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1

하나님의 지팡이

출4:18-31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떠나는 모세를 만나다. 양치기 모세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했다. 이 지팡이가 뱀이 되기도 하고 홍해를 향해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지기도 했지만, 이 지팡이가 마술지팡이가 된 것은 아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의 호렙산에서의 소명을 보여주는 영적 상징에 불과했다. 이것들은 표지판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이 표지판이 목적지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이후 더이상 양치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 지팡이를 들고 다녔던 이유는 이 지팡이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시적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호렙산을 내려오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다른 것을 들려주지 않으셨다. 막대한 자금을 주신 것도 아니고, 80세의 노인인 모세에게 40대와 같은 젊음을 주신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지팡이를 의지해 내려왔다. 이것은 앞으로의 출애굽의 여정에서 모세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28/11

기적과 하나님의 나라

출4:1-9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려고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이 일을 모세를 통해 일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주저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염려스러웠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몇가지 기적을 보여주셨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란 관점에서 기술한다.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쫒아내시고 여러가지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메세지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확장되었다. 사도들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서 성령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존 윔버는 이 일을 "power evangelism"이라 불렀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교회 위에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당길 수 있는 어떤 공식 같은 것을 찾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사에서 아주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났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나는 시기를 우리는 부흥이라 불러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짐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앞에 충실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이 땅에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교회사는 종종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던 사람들에게 부어주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1/27/11

말씀과 현실

출3:16-22에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씀을 취할 것을 말씀하신다. 호렙산에서의 모세의 소명과정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의 여정을 보다 상세하게 지시하신다. 먼저 장로들을 만나 설득할 것. 바로를 만날 것. 바로는 그냥을 보내지 않고 재앙을 보고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나올 때에 애굽인들에게 은금과 의복을 취하게 될 것.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시의 모세에게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말씀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애굽의 10재앙이 익숙하지만, 처음 모세가 애굽의 재앙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현실감이 없었을 것이다. 또 출애굽 자체도 모세에게는 커다란 사건인데, 이에 더해 나올 때에 애굽인에게서 은금과 의복을 취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실현가능성이 없어보이는 말씀이었다. 나중에 이들의 은금은 성막을 짓는 재료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먼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들이지만, 당시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그림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현실감이 없는 공허한 말씀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한걸음씩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말씀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장로들과의 만남에서 장로들이 동의해주었고, 바로에게 10재앙이 내려졌고 그 후에야 이들을 내보냈고, 그리고 나올 때에 은금과 많은 것들을 취하게 되었다. 말씀은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도 그러하다. 지금은 전혀 현실감이 없어 보여도 이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고 한 걸음씩 움직여 나가면 언젠가 그 말씀의 구체적인 그림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25/11

정체성

출3:6-12에서 우리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나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났고, 이제는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렇게 40년을 보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셔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이다"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미디안에서 미디안인처럼 살아가는 모세에게는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왔을까?

모세는 그 조상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었다. 그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만나신다. 그리고 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 하신다.

그저 미디안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모세의 정체성은 '조상들의 하나님' 안에 있었다. 모세가 처한 환경이나 그가 하는 일이 그의 정체성이 아니었다. 우리의 환경과 하는 일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려는가가 우리 정체성의 뿌리다.

이것은 이민자들의 상황과 흡사하다. 많은 이들이 정체성의 혼란 속에 살아가고있다. 히브리인인지, 애굽인지, 미디안인지도 모를 헷갈림이 그들안에 내재해 있다. 왕년의 궁전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양치기 일에서 한숨짓는 이들도 있고, 어쨓든간에 그 양치기 일에서 의미를 발견해보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정체성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의 출발을 하게된다.

마치 독수리지만 닭장에 갖혀 닭인줄 알고 살아가다가 창공을 나는 독수리를 보면서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얘기처럼 하나님은 창공의 독수리처럼 나타나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신다.

1/24/11

떨기나무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출3:1-5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양치기가 된 모세가 초지를 찾아 시나이 반도의 호렙산까지 왔다. 매우 먼 거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거기서 불타지만 타지않는 떨기나무를 본다. 그래서 호렙산에 오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는데 있어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모두를 사용하셨다.

