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12

교회 연합의 기초


교회 연합의 기초

바울은 로마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기초 위에 세워지기를 원했다. 그 기초는 말할 것도 없이 복음이었다. 그런데 왜 교회 공동체는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는가?

한가지 이유는 복음의 기초가 아니면 교회는 진정한 연합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수많은 다양성을 지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형제로 자매로 부르는 공동체이다. 이런 차이점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방해하곤 한다. 로마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온전히 연합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이 거론하는 것이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은 죄인이요 심판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1장부터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거론한 후에 로마서 3장에서 내리는 바울은 결론은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3: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3: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교인들이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 접점은 바로 여기이다. 나도 죄인이고 상대방도 죄인이고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며 만나는 것이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나은 것도 없고(9절) 다른 것도 없고(24절)  자랑할 것도 없는(27절) 존재들이다.

그래서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기초는 서로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정이든 교회든 자신의 죄를 깊히 인정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진다. 사람들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고 자랑하는 바에 의해서 위축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낱 죄인들에 불과하기에...

10/29/12

상징과 이미지



신앙은 어떤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나 세례/침례, 주의 만찬 등은 보다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상징들이다. 할례는 유대인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상징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상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들이 퇴색되는 경향이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최초의 일은 할례를 시행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그런데 로마서 2장에서 할례의 의미가 퇴색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받은 백성인 것을 자랑하지만, 실상은 전혀 하나님을 믿는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25-29절). 그들에게는 상징만 남았다.  이런 경우 상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상징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 중에 한가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다. 바리새인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에게는 '위선적 이미지'가 떠오르겠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경건한 이미지'였던 것 같다. 그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과 안식일 준수 등에 있어서 일반 신도들보다 엄격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문제는 그들의 이미지와 삶이 별개 였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이미지를 위해서 회당에서 오래 기도하고 자주 금식하고 구제에 힘썼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그들은 위선자라고 했다.


자칫하면 우리는 신앙의 내용 보다 그 상징에만 집착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할례에 집착했지만, 유대인다운 삶을 잃어버렸다. 바리새인들은 경건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의와 신과 애를 잃어버렸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상징을 붙들고 있으면서 자신의 삶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맹목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2장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모순에는 눈감은채 그들의 상징물에 매달렸고 그것으로 만족해 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근사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갈채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와 상반될 수 있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맹목성의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본 훼퍼는 나찌 정권에 저항하다 순교한 믿음의 사람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이 "값싼 은혜"의 논리에 빠져 제자도를 잃어버렸다고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저술하고 있다. 당대에도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사님이시다.  그도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 라는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
남의 말의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방종과 사소한 굴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다 이별에도 지쳤다.... 이것이 내가 아닌가?"


어쩌면 본 훼퍼를 그 답게 만든 것은 죽는 그날까지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주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10/28/12

용기있는 지도자


빌 하이벨스는 오랜 그의 목회경험을 바탕으로 리더십에 대한 책을 썼다. 책명은 「리더십의 용기」였다. 그는 진정한 리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을 용기라 보았다. 용기란 말하기 어려울 때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2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용기를 볼 수 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교회요, 바울이 그 교회를 꼭 방문하고자 하였다:“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롬1:10-11).
 
로마교회는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설명하면서 유대인의 문제점을 용기있게 지적한다. 1장에서 이방인들을 지칭할 때에는 “그들”이라는 3인칭을 사용하지만, 2장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지적할 때는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한다. “너희가 많은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실제로 너희들은 율법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도둑질하고 간음질 하고 그러지 않느냐? 하나님이 너희들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고 있다”(롬2:17-23)
 
이것은 로마 방문을 앞둔 사람의 외교적 편지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의 관계가 복음에 기초한 관계가 되기를 소원했다. 교회가 사교적 모임의 장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용기가 있을 때 진정한 복음적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교인들은 이런 용기있는 메세지를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10/26/12

