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5

모세의 지팡이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7)

모세는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왜 나입니까?",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사람들이 제 말을 안 믿을 겁니다", "저 말고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그렇게 발뺌을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용한다.

40년을 목자로 지내다가 호렙산에서 단 한번의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그의 진로를 바꾼 것을 생각하면 그가 주저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 하신다. 이 지팡이는 목자의 지팡이로 모세의 일상의 도구였다.  그런데 그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될 것이라 하신다.

실제로 그 지팡이가 뱀이 되기도하고,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그 지팡이로 반석의 물을 내기도 했다.

대면해야될 바로가 가지고 있는왕의 지팡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목자의 지팡이지만 그 지팡이가 출애굽의 여정 속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는데 화려한 왕의 지팡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화려한 도구들을 탐한다. 화려할 수록 거기서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화려함이 능력은 아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흔하디 흔한 목자의 지팡이요 초라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물이었다. 능력은 도구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온다.

내 일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이 되면 내 일상은 모세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가 된다.

1/29/15

하나님의 "I"


출애굽기 3장을 보면 유난히 하나님의 "I"가 많이 등장한다(18회).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5절. "I am the God of your father..."
7절. "I have indeed seen the misery...I have heard them crying out... I am concerned about their suffering"
8절. "I have come down to rescue them..."
9절. "I have seen the way the Egyptians are oppressing them"
10절. "I am sending you..."
12절. "I will be with you... it is I who have sent you"
14절. "I AM WHO I AM...I AM has sent me to you"
15절. "I am to be remembered.."
16절. "I have watched over you..."
17절. "I have promised to bring you up..."
19절. "I know that the king of Egypt will not let you go..."
20절. "I will stretch out my hand...I will perform among them"
21절. "I will make the Egyptians favorably disposed ..."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모세가 비전을 품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본문의 모세는 될 수 있으면 이 일을 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이 일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결심하시고, 하나님이 설계하신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사역에 부르시면서 온통 "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아에 "I am"으로 계시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비전에 속을 수 있다. 다른 이와는 다른 나만의 비전, 다른 교회와 차별화된 비전, 다른 리더와 구별되게 만드는 나만의 비전을 갖는다는 것을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 일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비전인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1/26/15

모세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2:10)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가 애굽 공주에 의해 이름지어진 것은 역설적이다. 자신이 모세를 건졌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은 하나님이 공주의 아버지로부터 그를 건졌다는 의미도 된다. 

그의 이름은 동시에 그의 인생에 대한 예언 같은 역할도 한다.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으로 부터 건진 사람이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재창조하신다. 공주가 지은 이름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새롭게 사용하셨다. 

우리의 이름 뿐이랴.  우리가 인생 가운데 내리는 수많은 선택들, 우리의 행적들, 심지어 우리의 실수까지도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재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하시고,  우리의 교회와 가정도 그분을 위해서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1/24/15

무엇이 보이느냐?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막8:23-24)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 구절을 구원에 적용하여 설교한 적이 있다.  치유를 받았으되 온전히 보지 못하고 사람을 '나무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처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되,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는 한 순간에 마무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더 많은 경우는 아주 오랜 시간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심으로  어느날 드디어 구원의 체험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긴 과정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본문의 맹인처럼 예수님의 일하심의 어떤 체험을 하지만, 아직까지 '나무같은 것'만 보는 사람이 있다.  온전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이기는 보이되 온전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 보지만 온전히 보지 못한다.  '나무 같은 것'만 본다. 

구원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며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저 '나무 같은 것' 정도로 어렴풋이 보는 이들도 많다. 온전히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이들이다. 무엇인가 보이기는 하되 그들이 보는 것은 아직 '나무 같은 것'이다.

나무 같은 것만 보는 맹인을 치유받았다고 볼 수 없듯이, 반쯤 보이는 이를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질문은 우리의 영원을 가늠하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무엇이 보이느냐?'

1/22/15

부스러기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7:28)

우리는 예수님의 메인코스의 참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메인코스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 메인코스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몫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 베데스다 연못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 희곡을 읽은 적이 있다. 한 외과의사가 불치의 병에 걸려 베데스다  연못으로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날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막 뛰어들려는 그 순간 한 천사가 그에게 보인다. 그리고 외친다. "물러서시오, 이 물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 뒷 이야기가 계속되지만, 이 문구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물러서시오, 이 물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는 하나님의 메인코스에서 제외되었다. 한 시리안 여인도 주인의 상에서 제외되었다. 예수님께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겠지만, 이 여인의 위대함은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는 태도였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부스라기 라도 우리에게는 과분한 것이요, 넘치는 은혜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부스러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딸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은혜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에 충분한 은혜였던 것이다.

1/20/15

사람의 계명?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7:7)

위 구절 앞부분을 NIV에서는 "their teachings are merely human rules" 라고 번역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은 그저 사람의 계명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설교자들을 두렵게 한다. 우리가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님께서 '너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였을 뿐이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우리가 목장모임을 마쳤을 때, '너희들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교제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수다였을 뿐이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이것이 두려운 것은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신다.

1/05/15

충돌

"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2:7)

중풍병자를 대하는 예수의 방식은 당시의 신앙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의 고유권한인데 나사렛에서 올라온 목수 예수가 자신도 죄를 사한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곧바로 신성모독이라 몰아쳤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된 충돌로 보인다. 사람들의 반응은 뻔히 예상되는 것이었지만, 시끄러움을 피하지 않으셨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다고 선언하심으로 치유자 혹은 랍비 정도로 예수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생각에 충격을 가하셨다. 그는 논쟁과 충격의 한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논쟁을 피해가며 조용히 예수를 전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데,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충돌하지 않고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리한 예수상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신다.  

죄사함의 선언은 하나님됨의 선포였다. 예수님은 신성을 주장하신 것이다. 당시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선언을 그렇게 받아들였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충돌을 만드셨다.   "인자가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의 만남엔 이 충돌이 있다. 당황스럽게 예수님을 만나야하는 지점이 있다. 내가 편리한 대로 만들었던 나의 예수상을 깨뜨려야 하고, 예수 자신이 보이고 싶은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때로는 신앙의 여정에서 내가 쌓아온 논리와 경험까지도 무로 돌려야 하는 깨어짐이 있다.

우리는 때로 고통의 심연에서 그런 예수를 만나고, 내가 결코 가지 않을 것 같은 길에서 일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며 손짓하시는 그를 만난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저 경탄하고 놀라고 따라가야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