신앙의 자연성만 강조하는 이성주의적 신앙도, 초자연성만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신앙도 다른 한쪽을 잃어버릴 때 균형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사용하신다. 때로는 신비적인 방법도 사용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이나 일상의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 인생에도 떨기나무가 불타는 경험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기이한 이들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떨기나무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싸인일 수 있다. 그때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1/22/11

하나님의 행동의 시기

출2:16-25에서는 세개의 장면이 겹쳐진다. 첫째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탄식, 세째 당신의 백성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의 행동개시는 곧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세의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모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충분히 깨어질 때까지 기다리셨다.

때때로 하나님이 의아스러운 것은 우리 눈에 영적인 필요가 절실한데 하나님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이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더 급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확실히 사역을 서두르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역을 감당할 사람이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시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선호하신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으셨을 때에는 기다리신다.

무엇을 기다리셨을까? 모세가 철저히 깨어지기를 기다리셨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에 있게 했다.
요셉이 야곱을 비롯한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끌었을 때 고센 땅으로 인도한 이유는 목축하기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목축의 일을 애굽 사람이 '가증히' 여긴 이유도 있었다. 애굽의 왕자로 태어난 모세도 그렇게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왕자의 자리가 아니라 그 나라 사람이 혐오하는 그 일을 하게된다. 애굽에서 받았던 모든 교육과 지위와 특혜가 광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광야에서 모세는 깨어져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금의 훈련장에서 자기신뢰를 내려놓고 주님만 철저히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신다.

1/21/11

육신의 봉사자들

출2:11-15의 말씀을 통해서 육신으로 하는 봉사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민족을 위해서 선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한 뜻으로 시작한 것이 살인으로, 그리고 그를 도망자로 만들었다.

종종 선한 뜻으로 시작한 일들이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상처내고 선한 뜻을 가진 우리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까지도 발생한다. 즉 사람을 살리는 봉사가 아니라 죽이는 봉사가 된다.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숨막히게 하고 자유대신 속박을 주는 경우도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육신으로 하는 봉사가 있고 성령으로 하는 봉사가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육은 무익한 것이요 살리는 것이 영이라고 하셨다. 성령으로 하는 봉사는 사람을 살리지만, 육신의 봉사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육신의 봉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울은 자신이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다고 했다. 그의 열심은 율법에 대한 확신에 기초하였고,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주지 못했을 때에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배반자로 비쳐졌다. 열심이 그를 핍박자로 만들었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 처형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말씀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보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무기로 돌변하는 경우들이 많다. 말씀을 알되 성령의 비춤을 받지 못할 때, 그 말씀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들도 많았다.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으로 종종 예수와 그 제자들을 비난하곤 했었다.

육신의 봉사란 성령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겸허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보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과 아이디어를 따라 하게 될 때 우리는 육신의 봉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령은 우리의 아이디어 등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성령에 민감하게 귀기울이지 못하면 성령이 인도하시는 방향과 정반대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도 있고 나도 작은 목회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은 결정들이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깨뜨리시는 작업을 하신다.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모세의 모든 자신감이 깨지는 시간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들을 하나님이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를 깨뜨리시는 방망이로 이해했다. 우리의 육신은 깨어져야 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깨뜨리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들은 무엇인가?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서 사람들을 살리는 영혼의 치유자가 될 수 있다.

1/20/11

하나님의 섭리

,출2:1-10은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게 한다.

