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10

기억하게 하는 여호와

호세아 11:12-12:6에서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5절)이라 한다.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따르는("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는" 1절)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들의 옛 추억을 기억하게 하신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야곱,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울며 간구하던 야곱,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던 야곱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그를 만나주셨다. "여호와"는 야곱이 간절히 구하던 하나님이셨다.

처음 사랑을 생각한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은 내게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고백하게 하시던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고백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 것일까?

11/29/10

"회복"을 기다리며

호세아 11:5-11에서 하나님은 다시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언젠가 이들이 다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다. 당장 이들에게 임할 현실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그 뒤에 있을 회복이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내가 바라는 회복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다. 영적 부흥과 함께 오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꿈꾼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뿐 아니라, 온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회복의 그날을 기다린다. 그 날이 올 수 있을까? 당장 우리가 직면한 현실 속에서는 믿음이 흔들린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내가 회복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두가지 근거를 제시해 준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어찌 너를...두겠느냐"(8절) 말씀하신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 하신다.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9절) 하신다. 회복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다. 불붙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이 있기에 회복을 소망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이 계시기에 한 밤중에도 한 낮의 태양을 바랄 수 있는 소망을 갖게 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사자후를 발하실 때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호와를 따르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서쪽에서(지중해의 섬들), 애굽에서(남쪽), 앗수르(동쪽)에서 사람들이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기에 우리는 이 회복의 날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나는 오늘 이 회복의 날을 위해 기도한다.

11/27/10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

호세아11:1-4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이다. 보통의 짐승들은 억센 끈으로 통제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아니다. 강제적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기다리시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시고, 사랑으로 참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강제적인 방법으로 강요된 충성은 사랑이 아니며, 주님이 기대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주께 돌아오는 사랑을 원하신다. 그러기에 주님은 더디지만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신다.
또 이구절에서 우리가 주님께 사랑으로 매여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사랑의 줄은 연약해 보이지만, 세상 그 어떤 끈보다 더 강력하다. 이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랑의 끈으로 엮여있는 우리들을 이렇게 고백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11/26/10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세아 10:9-15에는 세가지 밭갈기(기경)를 말한다.

첫째는 고생의 밭갈기이다(11절). 이스라엘은 곡식밟는 것을 좋아하는 암소로 비유된다. 암소로 곡식을 밟는 것은 일종의 타작의 방법이다. 이때는 소도 곡식을 주워먹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축제의 타작마당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범죄로 하나님은 이들의 목에 멍에를 메우고, 곡식단을 밟는 것이 아니라 땅을 밭가는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는 회개의 밭갈기이다(12절). 심판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회개하고 주의 얼굴을 찾으며, 의를 심으면 은총과 긍휼을 경험하게 될 것을 말씀한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인 땅은 묵은 땅(밭갈지 않은 땅)이 되어있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뜻은 단지 "마음" 밭을 기경하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로 주께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고백이상이다. 회개는 삶으로 주께 응답하는 고백이다. 호세아는 말한다.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때니..."

세째는 죄악의 밭갈기이다(13절).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하나님은 이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르를 원했지만, 이들이 밭갈아 심은 것은 의가 아니라 악이었다. 그리고 결국 회개를 거부한 이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영토에 의가 심겨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꽃피우기를 원하신다. 기도와 말씀의 영토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땅이 되기를 원하신다. 지금은 여호와를 찾을 때이다. 더욱 주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가야할 때이다.

11/25/10

독초와 물거품

호세아 10:1-8에서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독초와 물거품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백성들은 기대했던 왕들에 대해서는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며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의 삶에 독초같을 뿐이었다고 한다. 사람에 기대는 것이 물거품을 기대는 것과 같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 대신에 섬겼던 벧아웬(벧엘)의 수송아지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앗수르 왕에게 바쳐지는 예물이 될 뿐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수치가 되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들, 오늘의 금송아지는 결국 우리에게 독초와 물거품, 그리고 수치가 될 뿐이다.

11/24/10

하나님이 기억하신 장소들

호세아 9:8-1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3 장소를 기억하신다.

