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10

이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호세아 14:5-9의 말씀에서 이슬과 같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스라엘의 땅은 척박한 땅이다. 비는 고작 일년에 이른비와 늦은 비 시즌의 두번에 그칠 때가 많다. 시냇가에 붙어있지 않은 나무는 그냥 생존하기가 쉽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침 이슬 때문이었다. 잠시 있다 사라지지만, 이슬은 생명수였던 것이다. 가냘퍼 보이는 이슬로 이들을 레바논의 백향목, 감람나무, 종려나무와 같이 무성하고 열매 가득하게 만드시겠다 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땅이었다. 이들의 절기는 영적인 의미와 함께 보리추수기의 유월절, 밀추수기의 오순절, 모든 여름실과들의 추수를 마치고 다음 농사를 위한 이른비를 간구하는 초막절은 이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 척박한 땅에 이슬이 생명수가 되었듯이, 우리인생의 생명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생의 젖과 꿀이 흐르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이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제 다가오는 2011년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해가 되기를...

12/30/10

입술로 드리는 제사

호세아 14:1-4에서 입술의 열매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호세아는 수송아지 대신 입술의 열매를 제물로 드리자고 한다. 입술의 열매는 무엇인가?

히13:15에서는 찬양을 입술의 열매라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의미한다. 주께 돌아와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것이 입술의 열매이다. 본문에서는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을 결단하는 기도가 나온다.

기독교인들이 말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 때문에 우리는 언어의 중요성을 놓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언어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최근 미르바 던은 "언어의 영성"이란 책을 내놓아 그리스도인의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성은 언어를 통한다. 잠언은 상황에 맞는 말은 아름다운 은쟁반에 놓인 금사과라 했다. 바울은 은혜스럽고 덕스러운 말을 하라고 교훈한다. 야고보는 혀에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 했다. 본문은 입술의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 했다. 오늘도 찬양과 감사, 회개와 결단, 사랑과 은혜의 말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루가 되기를....

12/29/10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이시다

히13:10-16에서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오늘의 본문에서 호세아는 왕들을 구한 과거의 죄를 다시 논한다. 하나님은 왕들을 구한 그들에게 "분노" 중에 허락했다고 하셨다. 왕권 제도가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것이었는가? 다윗 왕가를 영원히 세우시겠다는 다윗언약이나, 메시아가 왕으로 오신다는 성경의 메세지들은 하나님이 왕권제도자체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사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당하자, 백성들은 자신의 문제가 다른 나라처럼 절대군주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왕을 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였지 나라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이들에게는 새로운 시스템이었던 왕권 시스템을 받아들이면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전망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기는 커녕 왕권시스템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이들의 오만과 무지에 분노하셨던 것이었다.

목회자로서 교회가 난관에 봉착하면 자꾸 새로운 시스템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고 셀교회니 제자훈련이니 관상목회니 치유목회, 혹은 성령의 예언사역 등 교회에서 안해본 새로운 시스템을 들여오면 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 왕권시스템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다. 사실 교회에 어떤 시스템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다. 하나님 외에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왕권시대에도 공화정 시대에도, 더 먼저 아브라함의 부족시대에도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어떤 시스템도 하나님의 시스템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독이될 수 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묻는다.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10절). 사람이나 시스템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다. 예수 외에 어떤 것도 '길과 진리와 생명'일 수가 없다. 이들의 살길은 오직 회개하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 길이었다.

12/28/10

진노하시는 하나님

호세아13:1-9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대면시킨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현대설교 중에서 잃어버린  성경적 설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 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시발점은 요나단 에드워드의  '하나님의 진노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였다. 현대의 치유 위주의 설교는 분명 균형을 잃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표범처럼, 새끼를 탈취당한 곰처럼 맹렬한 분노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쏟을 것을 오늘의 하나님의 말씀은 전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한다. 하나님이 맹렬히 분노하신 한가지는 우상숭배였다. 우리는 우리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어떤 이에게는 돈이 우상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자녀가, 어떤 이에게는 사역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겼다. 성경은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다'(1절)고 말한다.  