첫번째 섭리 :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보장되었던 목축업을 떠나 강제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그 노역의, 대부분이 건설 작업이었고 벽돌과 역청 바르는 일들이었다. 갑작스런 신분변화로 그들의 일은 눈물의 노역이었다. 마치 이민자들이 이민와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힘들어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운 역청 기술은 모세의 갈대상자에 쓰여졌다. 무의미해 보였던 일상의 일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둘째 섭리 : 나일 강가에 버려진 모세는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었고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된다. 세상에 우연한 만남은 없다. 모세와 공주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우리는 모든 만남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는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세번째 섭리 : 우리는 비록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이란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에도 모세의 출생과정부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본다. 마치 에스더서에 하나님이란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듯이....하나님의 섭리와 개입은 모세를 부르시는 80세의 나이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회심을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하나님은 그 이전부터 내 삶에 관여해오셨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나를 준비해 오셨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경험, 지식, 사건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 심지어 고통 스러운 경험까지도 사용하신다. ,,,,,,,

1/19/11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

출1:12-22의 말씀에서 우리의 영적 대적 사탄이 교회를 통한 새생명의 출생을 얼마나 싫어하고 방해하는지를 비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의 번성을 싫어한다. 교회의 힘은 건물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새생명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처럼 사탄은 교회를 통해서 영혼들의 거듭남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갖가지 방해작업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탄의 전술 하나는 혼미의 영을 불어넣는 것이다. 신앙적인 착각을 사람들에게 심는다. 인간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구원을 얻어낼 수 있다는 착각, 신앙적인 열심을 다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착각, 선행과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어넣어 교회생활이 곧 거듭남에 대한 보증으로 착각하게 한다.

또 한가지 사탄의 작업은 무관심이다.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과도한 염려, 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 가는 세상의 우상들... 이런 것들로 인해 영적인 무관심상태로 지내게 한다. 사역에 임하는 우리들도 다른 관심(?)들로 인해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음을 보게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보다 사탄이 영혼들의 상태에 더 관심을 가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안의 새생명의 역사가 가져오는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18/11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출1:1-11에서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었을 때, 자식이 없었던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현실감없는 얘기처럼 들려졌다. 기적적으로 100세의 나이에 이삭을 얻긴 했지만, 그의 생전에 후손이라곤 몇명 뿐이었고, 그나마 하나님은 이삭만 인정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애굽땅에 번성하여 그 땅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아브라함의 후예를 만나면서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후손들은 그 땅에서 고통과 신음의 나날을 보내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우리들도 '애굽의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지내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1/17/11

초기 교회들은 어떠했을까?

골4:12-18에서 초기교회의 여러가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초기 교회는 가정교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눔바라는 여인은 자기 집을 오픈하여 라오디게아 교회가, 빌레몬은 자기 집을 열어 골로새 교회가 태동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초기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교제 뿐 아니라 교회를 넘어선 교제도 활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편지를 회람하도록 했다. 에바브라는 어디에선가 복음을 듣고 골로새교회를 시작하여 말씀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인접해 있던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많이 애쓴 것 같다.

초기 교회는 교회에서 검증된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다. 에바브라가 로마의 바울을 만나기 위해 골로새를 떠난 사이 빌레몬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다. 아킵보는 이 직분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직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키고, '직분을 이루라'고 한다. 다른 번역에서는 이 직분에 충성하라고 되어있다. 교회의 지도자는 객관적인 검증들(신학적인 훈련, 선교적인 훈련 등)도 중요하겠지만, 공동체 내에서 검증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상이 많이 달라졌다. 보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가정교회 형태의 친밀성, 교회를 넘어선 넓은 교제권, 그리고 지도자를 교회 안에서 세우는 검증시스템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회복해야될 영역인 것 같다.

1/15/11

위로

골4:7-11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된다. 바울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위로를 주고 받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며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군사와 같은 삶을 살았지만 자기를 염려하는 교인들을 위해 두기고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는 배려의 사람이었다.

자기 또한 곁에 있는 마가, 유스도 같은 동역자들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기독교의 모든 활동을 위로에 초첨을 맞추는 자기애적인 신앙도 문제지만 복음의 전투성만 강조하고 위로 같은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원론적 신앙도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을 살되 곁에 있는 이들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균형잡힌 신앙이다.

오늘 내가 찾아가 위로해줄 사람은 없는가?

1/14/11

전도의 문

골4:2-6에서 주님은 나의 사역지의 전도의 문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다.