1.기브아.  사사기 말기의 한 레위인의 첩을 베냐민 사람들이 윤간하여 죽게하자, 레위인은 이를 12토막으로 보내어 각 지파로 보낸 끔찍한 사건. 레위인이 첩을 취한 종교적 타락과 베냐민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을 함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바알브올 .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여인들을 취하면서 최초의 바알 숭배가 이루어진다. 그 이후 바알숭배는 이스라엘 땅에 성행하게 된다.

3.길갈. 엘리야 엘리사 시절에는 선지학교가 있을 정도의 영적 중심지였으나, 호세아 시절에는 벧엘, 단과 더불어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전락되어 있었다.

 

우리가 살았던 땅은 우리 삶의 초상화이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11/23/10

"너희는...여호와의 절기에 무엇을 하겠느냐?"

호세아9:1-7. 드디어 심판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호세아는 그들의 <여호와의 땅> 에서 쫒겨나게 될 것이며(3절), 이방의 땅에서 정결법에 의거한 유대인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며(3절),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도 없으며, 설사 드린다 해도 부정탄 자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제사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4절).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예배를 거부한 이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심판이 온 것이다.  호세아는 말한다. "너희는 명절의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예배는 특권이다. 그러나 주어진 이 축복을 거부할 때, 결국 이 축복을 거두어가신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받은 우리가 예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생 중에 무엇을 하겠는가?

11/22/10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호세아 8:8-14. 이스라엘의 이상은 열방의 복의 근원(창12:1-3)이었다. 그러나 열방가운데 '즐겨쓰지 아니하는 그릇'(8절) 같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는 소금(눅14:35)이 될 수 있다.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은 영어 표현으로는 "worthless vessel"이라 되어있다. 즉 쓸모없는 그릇이 되었다. 무엇이 복의 근원 이스라엘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본문에서 몇가지를 지적한다.

1.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강대국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9절)
2.제단을 많이 만들어 백성들로 죄짓게 만든 일(11절)
3.율법 말씀을 이상한 것 보듯 멀리한 것(12절)
4.죄에 대한 회개없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것(13절)
5.경제적인 번영(여로보암2세시대)으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14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큰 집에는 금이나 은 그릇도 있고, 크고 작은 여러가지 그릇이 있지만, 깨끗한 그릇이 쓰임받는다는 것을 강조했다(딤후2장).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마5:8)이라 하셨다.

11/19/10

백발이 되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호7:9)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혼합되어(8절), 그 힘을 삼켜버려서(9절)  이스라엘은 백발의 노쇠한 모습이나 이 조차도 깨닫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우리들의 삶에도 세상문화가 들어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죽어가는데도 우리는 이 조차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나는 혹시 백발의 사람?

11/17/10

신앙의 형식과 생명력


호6:4-11 묵상.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와 교회활동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원하신다. 신앙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형식화되면서 원래의 생명력을 잃어가는 경향이 있다. 호세아시절의 사람들이 신앙도 그러했다. 우리들도 그럴 수 있다. 호세아는 말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11/16/10

회개의 4 R

호세아 5:15-6:3. 하나님은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을 사자처럼 찢으실 때에도 우리 회개를 기다리신다. 아이들에게 채찍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매를 맞는 아이가 제발 잘못했다고 말해주기를 부모는 기다린다. 회개란 무엇인가? 본문말씀에서 회개의 4 R을 발견할 수 있다.

Regret. 회개는 뉘우치는 것이다. 성령께서 내 삶에 지적하시는 문제를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헬라어에서 자백은 하나님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합리화하고 싶은 내 모습도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죄라고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 회개다.

Return.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잘못을 시인하는데서 그치면 반쪽 회개다. 회개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홀했던 기도의 자리,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호세아는 말한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Revive & Restore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시고 회복시켜주신다. 매를 들어 잘못했다는 자식의 소리를 들은 부모가 곧 매를 버리고 자식을 안아주시듯,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며, 그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회개하는 자가 영혼의 회복을 경험한다. 회개가 치유의 길이다.

