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11

빌립에게 배우고 싶은 순종

사도행전 8:26-40 말씀에서 항상 순종에 대한 도전을 받으며, 이 말씀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앞둘 때 항상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빌립에게 배우는 순종의 첫번째는 내려놓음이다. 사마리아 부흥은 빌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은 크게 쓰임받았다. 그런데 주의 영은 그를 갑자기 광야로 인도하셨다. 순종은 내 성공적인 사역까지도 내려놓는 것이다.

그에게 배우는 순종의 두번째는 광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이 인도하신 땅은 광야의 땅이었고, 사역지로서는 매력없는 땅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 부르신다. 인도받은 곳에서 사역의 결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는 사마리아 부흥이 재현되지도 않고 다만 한 사람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광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한가지 그에게 배우는 것은 순종은 빈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39절 말씀은 "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고 되어있다. 한 사람을 결실했는데, 그것도 길 위에서 잠시,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사역의 결실이 보존된 것도 아니고 "이는 내 제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빈손이 되었다. 성령은 때때로 우리를 빈손의 자리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우리를 곤혹스럽게도 하고, 현재 사역에 회의를 갖게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걸어야 할 순종의 자리다.

약 8년전에 뉴질랜드 해밀턴의 사역제의를 받았을 때, 그곳은 교민이 아주 작은 지역이었다. 그때 이 말씀은 내게 도전이 되었다. 빌립을 흉내내듯 옮긴 발걸음에서 준비된 영혼들을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께 쓰임받음에 그저 감사했다. 또 다시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지금의 자리로 인도하셨다. 여전히 지금의 내 기도제목은 본문의 발견한 두가지 기도제목이다.

하나님, 이디오피아 내시 같이 말씀에 갈급하고 사모하는 영혼, 한 사람이라도 좋사오니 만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빌립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던 것 같이 끝까지 예수만 전하게 하소서.

5/27/11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스데반은 순교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다. 예수님은 줄곳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으로만 설명하고,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의 차원에서 구약 대제사장의 미완성적 사역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유독 이곳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다. 예수님도 자기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그의 종의 죽음을 앉아서 맞이할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스데반의 충성은 하늘 보좌의 예수님을 벌떡 일어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고난의 현장에서 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이기지 못할 고난은 없을 것이다. 필립 얀시의 책 제목처럼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라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현장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5/26/11

신앙의 구호에 속지 맙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7:48)


가끔은 우리가 쏟아내는 신앙의 구호들에 우리가 속을 때가 있다. 스데반 시대의 종교인들의 구호는 모세, 성전, 율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로, 성전과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구호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 스데반은 그 점을 지적했다. 모세의 제자라 자처하면서도 그동안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가르침에 상반된 생활을 했고, 성전을 신성시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제한하는 점도 지적했다. 진실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성전이 성전이 아니다. 예레미야도 성전앞에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여호와의 성전이다 여호와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설교했었다(렘7:4).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예배는 헛걸음에 불과하다. 이사야는 "너희는 내 마당만 밟은 뿐이니라"(사1:12)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우리들도 우리들이 거창하게 내거는 구호들에 스스로 속을 수 있다. 복음적인 교회, 제자훈련, 선교, 사회봉사, 세계비전, 부흥, 성경적 공동체,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우리가 바로 그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이런 거창한 구호들이 있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은 이와 너무나 동떨어질 때가 많다.

최근 한국에서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모교회에서 교세와 교우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공공도로를 점유하며 교회를 짓고 있어 양심있는 한국교우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건축의 구호는 너무나 요란스럽기만 하다.

5/25/11

메시아 증후군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행7:25)

모세가 가진 생각은 일종의 메시아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자기가 가면 해결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지역의 교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그곳에 가면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은 숨어있는 교만이요 일종의 메시아 증후군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교정하신다.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게 하고 오랜 광야의 시간을 보내게 한다. 나중에 다시 만나는 모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한다. 하나님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주신감?" 주님을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쓰신다. 그렇게 쓰시기 위해서 때로 우리를 실패의 터널에, 거절의 자리에, 그리고 광야의 메마름에 방치하듯 두신다.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사역했던 시간은 모세가 보낸 광야의 시간과 같다. 우리가 다스림받는 시간만큼 쓰임받는 것일까?

5/24/11

그들이 거기 있었던 이유,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행7:15)

요셉이 애굽으로 가게된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흐름을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일환이었다.그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된 것, 그리하여 야곱의 온 가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한 기초석이었다.

오늘 우리가 여기 이 자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한 자리이다. 물론 요셉의 형들이 처음 애굽에 간 것은 빵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시는 방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름의 이유로 이민이나 유학을 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이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임을 믿는다.

야곱의 가족은 구속의 섭리를 다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쓰임받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거기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과로 우리 삶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야곱가족에게 들어맞지 않는다. 성과로 보자면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에 우리는 큰 배역을 맡을 수도 있고 작은 배역을 맡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배역의 경중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에 내가 쓰임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무대이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각 사람의 삶의 자리를 배치하시며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이 자리는 하나님의 무대 속에 있는 한 자리이다.

5/23/11

스데반을 기대하며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행6:8)

행6장이하에 스데반 집사의 활동상이 나온다. 스데반은 사도들을 비롯한 1세대 인물이 아닌 제2세대 일꾼들이다. 생명력있는 교회는 다음세대의 일꾼을 배출한다. 스데반이 오늘날과 같은 시스템화된 제자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스데반은 교회에서 무엇인가 보았다. 그가 본 것이 무엇일까?