우리는 교만의 죄를 회개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에 분노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돌보신(4-5절) 은혜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이들을 배부르게 하셨다. 그러나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다"(6절)고 한다. 배부르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교만에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우리들은 돈 때문에 배부를 수 있고, 교인 수 때문에 , 대중적인 인기 때문에, 그동안 쌓았던 사회적 경험 때문에 배부를 수 있고, 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다.  성경은 이것을 교만이라 한다. 만일 우리들에게 이 교만의 죄가 있다면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회개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표범처럼, 곰처럼 우리를 찢으실 수 있는(8절)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27/10

과거도 종종 생각합시다.

호세아 12:7-14에서 물질로 교만해진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경제적 번영기를 구가하던 당시 사람들은 죄를 고발하는 선지자들의 메세지에 코웃음을 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질 수 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 때문에, 교인수가 많은 목회자는 교인수 때문에, 대중의 인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 인기 때문에 마음이 쉽게 교만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겸손케 하기 위해 이들의 과거를 상기시킨다. 이들은 광야의 떠돌이였고(9절), 아람의 유랑자요 빌붙어 살던 이였으며(12절), 애굽의 노예살이하던 자들(13절)임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물질적 번영 때문에 교만해진 그들에게 과거로 돌이키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만일 하나님이 오늘날 구약과 같은 선지자를 보내서 한국을 향해 말씀하신다면 어떤 메세지를 전하실까? 한가지는 우리가 경제적인 부강을 경험하면서 한국 땅에 들어오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 교만은 반드시 문제삼으실 것 같다. 처음 목회하던 시절,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과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들은 이들의 처지는 끔찍했다. 이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했던 것이 인간적인 모멸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의 근본을 기억하자. 복음이 들어오기전 한국 땅을 생각하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고, 주님 만나기 전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근본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를 겸손케 한다.

12/25/10

평화의 왕

이사야 9:6은 예수님을 '평강의 왕'으로 선포한다. 평화를 이 땅에 가져오시는 왕이라는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말씀하신 분이기도 하신다. 예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우리의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죄책감의 검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록 죄인됨을 깨닫게 된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우리가 이땅에서 안전을 느끼던 허상들과 우리의 자랑들을 깨뜨려버리시는 진리의 검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자랑이 배설물처럼 여겨지고, 내 추구하던 것이 우상임이 발견되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서 평화를 찾아나서는 다리들을 끊어내시는 냉혹한 검을 만나게 된다.

왜 평화의 왕이신 예수는 검을 들고 오시는가? 그것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우리의 초가집을 무너뜨리시고 그곳에 더 멋있는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우리의 초라한 초가집에서 평화를 누리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누더기 속에 평화를 던져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옷을 주시고 새집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누더기를 벗어버려야 하고, 우리의 초가집이 무너져야 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현장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하나님 만을 붙잡는 곳에서 진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천사들은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아닌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임할 평화를 노래한다.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그들에게 주의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이 성탄절에 평화의 왕을 만나기 위해서 겸손하게 나아가자. 은혜만을 사모하며 나가자.

12/24/10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마1:12-25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취됨을 보여주신다. 예수 오심에 대한 선지자들의 메세지는(22절) 오랜 기간동안 전혀 가능성 없어 보였지만, 때가 되었을 때에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실현된다는 이 사실이 성탄절에 확신하게 된다.

