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1

멈춤의 훈련

출14:10-14에서 가만히 있는 멈춤도 신앙의 훈련임을 상기하게 된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두려움을 접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다 노출한다. 아우성이 일어나고 모세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출애굽의 행군을 후회한다. 두려움을 느낄 때 사람들은 인간적인 혈기와 모습들을 다 터뜨린다.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멈춤" 신호 앞에 서야 한다. 우리의 말을 멈추고, 우리의 판단을 멈추고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이 이 일들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 주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멈춤이 있어야 올바른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우리의 말도 멈추어야할 때가 있고, 글도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가능하면 주말이면 페북이나 모든 NETWORKIN을 금식하려고 한다. 더 중요한 분과의 Networking을 위해서.

2/26/11

한 송이 꽃의 여유

오늘은 교우 한분의 사업장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교우와 함께 심방을 다녀왔다. 나오는 길에 노란 꽃 한송이를 들고 온 한 호주 여자 한분을 만났다. 건너편 사무실에 있는 이 였는데 어제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꽃 한송이를 내밀었다. 평소에 그렇게 안면이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한 송이 꽃에서 주변을 돌아보는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2/25/11

돌아가는 길도 사랑의 길

출13:17-22의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때문에 때로 가까운 길이 아닌 먼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가까운 블레셋 길이 아닌 홍해의 광야길로 "백성들을 돌려" 인도하셨다(18절). 이들은 아직 전쟁에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블레셋 길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해야만 했다. 물론 후에 이스라엘은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다만 이 때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가까운 길도 멀리 인도하실 수 있다. 이것 또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가끔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 "돌아 가는 길"로만 느껴질 때 슬며시 원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분의 사랑임을 다시금 깨닫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2/24/11

아빕월에

출13:1-16의 오늘의 QT말씀에서 유월절이 아빕월에 있는 절기임이 부각되었다. 후대에는 니산월로 알려졌지만, 초기에는 아빕월로 불려졌다. 텔아비브도 아빕이라는 말에서 나왔듯이 "보리"라는 뜻이다. 즉 보리익는 계절이다.

유월절, 무교절을 비롯하여 성경 절기들은 유목생활을 마치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아빕월에 있었던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은 보리추수와 연관있고, 이때부터 50일 후에 있었던 오순절(맥추절)은 밀추수, 그리고 유대달력 7월에 있었던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은 각종 여름실과를 비롯한 모든 추수의 감사절기로 드려지기도 했다.

절기는 출애급이나 광야생활 등과 연관된 영적인 의미를 기억하고 동시에 새롭게 시작되는 농사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를 절기이기도 했다. 우리의 예배는 영적인 제사인 동시에 우리의 현실적 필요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무릎꿇는 의존의 예배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막안의 금촛대, 떡상, 금향로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과 달리 미쉬나에서는 금촛대는 영적인 축복을, 떡상은 물질적인 축복을 아울어서 금향로에 피워지는 유향으로 하나님께 기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우리의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인 동시에 우리의 일상사를 주께 겸손히 의뢰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고 동시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2/22/11

축복의 자리

출12:29-36은 드디어 열번째 재앙이 애굽에 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애굽의 모든 백성들 뿐아니라 가축들에게도 재앙이 임했다. 그런데 그 가축들은 애굽인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처음 것들이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그 주인에게 속했기 때문에 죽임을 면했다. 가축들의 허물 때문이 아니었다.

축복의 있고 없음은 꼭 개인의 윤리성이나 신앙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 크게는 어느 공동체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애굽인들은 바로에게 속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애굽인 중에는 개인적 의가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나 그 가축들이 저주받는 것은 그들이 축복의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개인적 의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따를 동안에는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과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정도로 가축이 많아졌다. 그가 축복받은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축복의 자리에 있었기에 덩달아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디가 축복의 자리일까? 시편1편은 두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죄를 멀리하는 곳, 둘째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곳이다. 누군가 죄를 멀리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이가 있다면 그와 가까이 하라.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실 때 여러분도 덩달아 축복하시리라. 어딘가 잘되는것 같은데 내막에 부정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곳을 변화시키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라. 외형상의 잘됨이 하나님의 축복의 싸인은 아니다. 애굽인들은 외형상 화려했던 이집트 왕조의 백성임에 자부심 느꼈을지 모르지만, 축복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이었다. 애굽의 가축은 축복의 자리에 있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소명은 누군가에게 축복의 자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이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도록 우리가 축복의 근원이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의 신앙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이기를 기도하자