자랑의 심리학


자랑의 심리학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자랑하는 내용도 다양하다. 자식자랑, 돈 자랑, 배경자랑, 배우자 자랑, 학벌 자랑...... 그런데 신앙생활에 들어온 이후엔 내용만 바뀌고 여전히 사람들은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신앙경력을 자랑하고, 다니는 교회를 자랑하고, 받아온 제자훈련이나 성령체험, 혹은 사회봉사의 경험 등을 자랑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즉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는데서 영적인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내용만 바뀌었지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 땅을 살면서 자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른다. 자랑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거룩한 자랑도 있다.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로마서 1장 16절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자랑한다는 표현이라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자랑이 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로마서 1장의 죄의 목록에는 “자랑하는 자요”(롬1:30)가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자랑이 자기 의(義)로 변질되는 것은 죄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선물로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했다(8-9절). 이 경우는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를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 의이다.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7절, 23절). 이방인과 달리 자신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했다. 자랑이 우월감을 갖게 한다면 죄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 자랑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게 한다면 자랑거리가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정 만난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롬3:27)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가 어려운 한가지 이유는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0/25/12

거짓 안전

우리는 때때로 로마서 2장의 유대인들처럼 거짓된 안전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유대인들이 다음의 두가지 이유로 이방인과는 달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고 잘 알고 있다(12-24절)   (2) 우리는 할례 받은 언약백성이다(25-29절)

그러나 바울은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안전보장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들의 거짓  안전감에 대해서 거칠게 공격한다: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절)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절)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8절)

이들은 로마서 1장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의 죄를 거론하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할례받은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라고 말한다.

찰스 콜슨은 "억측의 죄"라는 말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거짓된 안전감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로마서 2장이 지적하는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우리가 종교적인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교회에서 세례 혹은 침례를 받고 교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회개한 이들에게는 회개의 열매가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듯,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10/24/12

기다림에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지 않은 일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다. 우리의 양심은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아니하실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제재도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서 2장은 이럴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한다.
 
1. 하나님의 제재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 것을 그분이 죄를 묵인하거나 그분이 그저 부드럽기만 하신 하나님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내 삶에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3절), 회개하지 않은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5절).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 그분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2. 하나님의 제재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다(4절).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바울이 이 표현을 다시 꺼내든 것은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불순종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참으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딤후 2:13)

3. 하나님의 기다리심에는 뜻이 있다. 우리의 “회개하게 하심”이다(4절).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4. 지금 그분의 제재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2장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들의 삶에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물음에 답해야할 때가 온다고 말하고 있다(6-10절).


10/22/12

영적 교만을 경계하라

영적 교만을 경계하라 로마서 2장은 영적인 교만의 여러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1. 이들은 쉽게 사람을 판단한다.   "판단하는 사람"이 이들의 호칭이다(1절). 영어에서 판단과 심판은 같은 단어다. 그 만큼 판단은 신중해야할 바지만 교만한 사람에겐 모든 사람이 판단거리다. 

2.  이들은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깊은 영적인 수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18절). 사실 이런 확신을 가진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일 수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도 그런 확신으로 그리했다.  바울이 이전에 교회를 핍박할 때도, 그렇게 했다.

 3. 이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자신이 맹인의 인도자, 어둠의 빛, 어리석은 자의 스승, 어린아이의 선생이라 생각한다(19-20절). 이들에겐 다른 이들은 맹인이요 어두움, 어리석은 자요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타인은 교제의 대상인 아닌 자신이 가르쳐야할 대상이다.

4.이들은 자신들의 신앙배경을 자랑한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함께 구성원이 되었다. 유대인 교인들은 자신들의 유대인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율법을 자랑하고 할례를 자랑했다(25-29절). 오늘날은 다른 형태로 교만한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 배경과 체험을 자랑한다.

 5.이들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자기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5절). 그러나 로마서 2장은 너희들의 삶을 돌아보라고 촉구한다. 교만한 사람글른 남들을 판단하고 혹은 가르치면서 자기들의 삶에는 모순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6. 이런 글을 싣고 있는 나도 교만?

10/20/12

거짓

로마서 1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거짓 것을 예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25절). 

우리 삶에는 거짓 약속을 주는 것들이 많다.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다가가지만 인간이 인간의 최종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돈이 우리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 줄 것 같지만, 이 땅의 어떤 물건도 인간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명예 혹은 어떤 자리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줄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올라선 이들은 곧 그 자리의 공허함을 느끼곤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은 결국 허상이요 거짓이다. 우리가 추구할 유일한 대상, 우리가 예배할 유일한 대상은 그분 한 분 뿐이다. 진젠돌프는 그의 야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He and He Alone"이라 대답했다. 