그는 오순절 강림전부터 시작된 온 교회가 하나되어 드리던 기도를 보았고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 오순절의 놀라운 성령체험의 역사를 보았다. 기도는 실재였다. 스데반은 그것을 보았다. 또한 때로 옥에 갇히기도 하고 공회 앞에 재판받기도 하고 매질당하기도 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던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다. 다음 세대의 일꾼들은 지금세대의 일꾼들을 보면서 배운다. 스데반은 그냥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스데반이 있는가? 아니 우리는 스데반이 있게 하는가?

5/22/11

나의 유일한 청중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

오스 기니스는 우리의 유일한 청중은 하나님 한분이라 했다. 우리 인생무대는 그분을 위한 것이다. 그분만이 나를 평가하실 수 있고, 그분의 평가만이 내게 중요하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날, "코람데오"의 고백으로 주앞에 서는 하루가 되기를...

5/20/11

점점 왕성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행6:7)

이들에게 위기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외적인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도무지 전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들은 고난을 무룹쓰고 복음전도의 사명를 다하였다.

둘째, 교회 내의 도덕적인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은 부정직한 방법으로 교회 내에서 인기를 얻으려 했던 사건이다. 교회는 수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늘 직면해 있다 . 왜냐하면 교회 안에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 앞에 무너지는 교회, 목회자들이 너무 많다.

셋째 행정적인 문제를 해소했다. 사역이 과도하게 사도들에게 치중되어 있었다. 결국 교회의 사역이 원할히 돌아가지 않고 문제들이 야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했다. 사역을 분담할 사람들을 세움으로 그들이 본연에 충실해야하는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자 교회가 점점 왕성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19/11

가말리엘의 지혜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행5:38-39)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시기했고, 이들을 없애려 했지만, 가말리엘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에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 난 것이 아니면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누구도 이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가말리엘에게 배울 지혜가 있다. 첫째는 사람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새로운 일에 대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은 바울의 스승으로서 정통 바리새인요 율법학자이었지만, 사도들의 행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 배제하지 않았다. 지혜는 열린 마음이다.

안전한 항구와 소원의 항구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행 5:19)

기적은 위기 속에서 나타난다.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전도를 금한 당국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면 감옥에 갖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기적체험이 부족한 것은 우리가 너무 안전한 지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안전한 항구에 정박한 배는 풍랑을 만날 위험은 없다. 그러나 풍랑 속에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없다(시107:30)

5/16/11

학위와 기독교 전도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4:13)

그들은 새로 나타난 신흥종교를 학문적으로 검증해 보기 원했다. 그래서 최고의 학자 가말리엘까지 대기시켰다. 그러나 소환된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적으로 논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딜렘마는 이 학문없는(unschooled)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데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들을 오히려 닮은 듯 하다. 목회자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그의 학위인 것 처럼, 목회자 초빙의 내부조건을 아예 "박사"로 한정하는 교회도 꽤 있다. 목회자들도 학위를 갖추기 위해서 심지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 혹은 매우 쉬운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의 이런 심리를 장사속으로 이용하는 해외 신학교들도 많이 있다. 물론 학위는 거기에 걸맞는 연구와 노력과 성과가 있을 때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학위가 능력이 되지는 못한다.

본문에서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제대로 보았다. 목회자의 능력은 예수와 함께 있는 시간이다. 교회의 힘은 예수의 임재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혹은 삶의 일상에서 예수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하는 것이 우리 힘의 원천이다. 우리에게 그분과 동행하는 시간은 삼손의 머리카락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밀리워지면 세상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이들이 되는 것이다.

5/10/11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행2:42-47은 최초의 신자들이 형성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전에 교회모임을 본적도 가져본적도, 그리고 교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이들이 최초로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모든 시대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한 몇가지 기도제목을 발견한다.

42절. 교우들에게 자발적인 열심과 헌신된 마음을 주소서. 베드로의 설교로 교회원이 된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이일에 헌신하게 된다. 물론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감동하신 결과이며, 이런 모습이 우리 교회에 있도록 기도해야한다.

43절.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일 나타나게 하소서. 교회를 통해서 기적 등의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이 나타났다. 교회를 통해서 기도응답의 기적, 교우들의 삶의 변화의 간증, 그리고 성령의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한다.

44-46절. 교회가 참 가족된 교제를 이루게 하소서. 처음 교회를 형성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해외 각처에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이었지만, 처음 교회들은 서로의 필요를 위해 기꺼이 가족적인 사랑을 보여주며, 서로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47절. 교회가 세상에서 칭송받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가 됨으로 사람들이 찾고싶은 교회가 되게 하소서.

5/05/11

바른 신앙 잘못된 기대

내가 그러하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늘 깨우침에 느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이번만은 베드로가 대답을 잘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계획을 말씀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책망하기까지하며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를 물러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바른 신앙을 가졌지만, 여전히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메시아를 믿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 잘못된 기대를 나도 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날 예수님이 목회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교계에서 주목받는 목회자? 청년집회의 강사? 대형교회 목사? 아니면 시골교회 목회자? 도시의 작은 개척교회 목사? 어느 한쪽에 무조건 박수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기대는, 아니 목회자인 나의 기대는 화려한 목회만을 꿈꾸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메시아는 사람들이 교회부흥에 실패한 목회자의 얼굴 속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이 실패라고 불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