처럼 어려운 숙제를 준다. 복음의 문은 좁다 하셨다. 복음의 진면목을 대하면 제자들처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라고 질문하게 된다. 복음은 비수처럼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거짓 고백을 고발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영혼의 고통을 안겨다 준다. 깨어짐 없이는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길이 쉽지 않다 하신다.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꾀를 낸다. 초등학생이 어려운 산수문제를 끙끙거리며 풀려하지 않고 계산기의 힘을 빌어 답을 내듯이 사람들은 쉬운 답을 찾고자 하고 교회는 주려한다. 우리는 쉬운 답에 익숙해져서 어려운 문제를 내는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러나 계산기만을 의지해서는 성장이 없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복음이 주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내야 한다.

그 숙제가 무엇일까? 우리의 영혼은 안다.

3/26/13

하나 그리고 둘

교회는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18장의 예수님의 교훈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유난히 소수의 숫자가 강조된다.

1. 하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6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2절)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24절)

2. 두 사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

3. 두세사람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6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교회성공의 척도가 숫자가 될 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던 예수님의 정신이 퇴색해 버리기가 쉽다.
교회가 지켜야할 정신은 숫자가 아니라 영혼이다.

3/24/13

평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나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가진 것으로 사람이 평가되면 나의 관심이 물질에 있음을 보여주고, 유명세와 사회적 지위로 사람이 보이면 그것이 나의 관심사이다. 리더십의 관점에서만 사람이 보이면 리더의 자리가 나의 관심사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사람이 보이면 나는 아직 충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젖어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육신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NIV는 육신을 세상적 관점이라 번역했고, MSG는 그들이 무엇을 가졌고 어떻게 보이느냐로 평가하는 것이라 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는 문맥에서 이 말을 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가지 변화는 사람들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이렇게 잘못평가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에게 십자가가 가장 소중한 가치요 우선적 관심이라면 십자가의 관점에서 사람이 보여야 한다. 바울은 그렇게 보니 십자가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이 새창조물로 보인다고 고백한다.

오늘은 외향적 세상이다. 모든 것을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대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신으로 평가받는 세대다.

그런 세상에서 다른 관점으로 사람을 보아주는 샘터가 되어야할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다. 다른 곳은 몰라도 교회는 사람들이 평가받을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되는 길은 다시 한번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선포되어야 한다.

3/20/13

자기부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16:24)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만류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막아서고자 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다.

메세지역은 "나를 따르려면 나로 인도하게 하라. 운전석에 앉아있는 것은 나지 너희가 아니다" 라 번역했다.

베드로의 만류는 그가 운전석에 앉는 행위였다. 이것은 따름의 도가 아니다. 따르는 자는 종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종은 자신이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분이 모든 결정권을 쥐게 한다. 인도자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을 부인해야 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신 예수 십자가의 길을 그가 섣부른 판단으로 막아서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따르려면 너를 부인하라" 하신다.

자기 부인이란 모든 주도권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결정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도록 해야한다. 때로 예수 인도하심이 우리의 눈에 기이하게 보여도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나갔던 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황당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황당함 뒤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어있다는 것은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뜨게되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3/19/13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의 사역 마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 여행이 끝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제자들은 3년의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보냈다.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교회생활이 오랜됨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을 보면 그 오래됨으로도 제대로된 신앙고백이 없을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중요하다.

베드로는 명확하게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한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단지 입술의 고백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신앙고백에 더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보여 주신다.

첫째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지 않으시면 이 고백을 드릴 수 없다. 베드로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 하셨다. 다시말해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서 일하셨다는 증거다.

둘째로 신앙고백은 교회와 연결된다. 주님은 이 신앙고백을 듣자마자 교회얘기를 하셨다.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신 교회는 이 고백위에 세워지는 교회이다. 이 고백이 반석이 된다. 만일 교회가 흔들린다면 이 고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본래의 혼돈에 빠져있다면 이 고백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교회의 승리와 영광은 이 고백에 기초한다.

셋째, 신앙고백은 고난의 입문이다.이 고백 직후에 예수는 이제 고난받으러 가신다 하신다. 예루살렘에 가셔서 고난받고 십자가 지실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고백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겠다는 고백도 된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것을 명확히 하셨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에 헌신한다는 고백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고백이 된다.

3/18/13

누룩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5)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는 모든 증거가 소용이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바로 직전에 예수님의 또 다른 떡의 기적을 목격하고도 또 다른 기적들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기적만 요구할 뿐 기적이 보여주는 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몰랐다.

예수님은 날씨 얘기를 하셨다. 하늘의 먹구름이 곧 뒤에 올 비의 실체를 보여주듯이,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날씨 얘기에서 누룩얘기로 나아가신다. 그들에겐 기적이나 증거가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마음 속의 누룩이 문제였다. 그들의 눈을 왜곡시키는 누룩이 그들 속에 있어서 아무리 확실한 것을 보여주어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착찹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기적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기를 꺼리는 그 누룩이 있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마음의 누룩이다. 우리 마음에 누룩이 퍼져있으면 분별력을 잃어버린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나름대로의 누룩이 있었고, 우리들에게도 누룩이 있다.