맥가브란 박사는 영혼의 추수지 개념을 얘기했다. 선교의 총력을 추수지역에 집중해야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랄프 윈도 같은 선교학자는 '숨겨진 사람들'(hidden people) 얘기를 하면서 추수지역에만 선교사가 간다면 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를 믿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의 선교사의 대부분이 이미 복음이 선포된 지역에 치중되어 있는데 오히려 숨겨진 사람들에게 더욱 선교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랄프 윈도의 접근이 좋다. 추수 지역에 일하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응해야 겠지만 누군가는 비추수지역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전도의 문을 열려져서 이곳이 영혼의 추수지역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 지역의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겠다

1/13/11

경건

골3:18-4:1에서 경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본문에서의 경건은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생의 역할들 - 아내, 남편, 자녀, 부모, 종, 상전 -을 모두 주님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17절에 나와있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씀의 적용인 것이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내가 주님을 대한다면 이렇게 행동하겠는가?'를 늘 질문하며 사는 것이 경건이다.

경건은 특별한 영역에 뛰어들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을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 경건이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위대한 사람은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1/12/11

용서

골로새서 3:12-17 말씀 중에서 용서하라는 말씀이 다시 다가온다.

사람에 대해서 늘 마음을 비워야 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나도 모르게 쌓이는 기대가 서운함으로 , 서운함은 불편함으로, 불편함은 분노로 이어져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같다.

주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용서하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을 내밀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종이란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않고 자기를 '무익한 종'이라 여긴다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비워 그종이 되셨다. 주님을 닮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1/11/11

새 사람 새 행동

골 3:7-11에서 우리가 새 사람을 옷입었기 때문에 옛행동을 버리라고 하신다.

성격이란 말은 희랍 배우들이 연극을 할 때 쓰던 가면을 뜻하는 persona에서 나왔다. 어떤 역할을 오래하다 보면 그것이 굳어져 내 성격이 되고 내가 된다.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란 책에서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비록 좋아하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해도 사랑의 행동을 하게되면 진짜로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사랑의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 고민하지 말고 사랑의 행동을 하면 나중에 진짜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역할을 하다 보면 그것이 우리가 된다. 우리가 새 사람의 가면을 쓰고 그 역할을 하다보면 그것이 내가된다. 물론 우리는 진짜로 새 사람을 입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역할극이다. 새 사람에 맞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하라고 말한다. 화 안내기, 더러운 말 하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등등. 매일 새사람에 맞는 역할극을 찾아 살다보면 언젠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름답게 빛나리라 믿는다.

1/10/11

위엣 것을 찾으라

(r골 3:1-6에서 땅의 것이 아닌 위엣 것을 구하라 하신다. 목사가 교회 일을 많이 생각하는 것은 위에 일을 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땅의 일을 구하는 것일까? 이것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직장 혹은 사업 일을 많이 생각 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한가지 중요한 점은 우리의 동기이다.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교회 일을 생각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직장일을 생각하는 것이 더 거룩하며, 이것이 위엣 것을 찾은 것이다.

1/08/11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

골로새서2:16-23은 한글개역 혹은 개정성경에서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쉬운성경"에서는 "쉽게"(?) 풀이해 놓았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말에 얽매이지 말기 바랍니다. (17) 이런 것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 주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18) 겸손한 체하며 천사를 숭배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환상을 보았다고도 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어리석은 교만으로 들떠 있으며 (19)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몸은 머리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의 각 마디가 서로 도와 영양분을 받아 유지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자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여러분은 이 세상의 헛된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십니까? (21) 왜 아직도 “이것은 붙잡으면 안 된다”, “저것은 맛보아서도 안 된다”, “만지지도 마라” 하는 등의 규칙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까? (22) 이런 규칙들은 먹으면 없어지고, 쓰면 사라지고 마는 세상 것들에 대한 인간적인 규칙이요, 가르침일 뿐입니다. (23)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다 사람들이 만든 종교적 관습들입니다. 거짓된 겸손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기만 할 뿐, 마음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과 죄를 이겨 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골 2:16-23, 쉬운성경)

사람들은 규칙을 자꾸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는 필요한 규칙도 많지만, 삶을 얽어매는 규칙들도 많다. 교회 안에도 많다.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규칙은 생명이 없다. 규칙은 때로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규칙은 많은 경우 우리를 얽어매게 한다. 생명은 그리스도안에 있다. 매일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삶이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것이다.