11/15/10

우리를 치유할 수 없는 것들

호세아 5:8-14에서 우리를 치유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를 치유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달려나가는 경향이 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13절)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으로 지칭한다. 에브라임의 선택은 하나님이어야 했다.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사람들이 치유받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대면하지 않고 회피하기 때문이라 한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두고 눈에 보이는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것은 마음의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안과 치유는 다르다.

해결책인 것 처럼 보이는 것들은 많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문제되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 누군가 우리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 스포츠나 도박 심지어 교회활동 같이 어딘가에 열중하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문제를 대면하지 않고 찾아나서는 우리의 해결책은 우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한다. 에브라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문제였다. 하나님 대신에 그들이 찾은 우상이 그들이 지금 격고 있는 온갖 문제의 원인이었다. 에브라임은 그 문제를 직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문제가 생기자 앗수르라는 해결책을 찾는다. 그리고 이들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이 되었다.

오늘의 교회는 심리치료소라 할 정도로 온갖 상담, 심리적인 용어가 교회안에 난무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사람들을 진짜 문제에 대면시키고 하나님 앞에 세우기 보다는 그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정도를 치유라 여기는 경우다. 어쩌면 우리는 다음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11/12/10

죄의 힘

호세아 4:11-19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다.죄는 처음에는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죄는 다이나마이트 같은 힘이 있어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죄는 한 개인을 넘어뜨리고, 한 가정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한 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있다. 호세아시절의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것은 앗수르라는 강대국 이전에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죄는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가?
첫째로 죄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키신다. 우상예배의 일환인“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11절). 여기서의 마음은 14절의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느니라"고 했던 깨달음, 명철, 판단력 등을 말한다.
술이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고, 성적 유혹에 넘어간 이들이 사랑하는 자녀들도, 소중한 가정도, 평생을 아름답게 살아왔던 자취도 다 상처내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가듯이 죄는 사람을 미련하게 만든다. 죄는 지켜야할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하찮은 것들을 위해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게 한다. 호세아는 나무 막대기를 신이라 하고 나무 막대기에게 앞날을 묻는 사람들의 어리석음(12절)을 말한다.

둘째로 죄는 사람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은“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다"(16절)고 그들의 고집을 지적하신다.하나님은 이들을 어린 양처럼 넓은 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지만,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거친 들에서 회오리 바람을 맞으며(19절) 파멸에 길로 간다. 그때서야 그들이 의지하던 것이 아무런 힘도 없는 것임을 깨닫는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19절).
하나님의 말씀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자'들이 구원과 치유를 경험한다. 그러나 죄는 인간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만들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까지 싸우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거룩을 향한 투쟁이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악된 것을 주 앞에 내려놓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신 말씀처럼 거룩을 향해 가는 여정인 것이다.

11/11/10

제사장들의 두가지 죄

호세아 4:6-10에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두가지 죄를 통해 다시한번 나를 일깨워주신다. 첫번째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게으름의 죄이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한탄하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침받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묻는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다. 말씀에 대한 게으름이 백성들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둘째는 직분을 이익의 기회로 삼은 탐욕의 죄이다. 호세아는 당대의 제사장들이 '번영'과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하나님께만 바쳐져야할 속죄제물을 먹어치우는 자로 묘사한다. 언젠가 부터 한국 목회자의 표상은 고난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보다는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사역이 자신의 인기와 탐욕을 위한 자리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나의 목회현장의 강력한 유혹이 되고 있다.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9절) 말씀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오늘의 사역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일반 백성들을 보기 전에 지도자들 보았다. 그러나 백성들과 다를바 없은 삯군 목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이 오늘 나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떻게 보실까?

11/10/10

지도자와 책임

호세아 4:1-5에서 우리들의 영적 현실에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영적 지도자라 말씀하신다. 악화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주로 다른 이들을 탓하고 비난하기 일쑤다. 영적 지도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들도 그런 경향이 많다. 때로는 교인들을 탓하기도 하고, 지역사회 혹은 교민사회를 탓하기도 한다.

