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13

희망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4-5)

말라기의 마지막이자 구약성경의 마지막은 저주로 끝맺음을 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날로 시작된 책은 "크고 두려운 날"의 예고로 마감한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으로 시작된 책은 앞으로 일어날 무시무시한 일들을 예고하는 "두렵건대" 라는 표현으로 끝난다.

창조가 역사적 사실이듯, 심판도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창조가 분명히 일어났듯 죄에 대하 심판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며 심판의 하나님이다. 창세기가 엄중한 사실이듯, 심판 역시 반드시 일어날 사실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가지 희망을 남겨두신다. 그날이 이루기전에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것. 그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하시겠다는 것. 하나님은 심판전에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심판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새로운 희망을 주셨다.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책이 신약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의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시작된다. 심판과 저주로 끝날 수 있는 우리 운명이 "천국"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회개하고 주께 돌아온 사람들은 마지막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마친다. 심판은 분명히 있지만 회개한 자들에게 그날은 오히려 희망하는 날이 된다. "크고 두려운 날"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서서"라는 희망의 날로 바뀐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8/29/13

십일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3:8)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필터들 때문이다. 한가지 필터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필터이다. 즉 십일조는 구약에만 속한 문제로 보기 때문에 오늘날 이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기초에서가 아닌 교회의 필요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경우들이 많다.

또 다른 필터는 샤머니즘인 것 같다. 한국 교인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샤머니즘 혹은 종교혼합주의적 태도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은 물질과는 상관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과 십일조를 연관시키는 것이 불편하다.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발상에 거부감을 느낀다.

또 다른 필터는 그동안의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가 보여준 실망스러운 행태와 이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에 헌금해도 그 돈이 목회자의 사치와 교회의 건물에만 쓰이고 더 의미있는 곳에 쓰이지 못한다는 것이 헌금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요소이다.

부정할 수 없는 또 한가지 필터는 우리들의 본능적 거부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소유는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치루는 엄청난 값지불이 있다. 그것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필터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필터링으로 어떤 말씀은 받아들이고 어떤 말씀은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버린 말씀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말씀인지 모른다.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의 지갑이 필요없음에도 왜 십일조를 말씀하신 것일까? 십일조를 말씀하신 말라기 3:8절 바로 앞의 7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돌아오라 촉구하신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 다음 구절 말라기 3:8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다. 즉 십일조의 중단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단으로 보셨고 관계 회복은 십일조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지지하셨고, 우리가 결코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것 저것 종교적으로 나를 치장한다 할지라도 이 문제를 바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선 이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8/28/13

당혹스러운 하나님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1-2)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들의 "하나님 상"이 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제한된 하나님상이다. 때로는 편리한대로 하나님상을 조작하기도 한다. 우리 죄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 그저 우리 힘들 때 위로해주시는 착한 하나님상만을 그려낼 수 있다.

말라기는 당시 사람들의 행태를 여러가지고 고발한다. 1장에서는 눈먼 것, 병든 것들을 제물로 드리는 이들을, 2장에서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자기 아내를 내쫒는 이들을 고발한다.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그들은 주의 오심을 구했고 사모했다. 이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은 이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하나님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가 오실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전혀 다를 것이라 말라기는 말한다. 그가 임하는 날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는 금을 연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불과 같이, 의복의 땟물을 없애는 표백의 잿물처럼 임하실 것이라 한다. 5절에서는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라 하셨다. 오실 하나님은 당황스러운 분이셨다.

백성들이 만나야 할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셔야 했다. 우리가 만나야할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예상과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내게 임하실 때가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허용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런 당혹스러움이 내게 굳어진 작은 하나님상이 깨어져야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나는 하나님께 내 작은 판자집의 구멍난 것을 메꾸어달라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 판자집 자체를 부수시는 것 같은 모습에 우리는 하나님이 당혹스럽다. 나중 가서야 그 터 위에 하나님의 멋있는 집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인간인 우리들은 우리 판자집이 무너져내릴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하나님과의 대면을 피하지 말아야한다.

바리새인들에게 비쳐진 예수님은 당혹스러웠다. 누구보다도 신앙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그들인데 예수님은 오셔서 "독사의 자식들아..."하면서 이들의 허위와 위선을 실랄하게 공격하신다. 너무도 예수가 당혹스러워 예수를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당혹스러움 때문에 그들이 만나야할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다.

