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15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인간에게 모든 지식이 다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감춰진 지식이 있고, 종말의 때까지 감춰진 지식도 있다. 

마가복음의 그리스도는 종종 자신을 사람들에게 숨기셨다. 자신에 관한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공개하시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당부하시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종말의 때는 종말의 때까지 감춰진 지식이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이단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지식이 있다고 사람들을 속여왔으나, 예수님은 그 지식은 마지막 때까지 감춰진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최초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나무를 범한 아담의 후예인 우리들은 감춰진 것을 알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앞에 허용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지식, 허용되지 않은 관계, 허용되지 않은 욕심, 허용되지 않은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된 인간의 자리다.

사실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나무 외에는 모든 나무가 허용되었다. 이미 우리에게 허용된 것들이 과분할 정도로 많고,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할 지식의 세계는 너무나 넓고 크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에게 펼쳐진 지식의 넓은 초원이 아닌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은 길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우리의 자리와 경계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길이며, 인간을 피조물로 인정하는 길이다.

3/21/15

그룹의 함정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막12:18)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의 특징은 개인이 아닌 그룹의 특징을 갖는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권위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세금에 대해서, 사두개인이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는다.

이들의 질문들엔 적개심과 함정과 조소가 숨어있었다. 예수님께 대한 저항이 당시의 거의 모든 사회 그룹에서 일어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이 그룹이 되면 다양성보다는 그룹의 지향점과 특성으로 더 좁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룹의 입장으로 나올 때 그 개인의 자유스러움이 죽고 더 경직되는 것을 목격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명처럼 그룹이 되면 비인격화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함정을 파기 원했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룹의 함정 속에 빠져있었다. 그들 속엔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었을 것이나 그룹의 힘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모인 그룹은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시에 악마화될 수 있다. 그리고 힘이 실려 그룹 속의 개인도 악마화될 수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그룹에 종됨을 자주 교훈하셨다. 그룹속의 개인들이 힘과 권세에 관심을 갖게 되면 천국과 같았던 그룹이 지옥이 될 수 있음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나셨던 그룹과 다른 길로 가셨다.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셨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생명을 꽃피우셨다.

3/20/15

말씀을 훼손함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막12:12)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쫒아낸 일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진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모든 사람을 회개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씀으로 인해 더욱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글에도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할 때 두가지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그 말씀으로 인해 회개하든지, 아니면 그 일로 핍박을 받게 되든지.  

선지자들도 그러했다.  요나처럼 회개를 가져오게도 하고, 예레미야처럼 핍박을 받게도 한다.

가장 주의할 것은 아무런 반대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조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슬리지 않는 수준으로 말씀을 부드럽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평화를 경험할 수는 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게 된다.

3/19/15

성전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11:17)

마가는 성전정화 사건을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에 샌드위치로 배치시켰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은 상징적인 행위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낀 성전정화는 결국 얼마 후에 있게 될 성전이 파괴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열심은 대단하다. 랍비들의 글에는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은 성전이라 할 정도로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 중에 하나도, 그리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이유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해 그들의 열심이 갖는 허위를 고발하신다. 그들은 예배자들의 편의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물을 팔고 환전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함으로 대제사장 일가는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장사하는 장소는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그곳에서 기도하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예배를 방해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준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무화과 나무가 저주로 뿌리부터 말라버린 것은 성전의 운명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성전된 예수로 대치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성전의 휘장의 찢어짐은 이제 성전은 그 운명을 다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 나가는 새롭고 산 길이 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3/18/15

소유로부터의 자유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11:2)

예수님의 이번 예루사렘 방문은 색달랐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조용한 방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그 앞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호산나' 를 외치며 예수님을 높였다. 이런 방문형식을 예수님이 지시하셨고, 사람들의 높임을 그대로 수용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방문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다. 예수님도 몇번이나 이번 방문 중에 수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방문형식은 이 예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이 자신에게 성취됨을 보여주셨고, 사람들의 기쁨의 환호 속에 입성하심으로 십자가 지심이 우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기쁨에 찬 선택이셨음을 보이고자 하셨고,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심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사적 메시아가 아닌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된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메시아적 성취의 정점에 사용된 나귀는 빌린 나귀였다. 배를 빌려 하나님 나라의 비유을 가르치셨고, 동전을 빌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교훈하셨던 예수님은 나귀를 빌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의 무덤도 빌린 무덤이었다.