그 누룩은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일 수 있고, 우리가 깨뜨리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의 우상일 수 있다. 진리에 다가갈 수록 우리의 어둠과 죄의 실체를 폭로하는데 이를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우리의 누룩이 될 수 있다.

영적 시야는 청결한 마음에서 온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5:8)

3/16/13

깨달음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만 큼 떡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5:33)

광야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병이어의 일이 일어났을 때 처럼 무리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광야에서 3일을 지냈고 예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 기셨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의 반응도 똑같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음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병이어를 체험하고도 처음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 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 을 통해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제자들은 여 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회를 주시지 만 우리는 더디 성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적인 기적을 행하기도 하신다. 이번의 기적은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을 것 이다. 한번의 체험으로 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 면 주님은 그 일을 반복해 주시는 것 같다.

기적 체험도 그러하지만 우리에게 반갑지 않은 일들 도 그러하다. 그 일들을 통해 충분히 깨우치지 않으 면 그 일은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너희에 게 깨달음이 없느냐?" 반문하시곤 하였다. 제자들처 럼 우리도 더디 배우고 더디 성장하는 것 같다.

이 아침 우리에게 이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 저 희에게 깨우쳐 주소서."

3/15/13

테스트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5)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가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시험받았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의 믿음도 시험받았다.

예수께 나아온 이 여인에게 관심없는 듯이 말씀하셨다.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했다.

우리의 믿음도 종종 시험당한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지 않을 때 시험당한다.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시험당한다.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시험당한다. 인생은 주님의 시험장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눈여겨보신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님께 간구하는 여인을 높여주셨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원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영혼을 구원할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

3/13/13

전통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기준들이 있다. 어떤이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또 다른 이들은 대중적인 여론을 판단의 중요한 참고점으로 삼는다. 어떤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성과 여론, 경험과 전통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잣대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아것들은 절대적 권위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들은 이성을 절대시하여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고 경험주의자들은 자신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전통은 항상 좋은 이유로 출발하여 정착된 사회적 습관이다. 그러나 전통도 자신을 절대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어떤 이들은 조상들이 전해준 율법의 해석들을 절대화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였다. 이들은 이 전통으로 예수님마저도 판단하려 하였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릴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우리 인생에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있게 될 것이다.

말씀만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루터가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외쳤던 것도 교황은 절대적 권위가 될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교회도 시간이 지나가면 전통이 많이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속 개혁되지 않으면 전통으로 예수님을 심판하고자 했던 어떤 유대인들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이 가사처럼 우라 인생에 우리의 전통이 주인노릇하고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엔 그런 것들이 없는가?

3/12/13

바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마14:30)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에 빠져들어갔다. "바람을 보고"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과 같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바람들을 만나게 된다.
경제적인 두려움, 노후에 대한 불안,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교회를 향한 염려....
바다는 항상 바람을 만나게 되는 곳이다.
인생의 바다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바람들을 만나게 되고
두려움에 다시 바다에 빠져들게 한다.

나에게 믿음의 모험을 중단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무엇이 있는가?

3/09/13

갭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14:16-17)

하나님의 소명과 우리의 능력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숫자만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우리의 능력은 오병이어 뿐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내 능력과 한계를 아시기 때문에 내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보면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요구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이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길이 보이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이 갭을 느끼며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그래서 종종 주님께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못해요"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갭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주님께서 우리의 오병이어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오병이어 위에 축사하셨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듯이 우리에게도 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게 된다.

이 갭을 메꿀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다.

3/07/13

배척

"예수를 배척한지라"(마13:57)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배척하려 한다. 고향사람들에게 목수 예수는 익숙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익숙하지 않았고 그를 배척했다.

우리들도 예수를 배척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신앙의 여정에 따라 익숙한 예수의 모습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다른 여정을 걸어온 이들이 경험한 예수의 모습은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목수 예수" 외에 다른 예수상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목수 예수"로 예수 경험을 끝내고 말았다.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더 광대한 예수 경험의 지평이 있었지만 안타깝게 그들은 그 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더 큰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58절)

오늘의 교회 안에 "목수 예수"만 경험하고 메시아 예수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이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님의 주변인물들, 가족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구세주되신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어찌보면 신앙의 여정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다.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그분에게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더 큰 예수 경험을 할 수 있다.