하나님이 당혹스럽게 여겨질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내가 견지해온 모든 신앙의 틀을 깨버리고 새롭게 주님을 볼 수도 있고, 내게 너무 익숙해져 편안한 내 신앙의 틀 안에 그대로 머물러 버릴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처럼...

8/26/13

영적 지도자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말2:3)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자리에 서지만(벧전2:9), 구약에서 제사장은 가장 대표적인 종교지도자였다. 7절에서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되어있는 것을 봐도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다.

그런데 제사장이 잘못되었을 때 그에 대한 경고가 거침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2절),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3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9절)

특히 3절은 논란이 많다.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너희 팔을 자르고"라고 번역한다. 여기 자손이란 단어는 원문에서 "씨"(seed)로 번역될 수도 있고 팔(arm)로 번역될 수도 있다. 카일 델리취는 제사장이 손을 들어 백성들을 축복하던 그 팔을 잘라, 더 이상 제사장직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라 말한다.

여하튼 오늘의 말씀은 매우 섬뜩하다. 그 만큼 말라기 1장에서 보였던 백성들이 병든 것, 눈먼 것, 저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등의 종교적 상황에는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다.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고, 팔을 자르고 얼굴에 똥을 바르고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한다는 등의 무시무시한 말씀들을 하셨다.

영적 지도자의 책임은 엄중한 것이다. 말라기 시대처럼 오늘의 종교적 상황에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가져야야하고 1차적으로 회개해야할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다.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서야하고 바로 행해야 하고 바로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8/25/13

우리의 현실, 그리고 비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이사야 60장 말씀을 보면 우리의 현실과 우리가 꿈꾸어야 할 비전을 보여준다.

1.우리의 현실 : 어둠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 (2절).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들, 특히 한국교회의 상황과 나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빛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암울한 어둠이 한국교회를 덮고 있다. 세상을 어둠이라 정죄하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어둠이 되어버린 것 같다. 세상은 교회를 더 이상 빛이라 여기지도 않는 현실이다.

2.우리가 꿈꾸어야할 비전 세가지 :

첫째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임하는 것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1절)
세상이 기대하는 대로 우리를 아무리 고쳐봐야 소용없다. 세상의 질타를 받지 않을지 모를지언정 그것으로 세상의 빛이 될 수는 없다. 교회 위에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며, 우리들의 삶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드러낼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엘리 시대의 종교적 부패와 비극적 결말로 엘리의 손자 이름은 "이가봇"이라 명명되었다. 뜻은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이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가봇이라고. 우리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있겠는가? 우리가 꿈꾸어야할 것은 바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가 영화롭게 되는 것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7절)
오늘의 교회는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진 상황 가운데서 주어진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오늘의 교회는 바벨론 포로기의 교회다. 다윗 솔로몬 때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처럼 영광스러운 교회시대를 뒤로 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시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셋째, 만민이 주께 나오는 것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4-5절)

우리들은 이 말씀처럼 만민이 주께 돌아오는 부흥의 날을 꿈꾸며 기도해야 한다.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암울한 시대이지만,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교회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어서 다시 교회가 열방이 주께 나와 주를 경배하는 터전이 되도록, 만민이 돌아오는 이 비전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8/24/13

예배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말1:12)

그리스도인들이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 속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행실을 지켜본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 혹은 관심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혀질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리는지, 어떻게 드리는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예배와 하나님의 명예와는 관계가 없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를 "번거롭게" 여기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13절)을 드릴 때 이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며,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 하셨다. 행실 뿐 아니라 잘못된 예배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

예배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의 반영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중하면 예배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말라기 표현대로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면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에 관심이 많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지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8/23/13

공경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말라기1:6-10절에서 하나님의 논리는 명쾌하다.
1.너희가 나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땅하다.
2.그런데 너희는 나를 공경하지 않고 있다.
3.나를 공경하지 않다는 증거는 너희의 제물이다. 너희는 최고가 아닌 최하를 나에게 드리고 있다. 나를 최고로 여긴다면 어떻게 이런 제물을 드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셨다. 우리의 드림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드리는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준다.