1/07/11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믿습니다.

골2:8-15에서 우리는 '우리의 충만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기독교 복음은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믿는다. 존 스토트는 이단이란 "Christ + something"이라 했다. 골로새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유대교적 이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믿음에 곁들여서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 할례를 받아야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질 것 처럼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은 그리스도로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할례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받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율법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그 모든 법조문을 다 폐기시키셨다고 하신다.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또 다른 형태로 마치 그리스도가 충분하지 않은 듯이 강조하는 기독교 운동등이 많다.
십자가의 복음에 무엇이 모자란 듯이 그래서 가정사역운동이나 상담치유사역이나 성령치유 사역등 여러 기독교 운동들이 십자가를 보완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며 사역을 펼치고 있다. 이런 경향등이 그리스도의 충분성, 십자가의 유일성을 강조해준다면 정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을 대치하거나 보완하려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이단적이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다. 죄사함 뿐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를 온전히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전인적인 구원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전인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강조했듯이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체험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더 깊이 깨달을 수록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충만이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1/05/11

각 사람

골1:24-29에서 주님은 올해 교회의 방향에 대한 인도의 말씀을 주셨다. 바로 28절의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다. 바울의 목회는 "각 사람"에게 전파하고, 권하고, 가르치는 사역이었다.

교우들과의 보다 개인적 차원의 만남 뿐 아니라,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그를 전파하여.."), 교육하는 방식("각 사람을 가르침") 뿐 아니라 이들의 삶을 코칭/멘토링하는 방식("각 사람을 권하고")에 있어서 그동안 그룹 위주에서 보다 개인적 차원의 사역을 강화할 필요를 느낀다. 그간 소그룹 목장교회 사역을 목회의 근간으로 삼아왔는데, 이에 "각 사람"을 세우기 위한 사역이 보완될 때 보다 성경이 보여주는 목회가 될 것 같다. 주님의 지혜를 구한다.

1/04/11

신앙이 위축될 때

골1:15-23에서 신앙이 위축당할 때, 주님을 바라볼 것을 가르치신다. 바울의 기도에 나타난 골로새 교인들은 고난과 박해의 현장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들이 고난 속에서 인내할 수있는 능력과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상기시킨다.

본문은 유난히 '모든' 이란 말과 '만물'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분은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예수는 우리 '영혼'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다. 당장에 우리의 현장은 우리를 위축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며, 붙들고 계신 분이시다.

이 새로운 한해에도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할 것이지만,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승리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1/03/11

새해를 위한 기도

골로새서 1:7-14에서 새해에 기도하고 싶은 몇가지 기도제목을 발견한다.

첫째는 지혜를 구하고 싶다. 지금은 지식의 사회요 정보의 바다 속에 살고 있지만, 오히려 바다에서 물이 귀하듯 지혜가 부족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바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지혜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기술은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술이라 믿는다. 새해에 교회의 갈길을 주께 부탁드리며 주의 인도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한다. 새해를 열면서 이 지혜를 구하고 싶다.

둘째 열매를 구하고 싶다. 우리가 주를 위해 행하는 것들에 열매가 있도록 겸손히 기도하고 싶다. 내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도 기대하는 열매들이 맺혀지기를 기도하고 싶다. 가장 보고 싶은 사역의 열매는 사람들의 변화이다. 교회에 찾아든 이들이 주의 말씀을 통해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주의 제자로 헌신하는 열매들을 보고 싶다. 사람들의 변화보다 더 보고 싶은 변화는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이다. 올 한해 이런 삶의 열매를 기대한다.

세째, 능력을 구하고 싶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간구했다. 올 한해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주께 기도하는 것은 이길들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을 감당하고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구하고 싶은 기도제목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졌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요, 창조자요, 만물을 붙드시는 이시요, 교회의 머리요, 모든 충만의 충만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생동안 내가 구해야될 기도제목이다. 올 한해도 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