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13

소속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

소속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둘에 속해 있었지만 예수를 팔았다. 최고의 지도자를 따랐지만 최악의 길을 걸었다.

자랑스러운 교회를 다닌다는 것, 존경스러운 지도자를 따른다는 것, 어떤 모임의 일원이라는 것, 어떤 교제권에 내가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소속은 자기를 증명하지 않을 뿐 더러 자기를 기만할 수 있다. 고급스러운 말씀을 듣고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급이라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위치에 있다 해서 내 인격이 그 정도라고 착각할 수 있다.

신앙과 인격은 소속이나 위치 등 보이는 영역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빌 하이벨스의 책명은 도전적이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4/28/13

소명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꼭 많은 업적고 성취를 남겨야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명과 집중이다.

주님은 자신의 소명을 알았고 그것에 집중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내가 이루어." 예수님도 당시의 모든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으셨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4/27/13

헌신과 배신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

마태복음 26장에는 두 사람이 비교된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여인과 예수를 판 유다다. 향유의 가치는 300 데나리온이었고, 유다가 거래한 가격은 은 30이었다. 여인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 위로를, 유다는 상처를 남겼다. 여인은 본문에서는 이름없는 이였고, 유다는 "열둘" 중의 하나로 표시된다.

두 인물이 비교되는 지점은 돈이다. 돈에 대한 태도는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이 기억될 것이라 하셨고, 유다는 영원한 배반자의 오명을 갖게 된다. 돈은 헌신과 배신을 가른다. 여인의 헌신의 표상이요, 유다는 배신자의 전형으로 기억된다.

예수님은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그의 교훈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가 돈이다. 이는 기도나 사랑이나 다른 주제에 대한 가르침보다 앞선다. 그만큼 돈은 헌신의 장애물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배신자의 자리까지 가게만들 수 있는 위력을 지닌다.

돈에 자유롭기 어렵다. 마태복음 26장에서 돈으로 인한 배신이 이루어지기전, 마태복음 6장에서는 돈에 대한 최초의 가르침이 나온다. 그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돈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하면 돈을 섬기고, 돈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다.

예수님은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하셨다. 자기부인이 연습장은 우리의 염려의 상황들이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야 할 영역이다. 이 자기부인이 연습되지 못하면 26장의 끔찍한 배신의 주인공이 유다가 아닌 우리가 될 수 있다.

4/26/13

위로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

주님께도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시작한다. 이전이 예고와 달리 매우 구체적이다. "이틀 후" 라는 시간과 "팔리리라"는 배반의 언급이 있었다. 예수님은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드려진 한 여인의 향유는 무엇보다 주님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가치로 이 여인의 헌신에 불편해 했다. 그러나 인생 중에는 경제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주님은 다른 관점으로 이 사건을 보았다. 가장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주님께 드렸던 이 향유는 경제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어떤 사건을 바로보는 우리의 관점이 너무 편향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실리성과 경제성, 효과성...이런 가치들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차라리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낫다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회적 배려, 사회적 정의...이런 가치들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것도 허비가 아니다.

4/25/13

황금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마태복음 7:12의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황금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엔 또 다른 황금률이 있다.

모든 사람을 주님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고 사람들을 주님처럼 대접하는 것, 그것은 성경적 인간관계의 비밀이다.

4/24/13

안전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마25:25)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안전한 장소에 숨겨둠으로 맡겨진 것을 안전하게 지켰다.

인생을 안전하게만 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인은 이 사람의 태도에 분노했고 맡겨둔 것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이 사람이 안전주의의 길을 택한 것은 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워하여". 주인이 실수를 용납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주인이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해서 눈감고 있었다.