소유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소유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권력을 소유하고, 넓은 인맥을 소유하는 등 소유가 많을 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무엇인가를 빌리셔야 했던 가난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인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다. 무소유가 전혀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으셨다. 당당하게 나귀를 요구하셨고 사용하셨다. 만물의 주인되신 예수님은 소유로 자신을 입증하실 필요도 없으셨다.

소유가 존재가치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있음으로 우쭐하고, 없음으로 위축되곤 한다. 그러나 소유에서 자유한 사람들은 없음에도 당당할 수 있고, 무소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해 큰 뜻을 품을 수 있다.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가 아닌 순종을 보시기 때문이다.

3/17/15

단순한 기도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51)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매일 아침 기도시간에 대 주교는 빠짐없이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항상 "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 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오냐!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깜짝 놀란 대주교는 "하나님 정말 제 기도를 듣고 계셨군요"하면서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고 만다.

바디매오에게 기도는 실제였다. 맹인이었던 그는 보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에겐 기도는 삶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창한 미사여구의 기도도 아니었고, 대주교처럼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냥 시간이 되어 기도하는 경건의 형식도 아니었다.

기도의 소화불량에 걸린 상테로 지낼 때가 있다. 기도에 대해 들었던 수많은 말들, 성경에서 들었고 설교시간에 들었고, 기독교 서적에서 보았단 기도에 대한 많은 것들이 뒤엉켜 기도란 뭔가 복잡하지만 해야만 하는 의무로 다가올 수 있다.  기도의 구름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형국에 이르게 된다.  

오늘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그래,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 그런데 너무도 복잡한 우리는 정작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는지 조차 생각지 못한다. 많은 것을 기도하면서 정작 무엇을 꼭 들어주시리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게 된다.

바디매오는 단순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셨을 때,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심오한 기도의 영성이란 것이 오히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기도가 아닐까?

3/15/15

버려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라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고 했고,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나하여....버린 자는..."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복음을 위해 무언가를 버려야함을 당연시 하셨다.

오늘의 복음은  버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에는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 천국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어느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일에 이어진 이 말씀은 부자만 겨냥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집이나 논밭 뿐 아니라 부모나 형제 자매를 버린 자들을  언급하신 것을 보면 우리가 버려야할 것이 재물만은 아니다. 관계를 포기해야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을 버려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혹시 주님은 내게도 무엇을 버릴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3/14/15

한 가지 부족한 것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10:21)

어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했다. 질문은 진지했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이 청년의 마지막 장면이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는 진지한 구도자였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말씀을 다 지켰다고 했다. 나름 자신의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그에게 예수님은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청년은 응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떠난다.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 나름 이제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위해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무언가 결정적으로 부족한 한 가지가 남아있을 수 있다. 그 한 가지 때문에 어떤 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제자로 살지 못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헌신을 양으로 채우려 한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전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공부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이렇게 양을 많이 채우면 우리의 부족함을 보충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결정적인 한 가지'다. 

그 결정적인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는 몸짓인지 모른다. 

그것이 이 청년에게는 재물의 문제였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과거 습관의 청산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적적한 관계의 단절이며, 어떤 이에게는 겸손이고,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무엇일 수 있다. 그런데 그 한 가지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내 발목을 잡는다. 

주님을 대면했을 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말씀하신다면 내게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실까?

3/12/15

배타성을 경계하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40)

예수님의 제자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는 일이 있어 제자들이 이를 금했던 일이 있었다. 이를 듣고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그룹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들이 있고,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신다.

