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11

영적 경각심을 가집시다

사사기 8:25-34 말씀은 영적 경각심을 갖게해준다. 기드온의 사역 시작은 아버지 집의 바알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부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그의 사역의 끝은 그가 만든 에봇이 우상숭배를 초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기드온이 우상숭배를 의도했던 것 같지 않다. 제사장이 입는 의복이었던 에봇을 만들었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던 시도로 보인다. 에봇의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비록 기드온이 우상숭배를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가 만든 에봇을 숭배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가 시작한 일을 우리가 허물어버릴 수 있다.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를 우리 스스로 깨버리는 경우들도 많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없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영적인 전투의 현장이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악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나쁜 것으로 변질시키는데 명수다. 우리의 열심이 율법주의가 십상이고, 우리의 동정심이 성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영적 교만으로 변질되는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사단 스스로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던 천사가 타락한 존재 아니었겠는가?

우리가 끝까지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아름답게 시작한 일을 우리 스스로 망쳐놓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 PD 수첩을 통해서 아름다운 사역을 해오셨던 분들이 금전적 관계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지 않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장을 시청했다. 그런데 이것은 얼마든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끝까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있지 않으면 사단은 그것을 사탄의 재료를 이용할 수 있다.

9/29/11

사람들은 왕을 찾는다

사사기8:18-23말씀은 우리의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전쟁승리 이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다스려 달라고 하였지만, 기드온은 고사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다스릴 것이라 맺음한다.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왕이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가시적인 존재가 그들의 왕이 되어주기를 구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보이는 인간의 통치 속에서 위안을 받는다. 물론 하나님이 왕들을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것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시스템이었다.

오늘의 삶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고 친히 말씀하시고 순간 순간 우리들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지만,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존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기를 원한다. 그래서 수많은 프로그램과 집회들을 통해서 영적 위안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그래도 보이는 시스템이 나아보이니까.

가끔 교민잡지들을 보면서 회의를 갖는다. 수많은 교회의 수많은 집회와 프로그램들, ooo학교, ooo 훈련.... 그 많은 광고들을 접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을 잘믿기 위해 이 모든 것이 정말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단순한 복음을 매우 복잡한 시스템으로 만들었고, 그 프로그램들과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 영적 위안을 받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그 수많은 미로들 때문에 하나님의 대로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비교적 큰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교회 내에 수많은 훈련과 좋은 목회자들과 교우들, 유익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자기가 그런 교회에 있다는 것이 자기가 그런 사람인 것 같은 안도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훌륭한 프로그램들 속에서 훌륭하지 못한 신앙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왕을 찾는다. 여호와를 찾기보다는 기드온을 찾는다.

물론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을 사용하셨고, 수많은 교회 공동체를 사용하셨고, 각종 훈련과 프로그램들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하실 것이다. 원래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하나님도 결국 왕을 세우셨고 어떤 왕들을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조직과 프로그램들, 유명 강사들, 집회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는 기드온의 말을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한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

9/28/11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

사사기 8:10-17에서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말로를 보여준다. 기드온 군사들에게 도움 주기를 거부했던 숙곳 사람들, 그리고 브누엘(다른 이름, 브니엘) 사람들은 결국 기드온에 의해 보복받는다. 이 사람들이 도움 주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드온의 군사들은 고작 300여명에 불과했고, 이 군사들이 이사람들 앞에 도달했을 때에는 지치고 지친 모습이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4절). 반면 미디안 군사들은 비록 지금은 쫒기고 있었지만, 남은 전력만 12,000명이었고, 본거지에 있었던 군사들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숙곳 사람들, 브니엘 사람들이 기드온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이해할만하다. 겉모습만 보면 기드온의 편을 들어주었다가는 나중에 큰 화를 당할 것이 계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승리한 기드온에 의해 이 사람들은 보복을 받게 된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낭패당하기 쉽상이다. 돌아가는 상황, 주변 사람들에 의해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군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인생의 진정한 축복은 결국 환경이 아닌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시편 1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주변 환경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인생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복되다 하셨다.