12/23/10

소란스러운 믿음

눅18:35-43에서 소란스러운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한 맹인이 예수가 지나간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지른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인들에 이것은 소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제지하고 꾸짖자 맹인은 더욱 소리질러 소란을 일으킨다. 맹인의 소란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치유하신다. 그리고 맹인의 소란을 믿음으로 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우리의 믿음은 때로 사람들에게 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 믿음, 즉 예수만이 참 구원자라는 우리의 믿음은 사회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킨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하였는데,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는 치유자일 뿐 아니라 약속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예수를 메시아로 보는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맹인을 제지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어떤 메세지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일으킨다. 맹인을 꾸짖듯이 기독교를 비난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에 굴할 수도 있고, 본문의 맹인처럼 '더욱 크게 소리 질러'(39절) 우리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다. 아파트에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성대를 거세시키듯이, 이 사회는 우리가 소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진짜 메세지는 거세당한채, 이 사회에서 수용하기 좋은 메세지들만 우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메세지는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고, 바울의 메세지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사도행전 16장)라는 소리를 듣게 하였지만 우리들은 이런 소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복음의 야성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메시지 뿐인가? 한국 교회는 기도의 야성이 있던 교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끄러운 기독교 대신에 조용한 기독교를 선택했다. '얼마든지 조용하게 기도하면서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최근의 경향은 관상기도, 수도원적인 영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나 또한 그런 관상기도의 영성의 중요성을 믿는다. 하지만 한편 우리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영성의 원동력이 되어왔던 기도의 그 야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맹인의 기도는 시끄러운 기도였고 단순한 기도였다. 보기를 원하는 그 간절함이 소란을 야기시켰다.

한 친구 목사의 기도는 늘 시끄럽게 기도하는 스타일로 주변인들을 번거롭게 했다. 담임목사님은 그를 불러 "목회의 센스"로 그를 교훈했다. 사람들에 대한 '센스'를 가져야 목회에 성공한다는 말씀이셨다. 나 또한 친구 목사의 기도스타일을 따라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왠지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내 친구 목사 편을 들어주실 것 같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 소란스런 그 친구를 이뻐하실 것 같다.

12/22/10

말씀하지 않으셔도 기대하시는 것

눅17:11-19을 보면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지만 기대하시는 바가 있음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들에게는 감사를 기대하셨다. 돌아와 감사하라는 요구는 없었다. 그러나 한명만 돌아왔을 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신다. 감사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감사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이 내 삶에 베풀어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매번 나타나셔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법적 관계 이상이다.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은 요구받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반응한다. 이 나병환자의 감사는 자발적 반응이었지,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감사하며 주께 사랑을 고백하기 원하신다. 오늘 내가 주께 감사할 것은?

12/21/10

우리는 빛되신 예수를 따릅니다.

요7:53-8:12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드러난 죄인"이나 이들을 돌로 치고자 했으나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는 말씀앞에 도망가야했던 "드러나지 않은 죄인들" 모두에게 빛되신 예수가 필요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욕정에 사로잡혀 어둠을 헤메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어둠에 거한다. 빛되신 예수를 만날 때 어둠 속에 있는 우리들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그림의 교회는 온통 어둡게 그려져있다. 고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음을 고발한다. 우리가 우리의 의와 전통과 관습에만 사로잡혀 있고, 진정 예수의 음성에 무심할 때 교회는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 종교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따를 때, 예수의 음성 앞에 더욱 민감하게 들을 때에만 우리는 빛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교회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2/20/10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마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케 한다. 그 언약의 핵심은 그들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대약속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많았다. 강대국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야했으며, 많은 유대인들은 흩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드디어 약속된 메시아 예수님이 오셨고,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성탄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12/18/10

지체의 신비

고전12:13-25에서 지체의 신비를 보게 된다.

1.아무리 많은 차이가 있어도 한몸이 될수 있다는 신비. 호주인이든 한국인이든, 뉴질랜드인이든 미국인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구든 서로 지체가 될 수 있다(13절)

2.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우리는 이미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 때로 맘에 들지 않은 지체가 있어 그와의 지체됨을 부정하고 싶어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14-16절)

3.아무리 약해보여도 쓸데없는 지체는 아무도 없다는 신비(17-21절).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서 나와 똑같은 지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서로를 섬길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

4.약해 보이는 지체일수록 더욱 귀하게 여기는 신비한 공동체(22-24절). 부족해 보이는 지체에게는 귀중함을 더하셔서 공평케 하신다.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5.자기를 살찌우는 것이 아닌 서로를 돌보는 것이 목적인 신비한 공동체(25절). 우리의 공동체는 서로를 살찌울 때 자기가 살찌워지는 신비한 공동체.