2/18/11

믿음은 인내다

출11장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인도할 것을 도전하신다. 드디어 출애굽이 현실화되었다. 그간 계속되는 애굽 재앙이 있어 출애굽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언제 출애굽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드디어 이 마지막 재앙을 끝으로 기다리던 출애굽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고 기도하던 어떤 일들이 될 듯 보이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상황들에서 우리는 때로 낙심하기도 하고 상심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재앙을 통해 출애굽을 기대했다가 바로의 완강한 버팀으로 낙심한 이들도 많았을지 모른다. 기도하던 기도제목이나 기다리던 부흥의 역사가 아직 응답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10장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히브리서가 말하고 싶은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없이는 되지 않는다.

2/17/11

바로는 바로 나

출10:21-29의 바로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된다. 9번째 재앙은 바로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나 그는 끝까지 완고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된다.

바로가 끝까지 완고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이 우리 내면의 하나님에 굴복하기 싫어하는 성향이 끈질기게 살아있음을 본다.

바로가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던 것 같이, 내가 변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 사람이 변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임을 본다. 요즘은 감동코드다. 유투브에 페이스북에 트위터에 얼마나 감동적인 영상물과 이야기들과 문구들이 난무하는가? 그러나 그 많은 감동을 경험하면서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실 때 온다. 사람들을 섬기면서 점점 주님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바로가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겸허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듯 하다가도 계속 우리 자신을 추구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듯 내 안의 옛성향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바꿀 수 없다. 성령님만이 나를 바꿀 수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2/16/11

더 크신 하나님

출10:12-20에서 크신 하나님을 만난다. 역시 하나님의 스케일은 컸다. 애굽의 온 땅을 메뚜기로 가득채우시되 사막의 열사 바람인 동풍을 동원하시기도 하셨고, 지중해의 시원한 서풍을 동원하시기도 하셨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우리 규모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믿음은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형상들을 지속적으로 깨뜨리고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과정인 것 같다.

2/15/11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출애굽기 10:1-11에서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것을 묵상한다. 계속되는 재앙에도 바로는 끝까지 고집피우며, 타협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전면적으로 거부하다가 점차 출애굽을 허용하는데까지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나 계속 타협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 했다가(8:25),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들은 남고 "장정들'만 가라고 한다(11절). 나중에는 "가축"들은 남기고 가라고 한다(24절).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 아닐까? 사단은 우리가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도록 한다. 때로는 전면적으로 불순종하도록 유혹하지만, 더 많은 경우는 오히려 순종하되 부분적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순종한다는 거짓 안도감을 준다. 그런데 부분적인 순종도 불순종이다.

사울왕은 아말렉 전쟁에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대부분 순종했는데, 다만 왕과 아말렉의 가축떼는 남겨두었다. 그래서 사물엘은 그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오늘 내 삶을 살펴 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영역은 무엇인지 살펴야겠다.

2/14/11

모세의 충성, 나의 충성

출9:13-3을 보면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을 보일 때에도 충성스럽게 메세지를 전해야 함을 깨닫는다. 모세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재앙의 메세지이고 바로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메세지였다. 바로는 그 메세지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미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메세지를 다시 전하라고 하신다.

메세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사람들의 반응이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다. 바로의 완강함으로 모세의 사역을 평가할 수 없다. 이미 완강히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 바로에게 또 다시 가서 비슷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움이 오히려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요소이다.

모세는 단번에 바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실패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충성스러웠다.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을 예상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했다. 솔직히 사역이 결과에 의연하지 못한 내 모습을 본다. 모세의자세, 오늘 내가 배워야할 대목이 아닐까?

