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1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예수께서 떠나실 것을 예고하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과 두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떠난다는 아쉬움 뿐 아니라 당시 예수를 향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던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이었다. 우리들에게는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는 또 다른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평화를 누리며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주님이 이 말씀 직전에 성령님에 대해서 언급하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26절) 예수님은 자신은 육체적으로 떠나시지만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즉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해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다시오심을 약속하셨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28절).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작정되어진 일이다. 내 삶 속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 그 때도 우리는 내 삶에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일하시고 계심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이 떠나가심은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분명히 하셨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31절).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시며 우리의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 섭리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10/25/13

시간을 구원하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이 구절은 단순한 시간관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악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죄악된 일들로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11절의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 18절의 "방탕한 것"이 우리 인생을 허비케 하는 것들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구절 앞뒤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을 나온다.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아끼라는 말은 영어의 "redeem"이란 뜻이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아야하듯, 우리의 시간들은 구원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안하면 영혼들을 잃어버리듯, 시간도 그대로 나두면 잃어버린 시간이 된다.

시간을 구속할 수 있는 길은 주의 뜻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주의 뜻만이 영원할 것이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죄에 이끌려 사는 우리들은 주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살고 싶어하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어진 시간에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관건이다. 헛된 일로 채울 것인지, 방탕한 것들로 채울 것인지, 아니면 성령으로 채울 것인지. 성경은 이 악한 세월은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으라".

오늘 하루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 모든 순간마다 성령으로 채움받기를 소망한다.

10/24/13

빛의 자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11)

에베소서 5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두가지 신분에 대해서 말한다. 1절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8절의 빛의 자녀이다. 그리고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율법은 이런 신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말한다. 복음은 은혜로 이런 신분을 얻었으니 이에 합당하게 살라고 요구한다.

빛의 자녀로서 어둠의 일에 참여치 말고 책망하라 하신다. 책망한다는 것은 폭로한다, 노출한다, 드러낸다는 뜻을 가진다. 어떤 행위나 결정을 할 때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이것이 나의 욕심인지 아니면 할 수 있는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빛의 자녀된 우리의 기준은 이런 일들을 빛 앞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드러냈을 때에도 떳떳하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노출할 수 없고 숨겨야 하는 일은 빛의 자녀인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어둠을 노출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자기 어둠과 실패와 아픔을 드러내어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의 이상은 '서로 죄를 고하는' 공동체이다. 단지 우리의 고난과 약함 뿐 아니라 우리의 악함과 어둠까지도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가 신약성경적 공동체의 기준이며 목장교회의 이상이다. 그런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이며 그런 공동체를 경험할 때 빛의 자녀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10/21/13

성숙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숙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1. 성숙은 개인적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본문의 전체 맥락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숙이다. 본문에서의 성숙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개인적 성숙을 말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몸이 자라갈 때 각 지체된 우리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에 서로 연결된 우리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이 우리가 자라는 길이다. 다른 이들을 자라게 함으로 내가 자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요 비밀이다.

2. 성숙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숙의 지향점은 그리스도다. 성숙은 그리스도를 '알아감'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감'이며, 그리스도로 '채워짐'이며 그리스도와 '같아짐'이다. 자라갈수록 우리 냄새보다는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한다. 죄인된 우리들을 아무리 가꾸어봐야 결국엔 죄인의 냄새만 날 것이다.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계심이 우리 성숙의 목표다.

3. 성숙은 균형있는 인격이다. 사랑과 진리는 우리 인격 안에서 균형있게 녹아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며 진리가 되신다. 성숙은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더 깊히 알아가는 것이며, 그분을 더 깊히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진리에 대해 요동하는 어린아이들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지체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야 함을 말한다. 성숙은 사랑과 진리의 균형이며, 그것이 내 인격 안에서 체질화되는 것이다.

10/18/13

교회의 신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영원전부터 감추인 복음의 신비는 때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어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한 가장 중요한 강조점이었다. 바울이 이것을 강조한 것은 목회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생교회인 초대교회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었고, 교회들은 몸살도 앓고 있었다.