사역하면서 몇번 사역지를 옮겨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 수월한 곳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었다. 언젠가 교인들을 탓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민수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확신하고 현재의 사역지에 임했다면 그 사역지나 사람들, 교인들에 대해서 악평하지 말아야 한다. 악평했던 10인의 정탐꾼들은 결국 그 땅을 얻지 못했다.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보던 사람들만이 그 땅을 얻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사형통의 땅이 아니라 개척해야할 땅이고 싸워야할 땅이었고 믿음으로 나가야하는 땅이다. 계속 환경과 사람들만 탓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태도가 아니다.

호세아 시절에도 하나님은 '이 땅'에 거주하는 이들을 고발('논쟁')하신다. 진실(언약에 대한 신실함)도, 인애(다른 이들에 대한 긍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히려 속임과 살인과 간음과 피흘림으로 그 땅을 더럽힌 이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결내용이었다. 이런 사역지에 처해있을 때 쉽사리 사람들의 타락상을 얘기하며 이들을 탓하기 쉽다.

그런데 4절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사장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도덕적, 영적 타락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고발대 앞에 서야할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제사장들, 선지자들은 일반 백성과 똑같았고, 아니 그보다 더했다. 그래서 5절에서는 제사장들은 낮에 넘어지고, 선지자는 밤에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들은 더욱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종된 이들은 더 큰 책임앞에 서있는 것이다.

11/09/10

가난으로 치유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3:1-5에서 가난으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아이 셋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은 후, 호세아를 떠나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음녀가 된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호세아는 아내를 데려오면서"많은 날 동안에'  다시는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 것을 말하고 자신도 그리하리라 한다. 본인도 일정기간 절제의 시간을 보낼 것을 말한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에 한동안 "절제의 시간" 혹은 "가난의 시간'이 다가올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게 될 것을 말한다.  국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중단되고, 우상숭배도 하지 못하게 되는 시간이 오게된다. 실제로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국권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 대한 성전예배 뿐 아니라 우상숭배조차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난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 가난의 시기는 이스라엘의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를 지낸 후의 선지자들의 메세지를 보면 이제는 예전처럼 우상숭배를 경고하는 메세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난의 시기에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고질적인 우상숭배의 문제가 치유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유다인들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돌아온다.

중국공산화 기간을 통해서도 비슷한 사례가 일어났었다. 공산화되면서 그간 활동했던 선교사들은 우려했다. 중국 선교가 끝장난 것 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중국이 개방되면서 확인된 사실은 중국 공산화 시절 혹독한 기독교 탄압도 있었지만, 중국의 온갖 미신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고, 지하교회를 통해서 은밀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는' 가난의 시기를 통해서 이들을 치유하셨다.

신앙에는 영적 가난의 시기가 찾아온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열심과 사역적인 헌신 조차도 깨어지는 가난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가난의 시기를 통해서 우리 안에 온갖 도사리고 있는 잡신들을 제거하신다. 하나님은 가난을 통해 치유하신다.

11/08/10

관계 회복

호세아 2:19-23에서 우리와 관계회복을 원하시며, 이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호세아의 세 자녀의 이름은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르엘 평야에서 끝장내실 것이며,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당신의 백성으로도 삼으시지 않으시리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돌이키신다. 하나님이 부정한 우리를 고귀한 신부처럼 여기시고 우리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시고,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늘에 응답하여 비를  땅에 내려 심판의 장소였던 이스르엘 평야에 포도주와 기름과 곡식들을 풍성히 내리시겠다 하시며, 그들을 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버렸던 이들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새로운 이스르엘, 로하마, 암미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회복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부정한 여인같아서 자격없는데,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관계를 새롭게 하신다. 때때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일 때가 있다. 우리의 잘못으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먼저 손 내미시며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네게 장가들리라'하신다.

11/05/10

우리가 가진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

호세아 2:8-13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왔으며, 하나님께 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것들 - "곡시과 포도주와 기름"과 "은과 금" 등 -을 바알을 위해 사용하였다. 남편에게 선물 받은 것을 가지고 정부를 위해 사용한 격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위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있다면 두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데 사용하기 보다는 나의 우상을 위해 사용한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젊음과 자리와 건강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우상을 위해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 하나님의 경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신 것들을 가지고 오히려 죄짓는데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계속 주실 이유가 없다.