2/11/11

애굽의 재앙보다 더 큰 기적

출9:1-7을 보면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바로는 많은 재앙을 보았으나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오늘의 재앙은 가축의 재앙이었다. 모든 가축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죽지 않았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어 이것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확인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본격적인 복음의 논의를 다루는 로마서에서 이 완고함을 다루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죄인됨을 분명히 고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을 다루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바로시대, 바울시대 그리고 우리 시대에 인간의 근본적 성향을 바뀐 것 같지 않다. 이런 성향을 가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애굽의 재앙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처럼 여겨진다.

2/10/11

너무 멀리 가지는 마라

출애굽기 8:25-32에서 끝까지 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바로는 모세에게 제사를 드리되 "이땅에서" 제사드리라 하고, 불가함을 말하는 모세에게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사단이 종종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좋고 신앙도 좋고 헌신도 좋은데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한다.

너무 멀리가지 말라고 속삭이는 내 안의 소리는 무엇일까?

2/08/11

내려놓음

출8:1-15에서 내 안의 완고함을 깨뜨려야 함을 말씀하신다. 바로는 재앙이 시작되고 나서야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강하던 바로가 재앙이 시작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백성을 보낼 것을 동의하고 재앙의 중지를 요청한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 8:15)라고 되어있다. 좀 살만하니까 다시 완고해지는 바로를 볼 수 있다.

내 안에도 바로는 있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할 것을 끝까지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바로가 내안에 있다. 위기 앞에서 다 내려놓을 것 처럼 하다가 좀 살만하면 내려놓았던 것을 다시 웅켜잡는 내 모습이 있다. 하나님과 바로의 대결은 바로가 웅켜잡고 있던 이스라엘을 내려놓게 하시는 대결이었다. 바로는 끝까지 버텨본다. 내가 그렇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라 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 고백하다가도 순간 순간 내것이라고 다시 붙잡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10재앙으로 바로와 대결하신다. 하나님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내가 철저히 내려놓기까지 가기를 원하신다.

2/07/11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

출7:8-25에서 우리 정체성의 근거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시다. 모세가 본문에서 행한 기적은 애굽의 술사들도 같은 것들을 행하였다. 바로 보기에 모세의 차별성이 없었다.

때로 이런 차별성에서 우리 사역의 정체성을 찾으려할 때 종종 혼란에 빠진다. 골드코스트에서 교회를 시작하고 나서 정체성의 고민이 있었다. 새로 시작한 섬기는 교회가 다른 교회와 차별성이 업어 보였다. 차별성이 없다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도 해보았다.

모세의 경우 일정기간 그의 기적은 차별성이 없었다. 나중에 가서야 애굽의 술사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다.

우리 정체성과 사역의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차별성이 아니라 순종이 내 존재의 이유다. 20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고 되어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2/05/11

바로 대면하기

출6:28-7:7에서 믿음으로 대면해야할 것들을 묵상하게 하시다. 모세는 바로를 대면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이미 실패한 경험도 있다. 바로는 완고했다. 동족 이스라엘 마저도 모세를 비난하는 시점에 또 다시 바로를 대면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에게도 바로는 있다. 내키지 않지만 대면해야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분명하지만, 정작 대면하자니 용기가 필요한 것들이 있다. 더구다나 한번 실패했던 것들은 더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직장에서의 정직한 양심 문제로 상사나 주인을 대면해야할 수도 있고, 교회의 중직자들의 어떤 행동이 지속적으로 교우들에게 상처를 줄 때 대면해야 한다. 부부간에 솔직한 대화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정신과 의사 스캇 펙 박사는 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나서 결론이 그랳다. 이들이 정직하게 자기 문제와 대면하기만 했어도 자신을 만나러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대면의 용기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 앞에 서도록 계속 용기를 붇돋아주신다. 마틴 루터 킹은 인권운동을 하다가 몇번이고 좌절했다. 그의 비폭력 운동은 그에게는 수많은 몰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도 포기하고 싶어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용기를 얻고 다시 나가곤 했다.

바로 앞에 서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던 자가 바로 앞에서 설 수 있고, 바로를 대면하는 자가 출애굽의 주역이 될 수 있다.

2/04/11

모세의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출6:9-27의 모세의 족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위대하게 사용하실 뿐이다. 이 사실을 본문의 모세의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애굽의 과정을 기록하다가 출애굽의 저자 모세는 자신과 아론이 이 위대한 사역에 쓰임받게 된 것이 자신들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님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잠시 당시의 기록을 멈추고, 자신들의 족보얘기를 한다. 이 족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들이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혈통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야곱의 장자 지파인 르우벤 지파도 아니요 세번째 지파 레위에 속한 이들이었다. 레위의 자손들 중 첫번째도 아니요 두번째이다.