10/18/12

인간의 욕망과 생각

로마서 1장은 인간의 욕망과 사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준다.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 것, 그리고 무엇을 판단하고 사고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은총이다. 

인간은 그 욕망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수도 있고 또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다. 죄는 우리의 전인격을 오염시켰다. 정상적인 욕망("마음의 정욕" 24절= "sinful desire" NIV)을 병들게 하고, 생각("상실한 마음" 28절="버림받은 생각" 흠정역)을 오염켰다.

인간에게 통제되지 않는 자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인간 욕망과 지성의 타락됨이 드러나게 된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내어버려두셨다는 표현이 여러번 등장한다.  그런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인간은 어떤 모습이 되는가?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부끄러운 정욕"(26절)으로 자신을 욕되게 하고  인간의 "버림받은 생각"은  "합당치 않은 일"들을 행하면서 이를 합리화하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들을 옳다고 정당화한다(32절).   인간의 욕망과 사고는 죄에 오염되어 있고 끝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인간 내부에 설치된 시한폭탄이다.

사회적인 제도나 장치나 관습 등으로 인간의 욕망과 생각은 억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진면목이 아니다. 억제된 우리 모습을 보고 그것이 우리의 자아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우리의 진면목은 모든 것이 허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이다.

 로마서 1장에서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원만이 소망인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10/17/12

어리석음은...

어리석은은...

어리석음은 중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바꾸는 것이다. 로마서 1장에는 바꾼다(exchange)라는 말이 세번 나온다.  23절에  사람들은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의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고, 25절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26절에는 사람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다고 되어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소중한 것, 지켜야할 것을 하찮은 것들, 버려야할 것을 바꾼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그 밭에서 진주를 발견했을 때 자기 것들을  팔아 진주가 있는 밭을 사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소중한 것을 알아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찮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문제는 인간 내면의 죄는 소중히 지켜야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우리를 속이려 든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에 우리 시대의 우상을 경배하도록, 하나님의 진리를 붙드는 대신에 거짓 것들을 붙들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것들을 마귀적인 행복으로 바꾸도록 우리를 현혹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그의 절대 가치를 다른 어떤 것들과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상황에 따라서는 어리석게 보여도 C.T. 스터드가 말한대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붙들고, 없어질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우리가 꼭 지켜야할 절대가치들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희생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음은 아니다.

10/16/12

우리를 어둡게 하는 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무지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로마서 1장 에서 죄로 인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 졌다"(21절)고 하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라고 되어있다. 죄는 사람을 어둡게 하고 어리석게 한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질투와 교만과 편협함 등으로 마음이 어두어지면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바로 보이지 않고 상황이 왜곡되게 보여진다.    지혜는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마음은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는 인식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도덕적인 문제요, 영적인 문제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면 사물이 바로 보인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했다.  사물이 바로 보이고 하나님이 바로 보이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의 죄를 씻김받아야 한다.

10/13/12

그들과 우리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다른 사람과 다른 자신의 은사, 성격, 재능 등은 분명 나의 나됨을 보여주는 지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자녀교육의 모토는 "너는 특별해"가 된 듯하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독특하게 지으셨고, 모든 이들의 지문을 달리 만드셨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같은 것을 공유함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롬1:6) 자로서의 정체성, 이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롬1:7) 자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이다. 이것은 같은 유산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정체성이다. 나의 나됨은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공동성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자녀교육은 "너는 특별해" 뿐만 아니라 "너는 똑같애"도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이들이 있다. 모든 설교나 대화에서 다른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비판함으로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교회와 목회자와 자신은 다르는 점을 각인시킨다. 그래서 의식있는 목회자, 개념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들이 많고 그 길을 따르는 이들도 많다.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느헤미야의 기도(느1장)과 다니엘의 기도(단9장)에서 보여주듯이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모습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모습들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받고 "성도로 부르심 받은"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0/11/12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묵상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1. 하나님의 진노는 현재형이다. 바울시대에 진노하셨다면 우리 시대 우리 모습에 대해서도 진노하실 수 있다.