11/04/10

가시와 담

호세아 2:2-7에서 하나님의 <가시>와 <담> 본다. 부정한 여인이 남편아닌 정부를 찾아나서는 길을 가시와 담으로 방해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신다. 가시는 아프게 찌르는 것이며, 담은 답답하게 서있는 절망이다. 우리에게 아프고 답답한 현실이 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손길이다. 가시와 담은 우리에게 고통의 현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사랑의 현실이다.

 '더 이상 내 아내가 아니다' 외치는 앞구절에서 하나님의 멍든 가슴을 본다. 아내를 발가벗겨 사막으로 내쫒으리는 말씀에서 배신당한 사랑으로 절규하는 남편의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본다.

그러나 결국 남편으로 사랑으로 아내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인'을 찾아 나서는 아내 앞에 가시를 놓고 담을 놓아 아내의 발걸음을 돌이킨다. 우리 앞에 놓인 가시는 우리보다 하나님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으며, 우리 앞의 담은 하나님께 담쌓고 지내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 길에 가시와 담과 같은 고통의 현실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그 가시와 담이 하나님의 아픈 마음인 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자기 밖에 보지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주님을 보아야할 때가 그 때다. 그것이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기 때문디ㅏ.

11/03/10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1:8-2:1에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망가진 우리 인생을 전적으로 새롭게 만드실 수 있다. 공식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운명은 호세아의 예언만 의거해 보더라도 왕조가 없어지게 될 것이고 호세아 아이들의 이름처럼 <로루하마> <로암미>, 자비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도 박탈당한다.  북이스라엘의 운명은 절망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가진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의 말씀은 로암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암미> 즉 하나님에게 <내 백성>이라 일컬음 받게 될 날이 올 것이고, 북 이스라엘은 흔적없이 사라지지만 그 백성들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한 나라가 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의 메세지다.  하나님은 망가지 <로암미>를 <암미>로 바꾸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행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운명은 <로암미>의 인생이다. 희망없는 인생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암미>라 부르신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인생길에 지은 집은 카드로 만든 집이다. 망가질 수 밖에 없는 인생길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다.

11/02/10

긍휼

호 1:4-7에서 <긍휼의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의 현재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이는 두 왕조에 대한 대조적인 예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될 것이고, 유다는 보존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두 아이의 이름, '이스르엘' '로루하마', 이는 이스르엘 평원에서 벌어진 살륙에 대한 심판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 하신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아직 긍휼을 베푸시겠다 하신다. 유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유다의 의 때문이 아니었다. 혹은 본문의 말씀처럼 유다의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의 실력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이 긍휼 때문이다.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는 지금의 삶의 자리도 주님의 긍휼 때문이다. 다른 이보다 더 나은 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도 있는 것도 아닌데, 주님의 긍휼 때문에 아직도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이 자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긍휼이 여기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11/01/10

그녀를 데려오라

호1:1-3에서 고통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아내의 부정한 관계로 낳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라고.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황을 위한 메시지였다. 처음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화가났다. 하나님은 본인의 메세지를 위해서 당신의 사람들의 불행을 개의치 않으시는가? 우리의 행복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그리고 그간의 나의 삶에도 그런 대목이 있는 것 같아 조금은 화가 났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읽은 아우슈비츠 얘기가 생각이 났다. 나치 친위대원 한명이 어린 아이 하나를 교수대에 달아 고통스럽게 목이 매달린 그 아이를 수감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지켜보게 하였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은 불평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거야?'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유대인 출신 작가 엘리 위젤의 마음 속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그분은 바로 여기에 계셔, 바로 저 교수대에 매달려 계시지’

호세아의 교수대에 달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부정한 아내를 데려오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호세아는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부정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통의 잔을 우리에게 내밀기 전에 하나님은 그 잔을 먼저 마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녀를 데려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