안전지대

사사기 8:10-17말씀을 보면 기드온에 쫒기던 미디안 군사들은 충분히 안전한 지대에 있다고 생각되던 그 지점에서 결국 기드온의 공격을 받고 결정적으로 패하게 된다. 성경은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11절)라고 말한다. 그들은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안전지대는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도 안전지대를 찾는다. 수많은 보험상품들은 현대인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다면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다. 하나님 앞에 서야할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안전지대를 찾고자 하지만 그런 곳은 없다. 누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는가?

시편 13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절)

하나님의 손은 너무나 길어서 하나님께 아무리 멀리 도망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잡으실 수 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피조물된 인간의 진정한 안전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길이다.

9/27/11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이 어찌 됨이냐?"

사사기 8:1-9에서 자기를 비우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된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에 민감하다. 에브라임은 오랜 숙원이었던 미디안 전투에 자기들이 처음부터 초청받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노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이 어찌 됨이냐?"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우리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떤 일에 참여하려하지 않는다. 상황을 뒤집어보면 사람들은 대접받을 때에만 어떤 일에 참여하려한다. 그리고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오늘의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노여워한다.

똑같은 상황을 예수님도 여러번 경험하셨다. 그리고 늘 섬김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다. "인자가 대접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대접하러 왔노니.."(막10:45). 대접받고자 하는 것은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받으려는 자세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하는 이들은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9/26/11

인간의 전술과 하나님의 도우심

사사기 7:16-25에서 사람의 전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기드온의 전투는 먼저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시고,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시고, 기드온의 병사의 숫자를 조정하시는 등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드온은 미디안 전투에서 나름대로 전술을 구사한다. 적은 수의 인원을 카버하기 위하여 세개의 부대로 나누어 신호에 따라 나팔과 항아리를 깨어 자신들의 숫적 열세를 카바하고 이 시점을 근무자 교대시간에 맞춘다. 나름 치밀하게 준비하여 전쟁에 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의 정황을 가끔 오해하는 듯 하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 하나님이 한가지 한가지 일일이 지시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드온이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시작했지만, 기드온도 나름 계획하고 전술을 짜고 타이밍을 조정하는 등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의 전술을 사용하시고 축복하셔서 300명으로 이길 수 없는 기적적 승리를 이루어냈다.

동시에 기억해야할바는 기드온이 아무리 계획하고 전략을 짜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으면 그 계획과 전략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충분치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기드온의 가진 숫자는 3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승리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가끔 또 다른 극단을 만나게 된다. 계획하고 토론하고 방법을 구사하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모습이 그것이다. 치밀하게 계획하되, 철저하게 기도로 하나님께 나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 균형잡힌 모습이다.

9/24/11

적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사사기 7:9-15에서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기드온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자, 하나님은 그를 적진으로 내려가게 하신다. 적진에서 들은 대화는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시고 싶어했던 말씀이었다. 기드온은 적진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내가 편안한 사람들 사이에만 두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적진으로 내려가게 하신다. 내게 껄끄러운 사람들, 편안하지 않은 사람들, 대하기가 힘든 사람들 사이에 내려가게 하신다. 그리고 그 적진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9/23/11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사사기 7:1-7말씀에서 우리가 가진 것으 적음을 통해 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갖추고 있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고지를 차지하고 있어야 큰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기드온의 경우를 보면 이 말이 꼭 맞지 않는다. 오히려 미디안 연합군에 비해 숫적 열세를 고민하고 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병사들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그리고 병사들을 줄이고 줄여서 고작 300명의 사람들만 남게 하신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적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큰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우리들의 입을 막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네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다고 하나님의 능력에 무엇인가를 보탤 수도 없고, 가진 것이 적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적은 300명으로 큰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님, 우리의 적음을 통해서 오히려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자.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을 기대하자.

9/22/11

불편을 주는 자

삿6:32에서 예수 제자의 길은 Radical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기드온이 온건주의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그래서 바알의 제단을 허물거나 아세라 신상을 깨뜨리는 일 등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룹바알" 즉 '바알이 대적하는 자, 바알이 싸우는 자' 라는 별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을 조용하게만 믿었더라면,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란 별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면에서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자들이다. 사람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에 불편하고, 다르게 사업하기에 불편하고, 사람들과 다른 것들을 좋아하고, 다른 것들을 추구하기에 불편하고,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불편을 준다. 사람들은 불편하기에 그들의 불편함을 어떤 라벨로 처리하고자 한다. 불편을 주는 자들이었기에 "여룹바알" "그리스도인" "나사렛 이단"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등의 라벨을 우리 선배들은 받아왔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정말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자들일까?