바다로 항해하는 배는 부두에 정박한 배보다 안전하다. 그러나 정박이 배의 목적이 아니다. 안전하게만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실수하지 않거나 문제없이 살고, 아무 시련도 고난도 없이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배의 항해를 위해 지어졌고 항해는 위험이 따른다. 안전하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겨주셨다면 그것은 안전하게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라는 뜻이다. 주인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음의 비유에서 보여주듯이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다. 내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무언가가 있고 또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달란트를 안전하게 숨겨둔 종과 다름없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시107:23-24)

4/22/13

준비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마25:3)

예수님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셨다. 열처녀 비유에서 다섯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인생의 준비는 언제든지 신랑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다. 열 처녀 처럼 우리 모두는 그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신랑의 지체됨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다. 어리석은 이들의 문제는 준비하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씩은 그분을 고대한다. 그러나 충분히 못할 수가 있다.

나는 오늘 그분을 만나기에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내 마음 속에는 "그렇지 못해" 하고 소리치는 듯 하다.

나의 준비는 정리에서 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주님 모시기에 내 삶에 반듯하지 못한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 죽음을 예감한 이들이 인생을 정리하듯 그렇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마루 밑에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단촐한 가구로 깔끔하게 준비된 옛날의 집들처럼, 삶을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4/19/13

환난과 결말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1)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다가올 큰 환난을 예고하셨다. 이 환난의 일차적인 뜻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유대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때에 있을 큰 환난도 동시에 예언하셨다.그리고 마지막 결말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다.

환난의 때와 하나님의 결말, 이것은 성경의 구속사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의 패턴이다. 구약성경에서도 환난과 하나님의 결말의 패턴을 많이 볼 수 있다.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극적인 귀환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마지막 때에도 이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위대한 결말이 있기전에는 큰 환난이 있다.

이 패턴은 우리 삶 속에서 무수히 반복된다. 고난이 깊을 수록 하나님의 결말이 크다. 반대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기 전에 큰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언에서 두가지 교훈을 새겨야 한다.

첫째, 우리는 환난을 앞둔 사람들이기에 깨어 기도하면 다가올 일들을 기도로 대비해야한다.

둘째, 우리의 환난이 아무리 깊어도 환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결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해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4/18/13

성전과 건물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1-2)

두개의 경우에 성전에 관해 보인 예수님의 태도는 흥미롭다.

첫째는 성전정화의 장면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보니 많은 이들이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둘러 이들을 쫒아내셨고,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하셨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전의 세속화를 우려하셨다. 성전은 구별되어야 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둘째는 마태복음 24장의 장면으로 제자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얘기하자, 이 성전은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 상반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직업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부르심 받는 소명자들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주신 일들이기에 거룩한 사역들이다. 교회에서의 사역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업의 장도 소명의 장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장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게 성전이다.

그러나 건물로서의 성전은 어느날 종말을 맞이해야하듯이, 우리의 모든 것은 언젠가 다 무너지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건물로서의 성전의 가치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우리 삶에 멋있게 세워진 건물들은 많다. 학위가 그러하고 사회적 지위가 그러하고 은행잔고가 그러하다. 자녀들의 출세가 그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전이 무너지듯이 언젠가 다 무너질 것이다.

성전이 건물로 부각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내 삶의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

4/16/13

맹인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마23:16)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시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외식하는 자 못지않게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맹인, 혹은 눈 먼 인도자란 표현으로 마태복음 23장에서 여러차례 반복된다.

이들은 자신을 살피는 눈을 잃었다. 남을 향해서는 눈 속의 티끌까지 발견하고 사람들을 정죄하지만 자신의 실상에 대해서는 눈 감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이 그릇의 겉만 깨끗이하고 속은 더럽게 하는 이상한 설거지라 하신다. 이들은 자신의 속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다.

이것이 어찌 과거의 종교인들에게만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방문하신다면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우리들의 눈은 이기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왜곡된 필터를 가지고 있다. 낙타는 보지 못하고 하루살이만 본다. 사람의 죄인됨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성령님의 비췸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우리 모습을 보여주실 때 자신의 실상을 보게된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일하신 첫번째 일은 자신들의 영적 처지를 보게 하신 일이었고 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기에 이르른다.