우리의 드림은 하나의 메세지다. 하나님은 7절에서 눈멀고 병든 제물을 드리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는 메세지가 된다고 하신다. MSG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중요하지 않으며, 더 이상 우선순위도 아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의 드림은 하나님 뿐 아니라 예배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8/22/13

사랑의 증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말1:2-3)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밖을 쳐다볼 필요가 있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곤경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문을 가졌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의 우리들도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

말라기는 야곱과 에서를 생각해 보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인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와 그 후손은 하나님께 미움받았고 그 땅은 저주받았다. 형제였던 야곱과 후손들은 이들과 똑같은 운명이었어야 했다. 야곱이 에서보다 더 도덕적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어찌보면 야곱이 더 간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달리 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밖을 쳐다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우리의 운명도 그들과 똑같어야 했다. 하나님에겐 우리들을 달리 대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으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더 나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열심을 보였기 때문에? 아니다. 바울은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달리 대해주셨다.

8/20/13

명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13:18)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소원은 명예롭게 사는 것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편지의 끝부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글 성경에는 약간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NIV,RSV,NASB  등에서는 모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것을 "to live honorably"로 번역한다. 성경학자 로버트슨도 본문의 그 단어의 원어 "kalos"는 영어의 nobly, honorably를 뜻한다고 했다.

즉 히브리서 기자의 기도제목은 단순히 선한 삶이 아니라 명예로운 삶, 고상한 삶, 품위 있는 삶이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단지 윤리적 경계선을 간신히 넘어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그 경계선에도 이르지 못한 모습때문에 오늘의 지도자들이 지탄을 받고 있지만 경계선을 넘어서는 정도가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고품격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할 명예와 품위가 있다. 영적 지도자들에겐 거기에 걸맞는 영적 품위와 고상함이 있어야 한다.

이 고상함의 궁극점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를 닮아갈 때 예수의 고상함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게 된다.

히브리서의 주제가 바로 그 무엇보다 뛰어나신 고상하신 그리스도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이고 히브리서 기자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표다.

리차드 마오는 복음을 알지만 너무도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많다고 지적한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가 없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진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아는데 가까이 가고싶지 않고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들지 않는다. 품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이익 앞에 명예를 잃어버리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품격은  영적인 문제임을 깨닫는다.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를 정화시킬 힘이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처럼 사람들에게 기도제목으로 내놓고 것이 지혜인지 모르겠다.

8/19/13

계승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믿음의 유산은 계승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들은 편지 수신자들에게 그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본받으라고 한다. 시제가 과거형이다. 과거에 이들을 인도하던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고정된 지도자들보다는 순회지도자들이 많았다. 한 지도자가 일정지역에서 한 동안 있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교회들을 돕고, 또 다른 인도자들이 와서 섬기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고 하는 순환식 지도형태를 많이 가졌다.

그래서 한 교회는 여러명의 지도자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를 따르는 무리가 각각 있었던 것도 여러명의 지도자들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신앙의 여정에서 보통 여러명의 영적 인도자를 경험한다. 교회 지도자든 혹은 평신도들이든 우리에게 영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이들이 있다. 나의 경우를 보러라도 내 신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많은 분들을 헤아릴 수 있다. 혼자 크는 나무는 없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라가고 이 일은 평생동안 지속된다.

물론 그들이 완벽했던 것들은 아니다. 모든 이는 다 공과가 있고 장단점이 있다. 오늘의 성경도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본받으라고 한다. 누군가을 본받는 것은 분별력이 필요하다. 분별력이 없으면 그 약점이 내게 재생산된다.

어떤 지도자가 좋아 추종하는 이들 가운데 명백한 지도자의 잘못이 있고 문제를 야기시킴에도 그의 모든 것을 옹호하려 드는 경우들을 많이 목격한다. 영적 지도자와 권위에 대해서는 늘 존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동시에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도 있다.

우리의 믿음은 계승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계승은 모본으로 되어진다. 성경에 "본받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남길 책임도 있다. 자녀들에게, 주변의 믿음의 가족들에게, 책임지고 있는 양떼들에게 영적 유산을 남겨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행실의 결말"을 지켜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믿음의 유산을 남길 것인가? 이것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행실의 문제다. 결국은 "행실의 결말"이 중요하다.

8/16/13

하나님은 불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12:29)

하나님은 모든 것을 불태우시는 불이시다. 시내산에서 땅을 진동하며 임하셨던 하나님이 또 한번 임하실 때에는 하늘과 땅을 뒤흔드시며 불사르실 것을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은 여전히 불이시다. 그런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으로 쉽게 분류해버려서도 안된다. 오늘의 하나님도 소멸하시는 불이시다. 성경은 "또 한번" 모든 것을 불태우실 것이라는 경고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26절). 우리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실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몇가지를 깊히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25절).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말씀하신 이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것은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다.