12/17/10

우정

빌4:14-23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의 우정을 생각하게 한다. 바울은 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섬겼다. 그중 바울과 오랜 우정을 유지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외에는 없었던 듯 하다. 빌립보 를 떠날 때부터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그 시점까지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했다.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15절)는 바울의 고백에는 외로움과 함께 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난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함께 있는 동안의 그 막역함에도 어떤 이들은 멀어지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오랜 친구로 남아있게 된다. 바울에게는 빌립보 교회가 오래토록 우정을 나누는 교회였다.

그 우정이 바울에게 끝까지 사역할 수 있게 한 힘이 되어 주었다. 이들은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고(14절), "주고 받는 일에 참여"(15절)하여 바울을 격려했다. 바울이 감옥에서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먼거리를(지금의 그리이스에서 이탈리아까지 도보여행)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 바울을 감동시켰다. 이들의 우정은 우리가 사모해야할 교제의 이상이다.

우리는 상처의 두려움 때문에 교제의 이 깊은 우정의 길을 걷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교제의 이상은 서로의 삶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고, 실제적인 필요에 함께 참여함으로 우정을 키워나갔다. 내 앞에 놓인 형제자매들은 내가 함께 참여해야할 우정의 대상이다. 그들의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실제적인 필요들을 함께 짊어지며 나아갈 때 우정은 지속된다.

12/16/10

사랑의 지경을 넓히라

히브리서 13:1-3에서 명령된 형제사랑은 그 지경을 고민하게 한다. 우리 문화는 대단히 가족중심적이다. 그게 심해지면 가족이기주의로 바뀌는 경우가 많고, 안면있는 이들에게는 따뜻하고 정이 많으나, 그 지경을 벗어나는 낯설은 이들에게는 상당히 배타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오늘 말씀하신 형제사랑은 교회 안에서 살갗게 '교제'한다고 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우선 본문은 손님(strangers) 대접으로 형제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이민교회를 섬기다 보니까 다양한 손님들을 접하게 된다. 어학연수생, 유학생, 여행객, 워킹할리데이 학생들 등. 이분들중 다수는 교회 내에 정착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필요를 돌보아 형제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손님을 형제로 여기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또 본문에서 형제사랑의 지경을 넓혀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돌보라 하신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에 북한을 위한 기도의 날을 가졌다. 북한에 약 40만명의 지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정치수용소에 수감되어 고문과 성폭력, 그리고 생체실험 대상으로 고생하는 기독교인들이 5만에서 7만에 이를 것으로 Open Doors는 추정한다. 이 '갇힌 자'들은 저 멀리 있어 우리는 잊고 지내고 있다. 이들에 대한 형제 사랑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주님은 이들을 '생각하라'(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기억하는 것, 이들을 기도중에 기억하는 것이 형제사랑의 시작이다.

지경이 넓혀지지 않고 고여만 있으면 사랑의 우물은 썩게된다. 의도적으로 사랑의 지경을 넓히려는 노력을 하게될 때 우리의 사랑의 우물은 생명의 샘터가 되리라 믿는다.

12/15/10

인생의 후회요소들

베드로전서 4:7-11에서 생의 마지막에 후회할 수 있는 것들을 보게된다. 생의 마지막에 우리는 좀 더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이나, 좀더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몇가지는 우리에게 후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의 짧은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7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많은 일들로 인생을 허비하느라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시간을 내는 일에 인색했던 점은 분명후회요소가 될 것 같다.