바울은 성도들의 하나됨을 단순한 목회적 권면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것들을 통일하시고 연합시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영원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교인들을 초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되게 하신 교회됨의 신비다. 바울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신비한 공동체인가를 상기시킨다.

당연히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됨이었다. 에베소서 4장부터 바울은 실제적인 삶을 권면하기 시작하는데, 그 첫 시작을 성도들의 하나됨을 강조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됨은 성도들의 공통성에 주목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한 주님, 한 성령, 한 교회, 한 믿음, 한 하나님....

대부분 우리들의 교회 성장 전략은 "우리 교회는 얼마나 다른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다른 교회와는 차별성있는 목사님의 설교, 교회 프로그램들, 교육 훈련, 교회 시스템, 사회적 행동들.... 이런 "다름"으로 자신의 교회가 타교회에 비해 우위에 있음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성도들은 어느새 그런 정신에 길들여진다. 우리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이 공통성의 근거보다는 우리의 다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든다. 그러나 그 길은 교회가 미아가 되는 길이요 자기를 상실하는 길이다.

우리들의 차별성으로 강조되는 것들은 어느 때가 되면 다 없어지고 변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지난 2000년 동안 모든 교회들이 함께 붙들어온 그 공통의 믿음과 그 근거들이다. 한 주님, 한 성령, 한 교회, 한 믿음, 한 하나님..... 이것이 우리들의 진짜 얼굴들이다ㅏ.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이 통일성을 계획해오셨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어가신다. 그 일에 우리가 초대되었다!

10/17/13

우리가 경험해야할 세계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언급한 이후 바울은 엡3:14-21에서 성도들이 이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기를 기도한다. 바울의 기도에는 우리가 경험해야할 풍성한 영역들을 보여준다.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사랑, 그리고 우리 생각과 기도보다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풍성한 세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바울은 복음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깊을 수 있는지를 성도들이 경험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오늘 나를 위한 기도제목이어야겠다. 더 깊이 내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더 깊히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더 깊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를 내 삶의 소원으로 삼자!

10/16/13

복음의 영광

엡3:8-13에 이르는 오늘의 QT본문에서는 우리가 가진 우리의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8절)이며, 영원전부터 감취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며(9절),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10절, 공동번역)이며, 영원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11절)이다.

이 복음의 영광을 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든지 "담대함과 확신"(12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심지어 바울은 현재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우리의 초라함은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한 초라함이다. 존 파이퍼의 책을 읽고 있다. 그는 복음의 마지막 정점은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영광을 본 사람은 복음 안에서 겪는 어떤 일도 영광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 우리를 참여시켜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10/05/13

끝까지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시106:32)

모세는 결국 무너졌다.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에서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냈던 모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 원인은 백성들의 불평이었다. 므리바에 이르러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또 다시 불평하고 원망했다. 피곤증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모세의 반응이 달랐다. 결국 그는 하지 말아야 했던 행동과 말들을 쏟아내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다.

광야 여정의 거의 막바지에 일어났던 이 일로 모세는 허망하게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한 순간에 일어났던 이 일이 평생의 소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평생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분들이 한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본다.

바울이 인생의 막바지에 했던 그 고백을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도 했으면 좋겠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10/04/13

잊어버림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시106:13)

시편 106편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과 은혜를 기록한다. 그런데 13절부터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얼마나 불충했는가를 기록한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한 일,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거역한 일, 호렙 산에서 우상을 만들었던 일 등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하나님께 실망스러운 행태들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13절에서 이 모든 실망스러움의 시작은 "잊어버림"이었음을 기록한다.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21절에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 주어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순간 어떤 일도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과 차이가 없었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차별성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복은 도덕성의 회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간음의 범죄를 저질렀던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그가 먼저 구한 것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였다.

우리에게 먼저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을 잊어버리고 그 감격을 상실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여기 사는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설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진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만찬을 명령하시며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 만찬은 교회됨의 정체성이다. 교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회복은 다시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