그것이다. 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4/15/13

배움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배격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의 언행불일치가 문제이지, 그들이 말한 바가 다 잘못은 아니라 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한 것은 배우고 행하라 하셨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아무리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은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흠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을 배격하려 한다. 그러나 언행불일치나 인격적인Integrity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겸허히 다가서기만 하면 그는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은 이들에게 배우지 말아야할 것도 말씀하셨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위선이나, 누룩을 본받지 말 것을 경계하셨다. 그들의 자기과시와 대접받고 섬김받고자 하는 태도도 비판하셨다. 이들은 경계할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배울 것은 배우라 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보다 중요한 신앙의 가치인 믿음이나 의나 긍휼을 놓치고 있다는 것도 비판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십일조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제자들도 배우고 행해야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모든 만남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어떤 만남은 내게 시험이 되고 어떤 만남은 고통이 되고 어떤이는 내게 실망을 주지만, 그들에게서도 우리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은 "좋은 교사"만 보내주시지 않으신다.

4/11/13

의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22:21)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원론적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만 중시한다. 세속적 신앙은 사람에 대한 의무만 강조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신다.

4/09/13

"빼앗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나는 신자의 영원한 안전의 교리를 믿는다. 동시에 "버림받음"의 교리도 믿는다.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했다(고전9:27). 에서는 버림을 받았다. 엘리 제사장은 버림받았다. 초대왕 사울도 버림을 받았다. 한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받는 이들이 버림받는 경우들을 본다. 이들이 사역을 이어간다 해도 더 이상 성령께서 이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 같지 않다.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 그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겼다"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신다.

그러면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것일까? 아니라 생각된다. 한때 귀하게 쓰임받았던 교회들이 유명무실해져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버린 교회들도 많다. 모든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것일까?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사역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 사람이 내가 될까 두렵고, 바울도 이를 두려워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한 귀퉁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쓰임받는 것이다. 이 아침에 드릴 수 있는 기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4/08/13

걸림돌, 버린 돌, 머릿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21:43)

마태복음 21장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농부들은 주인에게 농지를 위탁받는다. 그러나 농부들은 위탁받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을 벌이게된다. 주인에게 반항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려 보내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을 살해하고 만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도 정확히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위탁받았다.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라고 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위로부터 위탁받는 것이다. 우리는 위탁받는 청지기들이다. 우리의 시간과 재물은 위탁받는 것들이며, 우리의 재능과 권한은 주인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죄는 이런 청지기직의 소임을 망각하고 자신이 주인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존재는 농부들에게도 걸림돌이 되고 우리들에게도 걸림돌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인되심을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내 수중에 있는 재물을 내것이라 하고 싶은데 예수는 자신의 것이라 말씀하신다.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는 자신이 시간의 주인이라 하신다. 문 밖의 떨고 있는 이웃을 돕고 안돕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는 그분이 결정하실 문제고 우리는 그를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녀들에게 학원을 보내고 안보내는 것쯤은 내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는 우리 자녀의 주인이라 하시고 모든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하신다. 솔직히 주인되고 싶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 되신다.

그래서 농부들은 끔찍한 생각을 했다. 아들을 제거하면 농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죽인다. 그 아들은 버린 돌이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버린 돌이 되실 수 있다. 이 농부들처럼 노골적으로 주인에게 반기를 들고 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그를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주일날의 예배시간만이 그분이 주인되실 수 있다고 예수를 연금한다. 주일날의 예배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좋지만, 다른 날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은 곤란하다. 나머지날은 내것으로 만들고 싶기에 예수를 제한한다. 예수는 종종 우리들에게 버린 돌이 된다.

아니 예배시간 마저도 예수는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하실 수 있다. 예배의 모든 이벤트가 주인되신 그분께 맞춰져 있기 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져 있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요즘에는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예수님은 예배시간 마저도 쫒겨나신 듯 보인다. 예수는 이 시대의 버린 돌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진정한 머릿돌은 예수가 되신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시다. 예수는 걸림돌이 되고, 우리에게 버린 돌이 되시지만, 그 예수의 기초위에서만 진정한 삶은 세워진다. 예수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건축물을 쓰러거나 불타버리고 만다. 예수님이 주인되시고 머릿돌이 된 인생은 굳건히 세워지겠지만, 예수 없이 세운 우리의 왕국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마2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