또 한가지는 인생 가운데 만난 사람들을 "뜨겁게 서로 사랑"(8절)하지 못한 점도 후회요소가 될 것 같다. 올해에도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과 헤어졌다. 함께 하는 동안 좀더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지금의 후회가 생의 마지막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가지고 좀더 남들에게 베풀고, 남들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던 점도 후회요소가 될 것이다. 10절 말씀을 영어로 보면 "Each one should use whatever gift he has received to serve others"라고 되어있다. 우리가 어떤 선물을 받았든 그것을 남들을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은사를 포함하여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들을 가지고 좀 더 다른 사람들을 베풀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 후회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만났던 사람들, 주셨던 인생의 선물들은 언젠가 영원의 초입에서 두고 가야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을 기도로, 만났던 사람들을 사랑으로, 주신 선물들을 가지고 섬김으로 채운 인생은 후회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12/14/10

원수사랑은 인사에서부터

마태복음 5:43-4에서 원수사랑은 인사에서부터 시작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은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말씀 중에 하나다. 듣기는 좋은데 실천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문안'을 언급한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47절). 문안은 인사하는 것이다. 관계가 껄끄러우면 인사를 피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인사를 잘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사랑의 과제를 이행하는 첫 발걸음이다.

교회를 위한 세가지 기도제목

사도행전 11:25-30의 안디옥 교회의 모습에서 세가지 기도제목을 발견한다.

1. 교회에 필요한 일군을 보내주소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아 함께 사역했고, 가르침의 은사가 있었던 바울로 인해 큰 무리가 더해졌다. 교회의 사역은 그 일을 감당할 일군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느꼈던 점이다. 교회에는 은사에 따라 일할 지체들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2.가르침 받는 이들이 변화되게 하소서. 바나바와 바울이 가르쳤고, 이에 그 교우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들었다. 가르침에 따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가르침의 기회가 있는지 모른다. 기도제목은 우리 모두가 그 말씀을 듣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3.폭넓게 교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이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또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 헌금하여 바나바와 바울 편에 예루살렘의 교회에 보냈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간의 교제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교회 간의 더 넓은 교제를 위해서는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함을 느낀다. 목회자 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이것이 필요하다. 안디옥 교인들이 다른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물질을 보내주기 위해서는 더 넓은 마음이 필요했다.

12/12/10

박해받는 교회

우리 교회는 오늘을 '북한을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고 특별한 중보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아래는 오늘 교우들에게 설교한 내용의 요지이다.

성경본문 : 사도행전 8:1-4절

여러분이 만일 종교적 탄압 혹은 박해가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대단한 행운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전 세계에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수는 2억명에 달하며, 지난 한해 순교당한 기독교인의 수는 167,000명이며 전세계 인구의 70%는 종교적 자유가 전혀 혹은 거의 없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

기독교회는 첫 출발부터 박해를 받았다.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으며, 사도행전 8장은 이 교회에 다가온 박해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날 어떤 지역의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그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들려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 그 곳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한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나를 떠나셨는가, 나를 잊으셨는가, 나에게 침묵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박해의 현장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일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를 흩어지게 했고, 흩어진 교회는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예루살렘 중심의 선교였는데, 이 박해를 시점으로 사마리아와 인근지역으로 선교의 축이 옮겨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박해를 통해더 넓은 곳에 선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때때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안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일하신다. 지금 어느 교회가 박해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둘째, 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흩어진 사람들은 사도들을 제외한 교우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수동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박해를 기점으로 이 사람들이 움직였고, 이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도자들로 세워졌다. 박해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세우시는 용광로이다. 우리는 이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이런 지도자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 한 교회에 박해가 임할 때, 박해하는 그 사람들의 변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예루살렘 박해의 주역은 사울이란 사람이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3절). 이 사람이 바로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인물인 바울이다. 그리스도의 핍박자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박해하는 그 사람들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넷째, 한 교회에 박해가 임할 때,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계속 전파되도록 기도해야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복음의 위축이 아니라 복음의 확장으로 나타났다.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절). 오늘 우리는 박해받고 있는 북한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려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런 극심한 박해 중에서도 복음이 계속 전파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평안을 남긴다?

