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13

의외의 선택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하나님의 역사에는 항상 의외성이 있다. 구주 탄생의 첫번째 목격자로 들판의 목동들이 선택된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서기관이나 제사장들 혹은 전문적 종교인들이 아닌 목자들이 선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어머니로 나사렛 지방의 평범한 틴에이저가 선택된 것도, 예수의 출생지가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가 아닌 베들레헴같은 작은 동네인 것도, 태어난 장소가 화려한 집이 아닌 초라한 마굿간인 것도 모두 의외의 일들이었다.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인 것 같다.

우리 시대는 사이즈가 능력이며, 하나님의 역사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대교회의 목자가 능력의 종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큰 옷 속에 볼품없는 인격과 영성도 많고 초라한 옷을 입고도 아름답게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다.

이름없는 목자들, 작은 베들레헴, 초라한 마굿간, 평범한 목수 예수...이 의외의 연결점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코드인지 모른다. 

엘리야는 폭풍과 지진이 아닌 작고 조용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는 화려한 애굽의 궁전시절이 아닌 미디안 광야의 소박한 목동시절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다. 샤무엘이 기름부은 왕은 그럴 듯해 보이는 다른 형들이 아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막내 다윗이었다. 하나님은 의외성을 즐기시는 분이시다.

의외성은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12/19/13

욕심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는 평생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명백히 죄악된 욕심이 있는가 하면  좋은 욕심도 있다.
디모데후서3:1은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것, 즉 지도자됨을 꿈꾸는 것은 좋은 욕심이라고 칭찬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좋은 욕심과 나쁜 욕심의 경계선이 늘 애매하다.
거룩한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했던 것이 사실은 추악한 이기적 욕심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욕심 없이 산다는 것은 불교적 영성일지는 몰라도 기독교적 영성은 아닌 것 같다.
무욕도 많은 경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꿈꾸지 않는 게으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테스트해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몇가지 기준선을 제공해준다.

1.내가 이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 때문인가?(13-15절)

2.이 일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가?(16-18절)

3. 이 일의 열매는 무엇인가?(19-23절)  

12/05/13

변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세월에 따라 변질되는 사람이 있다. 변질이란 끝까지 지켜야할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에 있어서 변질이 일어났다. 복음에 율법을 더했다. 

기독교 역사에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복음에 더해왔다. 복음에 교회의식을 더했고, 성직주의를 더했고, 교회전통을 더했고 기타 많은 것들을 더해왔다. 

우리 시대에는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한다. 복음에 성공주의를 더하기도 하고, 심리적  만족을 더하기도 하고,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더하기도 한다.  

복음은 사실 단순하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복음이다. 

변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자신은 복음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실상은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들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한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살펴보아야한다. 나는 혹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으면서....

12/02/13

거리두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2:12)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면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베드로가 그랬다. 언젠가 베드로가 최초의 비유대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싫어할만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함께 식사하던 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그리하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리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내가 누구를 가깝게 하는 것이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던 이와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우리들의 생존전략인지 모른다. 

유력한 자들에게 라인업을 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인지 모른다. 힘있는 자들에게 모이고, 불리한 상황이 되면 가까운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거나 정적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얼굴인지 모른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의 양심의 확신과 위배되는 경우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사람이다. 사도행전 9장의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확신했고,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지지하며 발언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이 되자 자신의 주장과 반대된 행동을 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확신을 위반했다. 바울은 이것은 위선이라 고발한다. 

말은 이방인 구원을 말하면서 행동은 정반대된 행동을 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과 거리를 두었다.

불리한 상황이 되어도 관계를 지키는 것이 믿는 자의 도리다. 세상은 수많은 파편이 되어 이리 저리 갈라져있다. 이쪽사람과 가까우면 저쪽 사람이 싫어하고 저쪽과 가까우면 이쪽 사람이 싫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자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라진 틈을 메워야했던 것이 1세기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할 몫이었고, 오늘은 또 다른 갈라진 틈을 이어주는 교량이 되어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