내가 이해한 예수님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2. 그가  예수님을 위해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도 그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3. 그런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마치 큰 바위에 매달아 그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과 같다.
4. 우리의 손이나 발이나 눈이 그런 일에 가담한다면 찍어내버리는 것이 더 낫다. 다른 그룹의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실족시키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5.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의 맛을 간직해야 하는데, 그 맛이란 바로 화목의 정신이다.

우리의 배타성은 같은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나와 다른 교단, 나와 다른 교회의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부서, 다른 사역, 다른 소그룹에 속한 이들에게도 자주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배타성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수준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11/15

어린아이를 찾아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이 말씀은 제자들의 누가 크냐 다툼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다. 크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시며, 이어서 이 말씀을 주셨다.

크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중요하게 보이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자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선 무시한다. 

그래서 엘리트 목사님 교회의 교인됨이 자부심이 되고, 유명세가 있는 이들과의 친분을 좋아하고,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무례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엘리트 집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가난한 자도 환영받고, 소외된 이도 존중받고,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어진 그런 공동체가 되길 원하셨다. 한 공동체의 영적 수준은 그곳에 엘리트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주는가가 될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아담'이란 불리는 한 장애인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는지 쓴 글이 있다. 그는 실제로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던 일을 포기하고 몇 명 안되는 장애인 공동체를 섬기면서 그간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은밀한 그의 교만을 주님께 내려놓는다.

예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나의 '어린아이'를 환영하는 것이다.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끊임없는 상향지향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숨어있는 우리의 '어린아이'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런 제자들이 많은 공동체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공동체다. 그것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표지다.

3/09/15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2-3)

일명 변화산 사건이다. 예수님의 용모와 의복이 변했고,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했고, 구름 위에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제약이 잠시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셨다. 빌립보서의 표현대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을 사셨다. 그는 수많은 제약 속에 사셔야만 하셨다. 우리와 동일하게 배고픔, 눈물, 피곤함, 그리고 고통을 느끼셨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그 모든 제약이 잠시 해제되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그의 빛나는 모습을 사람들은 그대로 볼 수 없어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했다. 모세의 영광이 반사된 영광이라면, 예수님이 영광은 본질적 영광이었다. 영광 자체이셨던 그 분이 잠시 육체의 한계 속에 지내시다가 잠시 그 영광을 드러내셨다.

십자가 고난을 얼마 앞둔 시점의 이 영광의 사건은 예수님을 위로하시고 제자들을 준비시키려는 의도이셨던 것 같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도 허락된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하나님이 자녀로서의 영광이 있고,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이 있고, 장차 약속된 하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의 영광이 있고, 성령님께서 경험케 하시는 영적인 영광스러운 세계가 있다. 

우리에게 이 영광이 있지만 우리는 이 땅의 고난의 제약 속에 살아가야 한다.  때로 기다려야하고, 때로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하고, 때로 목마름을 안은채 걸어가야 한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웃음, 더 많은 돈, 더 많은 친구,  더 나은 환경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그것을 보는 것이다.  

모세처럼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3/08/15

인간적이라는 것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4)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하시면 안된다고 했다. 그의 충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의 말 속엔 예수님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이란 것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마저도 사탄은 이용하려 든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 부른다. 베드로는 선한 의도였지만, 그의 제안은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다. 인정과 사람에 대한 따뜻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장점이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분별력있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따뜻한 마음이 예수님께는 사탄의 올무가 될 수 있었듯,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 나를 넘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았다고 책망받았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 그것보다 하나님의 일이 앞서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있다.  

'하나님의 사람'과 '인간적인 사람'이 늘 대치점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됨을 표방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버린 차가운 영성을 가진 이들을 보면 마음이 섬뜩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됨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

3/05/15

하나님은 구걸하지 않으신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2)

시편 50편은 재판의 형태를 취한 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고, 자기 백성을 피고로 소환한다. 제물을 드리되, 마치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 처럼 드리는 태도를 문제삼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 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린다는 태도를 버려야한다. 오히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라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희를 건지리라'(15절)는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주어졌다.

그렇게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