오늘의 QT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라는 말씀이다.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평안을 주신다는 뜻이 무엇일까? 평안은 물건이 아니기에 주고 받고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용돈 주듯이 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 평안을 주신다는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이해햐는 코드는 <근심>이란 단어인 것 같다. 오늘의 27절에도 나오고, 앞에 1절에도 나오는 이 단어는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이 이들을 위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근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시는 말씀이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떻게 예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재회를 말씀하셨다. 지금은 잠시 떠나지만,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다시는 떠남이 없는 영원한 만남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소망이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샘터인 것이다. 초대교인들이 그 두려운 핍박의 시대를 이겨낼 때 서로 "마라나타"- "주께서 오시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주고 받으며 마음의 평안을 누렸던 것도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차원은 이 세상 것이 아닌 천국에 대한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때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당장 떠나시는 예수님이 그리울 수 밖에 없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시겠다고 위로하시며, 제자들의 근심하는 마음을 편안케 하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그대로 하실 것이라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신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시다. 이 말씀에서 제자들은 평안을 얻었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고통이 힘겨운 것은 소외감일 것이다. 아무도 함께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느낌, 주님이 떠나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준다. "보혜사"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란 말 뜻처럼,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12/10/10

교회 내의 성적 범죄 다루기

고전 5:1-8은 교회 내에 발생한 성적 범죄를 다룬다.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오늘의 교회 안에서는 많은 성적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점에서 과연 교회가 세상의 다른 집단과 차별성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심지어는 "이방인 중에도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한 대형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를 옹호하는 글들과 비난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오늘의 바울이 지적하는 한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나 오늘의 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성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사랑과 성에 대해서 성경에서 배우기 보다는 세상에서 배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저 있을 수 있는 실수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심각성의 수위는 어느 정도인가? 당사자 뿐 아니라 온 교회가 이 문제로 함께 "통한히" 여겨야 했어야 했고, 그를 교회에서 "쫒아내야" 마땅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비록 자기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심판한다고 매우 강력하게 말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성경의 수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교회 내의 성적 범죄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조금도 허용하는 분위기를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징계와 근신의 전통이 회복되어야할 이유이다.

'깨진 창' 이론이 있다. 어느 집에 깨진 창을 그대로 나두면 다른 창들도 다 깨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사람들은 그 집에는 돌던져 창을 던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깨진 창을 그대로 나두면 교회의 다른 창들도 다 깨어지게 된다.

그 대형교회 목사의 사건이 있은 후 어떤 글이 나의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 목사님이 빨리 회복되어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제발 빨리 나타나지 말고 오랜 침묵과 회개의 기간을 가지며, 하나님이 오늘의 교회에 얼마나 거룩을 요구하시는지 그 산증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12/09/10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 두가지

누가복음 13:1-9에서 내가 착각할 수 있는 두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누군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가 나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예수님은 두번씩이나 그들이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하셨다. 탕자를 죄인으로만 보던 그의 형을 주님은 더 큰 죄인으로 보셨다.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보다 판단하는 나를 더 큰 죄인으로 보신다.

또 한가지는 주님은 열매를 따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무화과"인 내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그것만으로 기뻐하실까? 아니다. 본문의 주인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자 "찍어버리라" 하신다. 우리의 구원의 취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하나님은 내가, 혹은 내가 섬기는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오늘의 말씀은 왠지 섬뜩하다.

12/08/10

예수의 목회, 나의 목회

눅5:27-32의 예수님의 목회는 나의 목회와 현저한 차이점 몇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과감히 헌신을 요구하는 목회. 예수님은 레위(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마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셨다. 헌신을 요구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한 종교를 주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편안함은 교인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둘째, 예수가 중심이 되는 메세지. 예수의 메시지는 "나를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분의 메시지와 목회는 예수가 중심이었다. 단지 도덕적 교훈이나 삶의 지혜를 던져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도의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신앙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헌신이다. 그러나 나의 목회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고, 누리고 경험하게 하기 보다는 단지 사람들의 심리적 필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셋째, 장벽을 뛰어넘는 교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으로 지칭되는 이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했다는 것이 당시 큰 이슈가 되었다. 오늘날로 하자면 아주 평판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상종하지 않는 그런 류의 사람들과 예수님이 함께 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이미지는 장벽을 뛰어넘는 교제의 장이다.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을 때 진정 교회가 교회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패거리 집단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교회는 예수님의 목회현장과 거리가 먼 감이 있다.