혹은 이들이 도덕적으로 탁월했기 때문도 아니다. 본문에 지파는 오직 르우벤, 시므온, 레위 지파만 언급된다. 이 지파들이 성경에서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창세기의 디나 사건 때이다. 디나가 가나안의 풍속을 구경나갔다가 겁탈당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세명의 야곱의 아들들은 그 족속의 남자들을 다 살륙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이들의 후예이다.
또 레위의 아들들중 이들은 두번째 고핫가문에 속한 이들인데, 나중에 고핫가문은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

모세가 족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들이 출애굽의 주역으로 쓰임받은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사실 성경의 인물기록의 관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 인물들의 위대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실책과 실수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담담히 기록한다. 아브라함의 치사함, 이삭의 우유부단함, 야곱의 간교함, 다윗의 성범죄 등등. 이것은 이들이 위대함이나 탁월함 때문에 쓰임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이런 실수와 실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 때문이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비록 자랑할만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있는 지금의 이 자리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2/03/11

I am & I will

출6:1-8에서 " I will..."을 반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가 되다. 6-8절에서 I will....이 무려 7회나 나온다. 내용을 보면 6절에서는 애굽에서 구출하겠다는 것이며, 7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내용이며, 8절에서는 약속의 정점인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시겠다는 내용이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다가 장벽에 부딪혀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겠다고 하시며 I will...을 반복하신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문구는 3절의 '여호와(야훼)'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그동안은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 "엘 샤다이")로는 나타났지만, '여호와'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실은 창세기 기사에서 여러번 여호와로 고백된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은 이삭번제사건시에 "여호와 이레"라 믿음을 고백했다. 다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은 미래형이었지만, 이제 모세시대에 하나님은 그 약속을 현실화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다 깊이 체험하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 뜻이 "I AM"이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8장에서 자신을 "I AM"으로 선언하셨다가 신성모독으로 돌맞을 뻔 하셨다. 오늘의 본문에서 "I AM"이신 하나님이시 "I WILL"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이들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이유는, 이들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이유는 그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시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기초한다. 나의 선행에 근거한 것도 아니요, 인간의 의에 기대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을 아신다. 사랑의 하나님에게 우리는 사랑의 행동을 기대한다.

바로의 장벽에 부딪혀 있던 모세에게 이 사실은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게는 나의 상황에 빚대어 생각할 때 큰 위로가 된다.

2/02/11

변화와 저항

출5:15-23에서 믿음의 도전에 대해 묵상한다. 모세는 결국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어떤 변화를 시도할 때 종종 "저항"을 경험한다.

처음에 동의하는 듯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모세의 시도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한가지 이유는 불편함 때문이다. 모세의 시도때문에 그들의 삶은 더 불편해졌다. 노역은 더 심해졌다. 사람들은 불편이 오기까지는 변화를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불편이 따르면 장기적으로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불편해진 사람들은 결국 모세를 원망하고 저주한다.

불편함 뿐 아니라 사람들은 갈등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동안 이들은 바로와 잘 지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다.그러나 모세로 인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분노했다. 갈등이 일어났다. 변화는 때로 인간관계의 갈등을 야기한다. 평온했던 가정에 누군가 예수님께 헌신하기 시작하면서 가족 안에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갈등이 두려워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저항이 일어난다.

복음을 위해 사는 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충성을 다하는 길이다. 주님은 '나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노라'고 하셨다. 사람들의 반응에 초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겠다.

2/01/11

상황 악화

출5:1-14은 우리가 순종의 길을 걷다보면 우리 처한 상황이 일시적으로는 더 악화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로를 대면하여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백성들을 보내게 해달라고 하자, 바로는 거절할 뿐 아니라, 감독들에게 백성들의 노역을 더 어렵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순종의 길이 악화의 길이 되는 경우에 우리는 믿음의 갈등과 시험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악화된 상황이 주는 메세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붙잡을 것인가?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