둘째는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28절). 하나님을 가볍게 대해서는 안된다. 자기 입맛에 따라 하나님상을 만들어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모든 좋을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를 묵과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잘못된 것을 불사르시고, 심판하시고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천박해서도 안되고 얄팍해서도 안된다.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에게 나가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28절)고 말한다. 모든 것을 뒤흔들리고 불태워질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우리 삶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때 그 기반 위에서 영위하는 우리의 삶은 모든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기반이 아닌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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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13

이웃을 지키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5-16)

우리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살펴야 한다. NIV에서는 위 두구절에서 살피라는 말이 각각 나온다. 우리는 개인의 영성 뿐 아니라 공동체를 살피고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세종류의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야 한다. 오랜 시간을 교회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특히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가 살펴야 한다.

둘째는 쓴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야 한다. 쓴뿌리란 내적인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해로운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번역했다.

원래 쓴뿌리란 말의 기원은 신명기 말씀이다.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신29:18). 신명기에서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일어나서 독초와 쓴나물처럼 공동체 안에서 우상숭배가 퍼져나가게 될 것을 경계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독초역할을 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이들 때문에 교회에 분란이 생겨날 수 있고 잘못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셋째로 에서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살펴야한다. 에서는 한 그릇 팥죽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다. 아주 작은 이익 때문에 엄청난 영적인 축복을 버렸다. 히브리서 배경 속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가졌던 믿음을 저버렸던 배교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개적인 배교가 아니더라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 가운데 많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 들어온 이들을 살펴야할 책임이 있다. 우리 가운데 그들이 가졌던 믿음을 뒤로 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생기지 않는가 살피고 그들을 권면해야 한다.

우리는 가인이 하나님께 했던 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아벨이 향방을 묻자, 가인은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니이까?" 반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을 처음과 끝만 강조하면 이렇다.

"너희는....살피라"

8/13/13

인생은 훈련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Endure hardship as discipline)"(히12:7)

여기서의 징계는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목적으로 하는 훈계, 책망 뿐 아니라 징벌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훈육과 훈련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7절의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는 말은 NIV에서는 고난을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참으라고 번역한다.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강변한다. 오히려 이런 시련과 고난이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라 말한다.

고난은 형벌(punishiment)이 아니라 훈련(discipline)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반드시 훈육하시고 훈련하신다.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손길이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는다"(11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며(10절), 열매를 맺게 한다(11절)고 성경은 말한다. 고난 없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요약하자면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난 뿐이겠는가? 인생 자체를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생사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케"(10절) 하는 것, 즉 거룩하신 하나님 처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8/12/13

피곤함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여기서의 피곤함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피곤함이다.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은 계속되는 박해와 사회적 냉대로 피곤해 있었다. 끝은 보이지 않고 이미 많은 동료들은 이 길을 버리고 옛날로 돌아갔다.

이 피곤함이 우리들에게도 자주 몰려온다. 소망하는 결과들은 보이지 않을 때, 환영의 갈채는 고사하고 싸늘한 시선이 우리들을 향할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들이 계속될 때,쉽게 가도 잘되는 이들을 볼 때 우리들은 포기하고 싶어진다. 신앙 자체를 포기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고수했던 신앙의 원칙 몇가지는 슬며시 놓고 좀더 쉬운 길로 가고 싶어진다.

성경은 이 길을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말한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을 제시했고, 12장에 들어서서 예수님을 제시한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참아내셨고, 수치를 견디셨고, 자기를 거역하는 이들 즉 자신을 비난하고 야유하고 조롱하고 독한 말을 쏟아내는 이들을 참아내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의 영웅들과 동일하게 12장의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참아내실 수 있었던 비밀도 믿음이었음을 보여준다. 11장의 영웅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살았듯이, 예수도님도 "앞에 있는 즐거움"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승리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 즉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완주하신 분으로 설명한다. 그분도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잘 끝마치셨다.

현재만 바라보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이럴 때 일 수록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아야 하고, 우리 경주의 목표가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현재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눈이며, 영혼의 등불이 된다. 이 등불이 꺼지면 우리는 무너지는 것이다.