넷째, 불신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전도 지향성.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건강한 사람이 아닌 병든 자가 의사가 필요하다 하셨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늘 예수 가까이 계셨지만, 그분의 발걸음은 늘 잃어버린 이들을 향하셨다. 그러나 나의 목회의 99%는 '건강한 사람'(?)만을 위한 병원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교회상을 다시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낀다.

12/07/10

부흥의 코드

삼상 7:2-8 말씀에서 하나님의 부흥의 코드를 묵상케 하신다. 당시 상황은 엘리 제사장 가문은 몰락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돌려보내져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다시 사사시대의 또한번의 악순환으로 '블레셋사람의 손'(3절) 아래 20여년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었고, "바알들과 아스다롯"(4절) 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땅에 부흥이 찾아왔고, 그 부흥의 장소는 미스바였다. 이 부흥의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의 코드를 읽을 수 있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왔다. 이 부흥은 사무엘이란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사무엘은 그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말씀의 사람이었고(3절), 기도하는 사람(5절)이었다. 사무엘의 활동으로 부흥이 도래했다.

E. M. 바운즈가 "기도의 능력"에서 말한 것 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다(Man is God's method).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서도 소리지르실 수 있지만,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미스바 부흥의 시대를 위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 아래서 준비시키셨다. 오순절 부흥을 위해서 예수님은 갈릴리의 촌 사람들을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는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부흥의 코드는 사람이다. 말씀과 기도로 제대로 준비된 사람이 있을 때,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시 하나님의 부흥을 부어주시리라 믿는다.

둘째, 부흥은 위험한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촉구하면서 사람들은 사무엘이 있었던 미스바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블레셋 군대의 침공을 초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7절).

부흥은 위험한 선택을 요구한다. 예수의 초청에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야 했고, 마태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야 했고, 바울은 동료 율법주의자들과 등을 돌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겠다고 서약한 사람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한다.

예수와의동행은 위험하다. 그는 넓을 길로 가려하지 않고 좁은 길로 가신다. 그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하나님께 물질의 우선순위와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은 오늘의 사람들을 위협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우선순위를 위해서 주일성수라는 신앙의 기본은 오늘의 크리스찬 사업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직장 내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직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역자에게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교회가 쉽게 성장할 수 있는 지역이 어딘가에서 진짜 교회가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고민하고 재정적인 모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과의동행은 위험하다.

그러나 부흥은 바로 그 위험한 선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를 위해 미움(박해)받는 자들이 오히려 복이 있다 하셨다.

12/06/10

자신을 살피라

약4:1-10에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몇가지를 보여준다.

첫째는 탐욕이다(1-3절).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서로 심하게 갈등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그 근본적인 동기는 탐욕이었다는 것이 야고보의 지적이다. 한 해가 가기전,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야할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는 세속화이다(4-5절). 세상적인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영적 간음이며,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이라 지적하며,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야고보는 지적한다. 내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이 세상적인 것들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셋째는 교만이다(6-10절). 본문에서의 교만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는 인간의 고집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복종하고(7절), 하나님을 가까이하고(8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라고(10절) 계속적으로 요구한다. 주님 앞에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내 교만한 고집은 없는지 살펴, 성령 안에서 자신을 깨뜨리는 작업을 해야한다.

12/04/10

정직이 축복의 길이다

“육일약국 갑시다”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성오 씨는 600만원의 빚을 얻어 마산의 변두리에 4.5평의 조그만 약국을 개업했다. 시내버스도 오지 않는 전형적인 변두리 약국의 약사였다. 기독교인인 이기에 평일인 육일 동안은 손님에게 충성하고 일요일은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6일만 영업한다’는 뜻으로 육일약국이라고 이름지었다. 약국을 열면서 김성오씨가 결심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정직한 경영을 위해서 다음 네가지는 절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첫째는 아닌 것을 맞다고 하지 말 것, 둘째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말 것. 셋째 작은 것을 크게 과장하여 말하지 말 것. 넷째 큰 것을 축소하여 말하지 말 것. 주변에서는 그렇게 장사해서는 곧 망한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하게 일하다 망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 약국은 정직한 약국이라는 소문이 나서 이후 ‘마산역 육일약국’은 13명의 약사를 둔 기업형 약국이 되었다. 약사 숫자로 보면 19명의 약사가 있다는 종로의 보령약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으며, 진해, 창원, 거제 등에서 오는 고객이 몇 십만 명은 족히 되었다.