2.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인간의 죄인됨은 바울의 복음진술에 중대한 요소다. 바울은 로마서 3:20절까지 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음선포에 이 이야기를 생략하는 것은 중대한 부분을 빼놓는 것이요, 복음의 온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진노는 엄중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부터" 나타난다 하였다. 인간의 삶에 두려워해야할 것이 많지만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진노다. 이 땅의 두려움은 이 땅과 함께 사라지지만 하늘로부터 임하는 진노는 피할 길이 없고 그 결과는 영원하다.

4. 하나님의 진노는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모든"(all) 잘못된 것에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례함(불경건, 메세지역)과 잘못된 행위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5.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에 "나타난다"( being revealed). 나타난다는 말은 숨은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인간의 눈에 보여지지 않아서 그런 것은 없다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6. 하나님의 진노는 최후의 심판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 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매를 드실 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포기하시고 내어버려두시는 것은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다.

10/10/12

복음전도의 책임


바울 사도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복음전도의 책임을 느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내가 회복해야할 마음이다.

10/09/12

복음은...

로마서 1장은 복음에 대한 많은 보화가 숨겨있다.

1.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1절).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이 기쁨은 어떤 사람이나 물질이 줄 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이다.

2.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된 하나님의 복음이다(2절).  "복음은...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로 비로소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하신 것이다.

3.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약속된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2절).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4에서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난 것이라 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4.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6절).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선교적 복음이다.

5.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8절).  복음 자체에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있다. 복음에 인공적 가미를 하지 않아도 복음 자체의 능력을 신뢰했기에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6.우리가 이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인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절). 18절이하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고발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복음 외에는 없다.


7.복음은 죄인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게 해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7절). 이 복음은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회복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8.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 만일 의롭게 되는 길이 사람들의 행위나 공로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 받았다(1절).  우리의 삶의 이유, 부르심의 이유는 복음이다.

10/07/12

10/06/12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

레위 사람들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다: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그런데 오늘의 고백은 그 반대의 경우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9)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은 지금 신명기의 시점에서는 땅도 제대로 없는 볼품없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백성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

작고 미약한 그들이 세계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은혜였다. 그리고 동일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10/04/12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주는 축복

원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는 모압 땅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가기 위해 모압길을 진로로 정했을 때 다만 길만 지나갈 것이라고 진군을 요청핼지만 그땅의 시혼과 옥은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과의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예상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들의 약속의 땅의 그림엔 없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예상하지 않았던 땅을 얻게 되어 두지파 반이 그 땅을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축복도 있었다. 가나안 전투를 앞둔 그들에게 모압 땅 전투에서의 승리는 하나의 간증이었고 싸움에 용기를 주는 서건이었다. 모세도 이점을 들어 사람들을 격려한다.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신31:4).

 우리들에게도 예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축복인지 모른다

10/03/12

회복의 하나님

하나님은 잘못된 지점에서 마음을 돌이키는 자에게는 언제나 회복을 약속하신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신30:3).

불순종에 대해서는 엄중한 결과를 말씀하시지만, 뉘우치면 우리가 땅끝에 있다 하더라도 다시 축복이 땅으로 인도하시고 회복시켜주신다. 심지어 아합같은 인물이 뉘우치자 그에게도 긍휼을 베푸셨다.

10/02/12

쓴 뿌리

문맥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문맥을 떠난 성경이해는 그 해석이 은혜스러울 수 있으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성경의 정학한 뜻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야할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용되는 해석 가운데 한가지가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에 대한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적 치유가 강조되면서 단골로 사용되는 구절인데 이분들의 책자나 설교를 들어보면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를 내적인 상처와 동일시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문맥에서의 쓴뿌리는 공동체에 해로운 영향력을 줄 수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쓴 뿌리에 대한 경고 바로 앞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경고했고, 바로 뒤에서는 음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다음에는 한 그릇 팥죽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쓴 뿌리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쓴 뿌리는 익숙한 표현으로 모세의 신명기 언약에 나왔던 말입니다.
호렙 산에 이어 가나안이 보이는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언약식을 갖습니다(신명기 29:1-17). 이 언약식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었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독초와 쑥의 뿌리(쓴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신29:18)

보통 "쓴 뿌리"하면 우리는 나무의 뿌리로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의 뜻은 독초나 쓴 뿌리 나물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들이 퍼져 온 초장을 망쳐버리듯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 온 공동체가 우상숭배의 나라가 될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공동체에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와도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지만, 공동체에 해로운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호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