8/10/13

실패로의 부르심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40절)

히11장에는 두 종류의 믿음의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것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33-34절)

둘째는 믿음이 있었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5-37절)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데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결과들을 보고 어떤 이들은 약속된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삶은 고문과 채찍과 조롱과 결박으로 마감한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세상적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공적이지 못한" 목회자가 있을 수 있다. 동일하게 믿음으로 살지만 어떤 이들은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믿음의 양심 때문에 사업에 실패할 수가 있다.

우리는 어떤 "결과"가 있어야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성공적 목회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듯이 실패한 목회가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될 수도 있다. 그 실패가 우리의 게으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실패의 목회지에 가라는 부름에 순종에 기인한 것이라면 말이다.

이사야 6장의 이사야의 소명의 장면에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시는 곳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 곳이라 하신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실패로의 부르심"이라 불렀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런 부르심을 하시는지 그 주권적인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응한 실패는 영광스러운 실패다. 아니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고 소위 자신의 길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실패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 때문에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고난과 채찍을 피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모두가 성공을 좆아가는데 믿음 때문에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가는 이들은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가 없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이 세상의 그릇은 너무 작은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는 수용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결과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과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믿음이다. 그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믿음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 비록 이 땅의 교회에서 이들이 간증자로 세움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 도달했을 때 가장 높은 시상대에 오를지 모른다.

8/09/13

내려놓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11:24)

믿음은 때로 특권을 내려놓고 고난의 길을 걷게한다.  모세는 파라오 공주의 아들됨의 특권을 내려놓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 때문에 결혼과 섬김의 댓가로 받는 보수를 내려놓았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계속적인 자기 비움의 길인지 모른다. 자신이 잡을 수 있는 기회와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여생과 경제적 안정 등을 내려놓고 부요한 자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케 되신 예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다. 애굽의 재화보다 그리스도를 더 소중하게 여길 때 내려놓음도 고난도 기꺼이 선택할 수있게된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는 우리의 말이나 글에 아닌 우리의 선택이 증명한다. 모세의 내려놓음의 선택은 그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최고의 가치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할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8/07/13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13절을 좀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 사람들이 죽을 때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죽을 때에 믿음을 지켰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멀리서 보고 환영해야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급하게 하나님을 몰아칠 때가 많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바가 우리 때에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명이 되기나 하는 것처럼 반드시 우리 눈으로 믿음의 어떤 결과를 보고 싶어한다. 믿음 뿐이랴? 목회사역이든, 선교사역이든 내 당대에 어떤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들이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저 믿음으로 멀리서만 보고 환영해야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퍼즐 조각 하나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요셉의 생애 자체는 위대하고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주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보존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출애굽을 보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고 애굽 땅에서 묻혔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경우 아들을 낳게되리라는 약속은 성취되었지만, 그 후손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멀리서 보고 환영했을 뿐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꿈꾼다. 그러나 그 약속이 모두 내 생애 속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그 시간대에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뒤로 물러나기 쉽다. 약속이 허상인 것 처럼 실망할 수 있다. 우리가 꿈꾸고 소망했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가 있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느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역할이 멀리서 보고 환영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한다. 멀리서만 보고 기뻐하는 것도 믿음이다. 내 손에 무엇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소망을 놓지 않는 것도 강력한 믿음이다.

8/05/13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에녹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묘사되는데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번역되었고 히브리서 기자는 70인역을 따른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그를 기쁘게 함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것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며, 이를 가장 기뻐하신다. 에녹의 삶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과만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삶 자체를 높히 평가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여겨주셨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단순한 친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6절에서 에녹의 삶을 풀어쓰면서 그가 "하나님을 찾는 자"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하나님을 찾음은 "간절히 찾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약속하신다.

창세기에서 에녹의 시대는 걷잡을 수 없는 부패와 타락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절정이 그의 손자 노아의 때였고 하나님은 결국 홍수로 심판하신다. 그런 시대 속에서 에녹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 그는 그 시대의 흥미거리와 물질이 아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이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믿음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핍박을 당하면서 배교하는 하는 속출하자 히브리서 10장에서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잡고 인내할 것을 호소한다. 거기서 인내와 믿음을 동일시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살았던 이들의 실례들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어떤 이들의 눈에는 인생낭비로 비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상주실 것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