이후 김성오 사장은 약 3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메가스터디 엠베스트 대표로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무지개 언약의 파트너, 모든 생물

창9:8-16에서 언급된 무지개 언약은 노아와만 맺은 언약이 아니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9-10절).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12절)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15절)
"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6절)

하나님은 이 언약이 노아를 포함한 모든 생물들과의 언약임을 반복되는 문구를 통해서 강조하셨다. 모든 생물들도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트너였다. 이것이 우리가 환경과 생태세계를 소중히 여겨야할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12/03/10

종말론적 신앙

베드로후서 3:8-13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은 종말론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성경은 종말을 가르치고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믿는다. 종말을 믿는 사람들은 :

첫째, 종말의 심판을 믿기에 영혼구령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더디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지연된 시간은 영혼들의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절). 마지막 종말의 시간을 영혼들의 회심에 초점을 맞추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둘째, 종말의 결산을 믿기에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11절). 종말의 시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 보고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그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거룩과 경건이 우리의 옷이 되어야 한다.

셋째, 종말의 소망을 믿기에 그날을 사모하며 지내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절). 사모하는 사람은 사모하는 대상을 항상 생각한다. 사모하는 대상이 영광스러울 때, 오늘의 어려움도 가볍게 털고 일어설 수 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마라나타"를 고백하며 박해의 현장에 의연하게 나아갔던 힘도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12/02/10

우리가 인내해야할 것들

약5:7-11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먼저 우리는 열매(7절)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교회사역의 결실이 곧 바로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여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본문은 농부를 예를 들어 농부의 수고가 곧 바로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다.

둘째, 사람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고 한다. 때로 사람들의 어떤 모습이 불평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것 같을 과연 이들이 변화될 수 있을까 자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인내는 불평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에 대한 불평을 그치라고 하신다.

세째, 고난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인내해야할 이유를 욥을 들어 말씀하신다. 욥의 결말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에 하나님은 어떤 결말을 주실 것이다. 그 결말을 바라고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라는 것이다.

12/01/10

고난의 때에

욥기 19:21-27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게 두가지 교훈을 주셨다.

첫째는 힘겨운 때에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의 고난 속에 가장 위로가 되어야 마땅했던 친구들은 판단자들이었다. 그냥 욥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우는 심정으로 같어있어주기보다는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관, 세계관, 경험과 판단으로 욥의 문제를 해석하였다. 그래서 욥은 "나의 친구야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21절)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우리가 일상 경험하게 된다. 목장모임에서 한 지체가 기도제목을 나눌 때, 조용히 들어주고 심정을 헤아려주기 보다는 자신들의 의견과 해석을 늘어놓기 일쑤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고요히 들어주기 보다는 우리 인간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 보다는 자꾸 해석하려고만 해서 서로가 외롭다.

둘째는 하나님의 침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 힘든 것은 사실 고난 그 자체보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이다. 욥도 다가온 고난 그 자체는 욥기 1-2장에서 이미 해결되었다.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정리했다. 문제는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용하셨는가는 마지막장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였고, 그것이 욥을 괴롭힌 문제였다.

때로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끌어안고,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대답으로 혼란스러워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 주께 질문하지만 주님은 대답을 아니하신다.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욥은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다"는 믿고,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25절) 믿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언젠가는 말씀해주실 것이라는 믿었다. 그리고 이땅에서 들을 수 없으면 "육체 밖에서" (26절) 주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가 들을 수 없었던 주님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을 믿었다. 실제로 욥은 욥기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다.

하나님의 침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박국이 파수대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듯이 주께 쏘아올린 나의 질문들에 대해 언젠가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