9/20/11

하나님의 싸인 구하기

삿6:17-24에서 하나님의 싸인(sign,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을 만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을 때 그는 싸인을 구했고 나도 그것을 구하곤한다.

처음 뉴질랜드에 가게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지구촌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였는데 뉴질랜드 해밀턴에서 청빙이 있었다. 교민은 1500여명 되는 작은 소도시였고, 교우들은 얼마되지 않은 작은 교회였다. 담임목사님께 상담을 드렸는데 대번에 반대를 하셨다. 그런데 떨쳐버리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싸인을 구했다.

다음날 아침 경건의 시간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메시지여서 내게 익숙한 환경을 떠날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오후 당시 전도폭발사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모시고 지도자 임상훈련기간 중이었다. 한 목사님의 설교본문이 사도행전 8장이었다. 사마리아 부흥의 주역이었던 빌립을 성령이 부르시고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 하실 때, 빌립은 순종한다. 가게되는 지역의 교민과 교우들이 작기 때문에 주저하던 내게 빌립은 큰 도전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빌립보다 큰 목회지로 가게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기도하고 솔직한 제 생각을 말씀드렸다. "하나님, 그곳은 너무 작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마음 속에 들려오는 생각이 있었다. "큰 사역지에, 큰 교회에 갈 사람은 많다. 그런데 누군가는 작은 사역지를 자원해야하지 않는가?"

당시 차량을 구입하기 위해서 신청해 놓았는데, 자동차 회사의 분규로 차량이 몇달째 출고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뉴질랜드행을 결정하게 되고 차량은 전화상으로 간단히 취소할 수 있었다. 후일에 생각해 보니 그것도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다.

아주 오랫동안 정리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모든 것을 정리가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한가지 싸인으로 여겨졌다.

때때로 말씀을 접하는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인지, 아니면 내 주관적인 생각인지 분별이 가지 않을 때, 우리는 기드온처럼 결정을 위해 주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심하게 응답해 주신다.

9/19/11

우리의 불평과 하나님의 해결책

삿6:11-16에서 우리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듣는다. 기드온은 출애굽의 능력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이 왜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지 않는지 불평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너는 가서 너희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절).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 불평한다. 우리 주변의 고통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불평한다. 복음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태를 불평한다. 그러나 우리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우리 자신이다. "네가 가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들이다.

9/15/11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사사기5:10-18 말씀에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드보라 전투에 참여한 각 지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각 지파의 형편에 따라 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선봉에 섰던 스볼론과 납달리 지파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치하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드린 수고와 헌신을 기억해 주신다. 히브리서 6장 말씀은 우리가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긴 것을 기억해 주신다고 하신다.

반면 마땅한 헌신을 드리지 아니한 이들도 기억된다. 르우벤 지파는 "결심"만 하다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단지파, 아셀지파, 길르앗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자기들의 해변과 배를 떠나지 못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말하면서 "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0-21)고 치하한다.

오늘날도 같은 양상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기회, 경력, 재산까지 포기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많은 생각에 주저하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안전한 배와 해변을 떠나지 못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9/14/11

하나님을 바라보자

삿5:1-5의 드보라의 노래에서 대적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대로와 마을에 인적이 끊긴 사람들의 두려움, 애훼가 아닌 다른
신을 섬김으로 전쟁을 초래한 사람들의 죄인됨, 방패와 창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무기력을 본다. 오늘의 우리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죄인됨과 우리의 무기력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드보라는 하나님의 크심을 주목하고 있다. 광야를 지날 때에, 시내산에 있을 때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을
상기한다. 드보라는 이 크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믿음은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넘어서 크신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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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11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사사기4:11-24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된다. 사사기의 여걸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적장 시스라의 전투 장면에 한 구절, 모세 장인의후손 헤벨의 이주 기록을 삽입한다. 그런데 이것은 뚱딴지 같은 기록이 아니라, 나중에 시스라가 도주하며 머물게 되는 곳이 헤벨의 장막이었고, 거기서 그가 죽임당함으로 이스라엘 압제는 종결을 맞는다.