3/06/13

가치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인 기쁨을 안다. 받는 것 뿐 아니라 주는 데서 오는 기쁨을 안다. 주를 위해 희생하고 고난 받는 데서 오는 기쁨을 안다. 이전에 자랑하고 추구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기쁨을 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다 팔아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꺼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자랑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거운 짐이다. 주를 위한 봉사도 버겁고, 주를 위해 받게 되는 고난은 신앙에 회의를 갖게 한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세상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가 없다.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이 땅의 고난은 더욱 커져 보인다. 고난 속에 기뻐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가치발견에 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되는 사람들은 기뻐할 수 있다. 복음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기뻐할 수 있다. 물질에 가치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를 둔 사람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우리의 삶에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가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3/05/13

겨자씨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13:31)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은 크고 화려하고 높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압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다가 십자가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죽는 예수에게 실망했다. 고지에 오르는 것이 성공이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이 기독교 리더의 특징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기가 아니라 생명이다. 크기가 예수님을 대변하지 못한다. 아주 작은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누군가에 주는 작은 미소, 따뜻한 말 한 마디, 전화 한통, 위로의 문자 메시지 하나....이것들은 작은 것들이지만 우리의 진심과 사랑이 담겨있을 때 생명의 겨자씨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창한 프로젝트와 이벤트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처럼 작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행하는 작은 몸짓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3/04/13

공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마13:30)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있는 나라다. 이상하게도 주인은 가라지를 당장 뽑아내지 않으신다. 추수 때까지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고 순도 100%의 복음주의를 소망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는 가라지를 피해가지 못한다. 늘 교회의 순수성을 해치는 사람들과 경향들이 있어왔고, 우리의 복음에는 인본주의적 색깔들이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공존의 나라다.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경험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늘 요구된다. 어느새 우리의 의식 속에도 가라지가 끼어들오고, 우리의 가르침 속에도 복음과 상관없는 가르침들이 끼어들어 온다. 이땅에서의 가라지를 온전히 제할 수 없다면 적어도 가라지를 가라지로 볼 수 있는 눈은 필요하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공존의 나라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땅에서 교회의 왜곡을 피할 수 없고 복음의 일탈을 피해갈 수 없다. 계속 가라지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한국 교회는..." 운운하면서 교회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는 가라지들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추수 때까지는 공존해야 하기에 이상황들을 인내하며 맡겨진 소임을 다해야 한다. 추수 때에 하나님의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할 날을 기대하며, 우리들의 곡식을 지켜야 하고, 뿌려야할 씨앗들을 뿌려야 한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공존의 나라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그 공동체가 순도 100%의 곡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듯이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공동체도 가라지는 섞여있게 되고, 그 가라지가 그 곡식밭을 일순간에 망쳐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는 자랑할 수가 없다. 겸손하게 곡식고 가라지의 공존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해야 한다.

3/03/13

기브온과 존 내쉬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9:27)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는 언제부턴가 찾아온 정신분열증으로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환상은 끝까지 그의 인생을 따라다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다. 나중에 노벨상까지 받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만, 환상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다. 어느 시점부터 내쉬는 환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게 된다.
 
기브온 족속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속이고 이들과 조약을 맺는다. 가나안 거민을 모두 제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이 조약으로 인해 그들을 제하지 못하고 그들을 장작패고 물긷는 일을 시키는 신분으로 이들을 남겨두게 된다.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떨쳐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된다.
 
기브온은 존 내쉬의 환상과 같이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들에게도 기브온은 존재한다. 우리가 과거에 받었던 상처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인생 중에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동거해야 하듯이 우리들은 그 불편한 현실과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화해처럼, 우리들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상처와 아픈 기억들과 화해해야 한다. 어느 순간 기억이 아픔으로 불쑥 불쑥 찾아오지만 오랜 친구처럼 그것들을 맞이해야 한다. 존 내쉬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인생의 질고를 씻어주셨다. 그분은 피묻은 그의 손으로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다. 그러나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그 손은 상처받은 손이며, 상처의 흔적이 있는 손이다. 십자가에서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상처의 흔적은 남아있을 수 있다. 우리도 상처받은 우리 모습으로 예수님을 붙들게 되는 것이다.

3/02/13

구도자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3)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친절한 교사가 아니라 생각된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커뮤니케이터이시기에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아니하셨다.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만이 그 뜻을 알게될 것이라 하셨다. 마치 자동문과 같다. 멀리있는 사람들에게 그 문은 언제나 닫혀있다. 오직 가까이 서야만 그 문이 열린다. 

예수님께 기꺼이 나아오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 말씀은 열리게 될 것이지만, 예수께 가까이 나오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오직 구도의 마음으로 가까이 나오는 이들에게만이 말씀의 향연이 열리게 될 것이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3/01/13

1/4 법칙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13:3-4)
 
모든 씨앗이 좋은 밭에만 뿌려질 수 없다. 길가에도, 가시밭에도, 돌밭에도 뿌려진다. 우리가 인생 중에 뿌리는 씨앗도 좋은 밭에만 뿌려질 수 없다. 모든 시도가 다 성공할 수 없고, 모든 노력이 다 결실을 맺을 수 없고, 우리의 청중이 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청중도 모두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한다면 1/4만 결실을 맺었다. 나머지 3/4의 길가, 돌밭, 가시밭에서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모든 것에 다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더러는” 좋은 밭에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성실한 파종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