한 사람의 이주 가운데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본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여기 왜 있는가? 우리가 이 일을 해야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민할 때가 있다. 때때로 우리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싶다. 헤벨은 자기의 이주가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손길이었음을 피부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거기에 주의 뜻이 있었듯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 항상 하나님의 의도가 명확이 드러나지 않을 때, 그때에도 나의 삶에 개입해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길일 것이다.

9/10/11

지도자의 역할이란?

사사기 3:18-31말씀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모압의 통치아래있었다. 그러나 에훗이 일어나 모압왕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하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모압의 군대를 물리치고 80년의 평화시기가 찾아온다. 에훗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었던 것도 아니다. 이들에겐 이미 모압 군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다만 이것을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어서 오랫 동안 모압의 통치아래 있게 된 것이다.

지도자의 역할이 이것이 아닐까? 사람들에게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안내해주는 것, 우리는 이 완벽한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다. 베드로를 처음 보시자, 네가 장차 "게바"(반석, 베드로)라 불릴 것이라 하셨다. 예수는 평범한 어부에게서 초대교회를 이끌어갈 반석같은 존재를 보셨고, 그것을 이끌어내셨다.

9/09/11

사사기의 메아리

사사기 3:7-17에서 사사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사사기에는 반복되는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은 진노하사 다른 민족을 통해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고, 인간들은 고통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다시 구원자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구하시고, 사람들은 그 결과 평화를 누리다가 다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다시 하나님은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일으키시고.... 사사기의 역사는 반복되는 역사이고, 그 역사는 오늘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되는 역사에서 우리는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성경의 메세지를 듣는다.

첫째는 인간은 역시 죄인이라는 메아리를 듣는다. 그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했고, 범죄했을 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도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는 죄인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둘째는 하나님은 역시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메아리를 듣는다.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인간을 이방민족을 들어 징계하시면서도 그들이 부르짖기만 하면 여지없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해도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길을 마련해주시는 이 분은 바로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우리에겐 역시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메아리를 듣는다. 인간의 거듭된 실패와 타락 속에 하나님의 해결책은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것이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스토리를 통해서 메아리처럼 듣게되는 메세지는 "우리에겐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메세지이다. 그리고 성경의 메아리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의 메세지라 믿는다.

철저하게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소망은 오직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9/08/11

하나님이 그들을 남겨두신 이유

사사기2:20-3:6에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완의 숙제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테스트임을 보여주신다.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여러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순종하는지 여부를 말해주는 시험지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일부러 그들을 남겨두셨다고 하셨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문제들이 있다. 가나안을 약속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기도응답과 하나님의 능력을 약속하셨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가나안 땅에도 남아있는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내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보여주는 시험들이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제가 경제적 궁핍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기회도 되지만, 물질에 올인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수도 있는 시험이다.

9/02/11

어른이 필요합니다.

사사기1:8-15에서 어른 갈렙을 만난다. 광야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중에서 이제 여호수아는 죽고, 갈렙만 남았다. 이쯤 갈렙의 나이는 상당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가나안 정복에 제 일선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그를 만난다. 이스라엘의 전설적 영웅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제2선에 머물러 있어도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그러나 40년전 정탐꾼 시절에도 믿음의 사람이었듯이, 이제 노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믿음의 사람, 믿음의 어른으로 남았다.

우리에게 어른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믿음을 어디서 배우는가? 말씀을 통해서 배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의 믿음의 어른들을 통해서 배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믿음의 후배들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된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어른들이 필요하다. 아니 내가 그런 믿음의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하다.

9/01/11

짐은 나눠져야 한다

삿7:1-7말씀에서 우리는 인생의 짐은 나눠져야함을 배운다. 유다지파가 가나안 개척의 선봉장으로 서게되었을 때 그들은 시므온 지파와 짐을 나눠졌다. 유다지파에게 허락하신 땅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이었다. 하나님이 때때로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주신다. 그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로 말미암아 이웃을 만나고 이웃의 도움을 받으며, 이웃과 함께 짐을 나눠지며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자는 교육을 받으며 살았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의존적인 사람, 혹은 능력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남에게 내 힘든 것을 보이지 않고 나누지 않는다. 스스로 사람들에게 문을 꼭꼭 닫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공동체적 삶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공동체적 삼의 시작은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자세보다는 나의 짐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