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3

단순한 믿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이 말은 예수님이 한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이다. 백부장은 믿음을 군인답게 이해했다.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이 반드시 시행되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 중에서는 이런 믿음을 찾기가 어렵다 하셨다. 이들은 더 많은 성경지식과 종교적 생활에 익숙한 이들이었는데 말이다. 한가지 이유는 아마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과 같은 이유일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주님을 단순히 믿고 따르는 삶을 강조하기 보다는 복잡한 절차와 과정들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한다. 제자훈련의 복잡한 과정들이 있고, 교회생활의 복잡한 규정이 있다. 주님을 향한 예배도 정확한 큐시트가 있어야만 드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모든 것은 항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절차들이 우리의 생명력을 질식시킨다. 단순한 믿음은 복잡성 속에 질식된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훈련과 과정과 절차를 거친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하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보다 믿음에 있어서는 상당한 퇴보가 이루어졌다고 느낀다.

백부장에게는 그런 복잡한 절차나 의식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갔다. 그리고 그런 백부장을 만나셨을 때 주님은 너무 기뻐하셨다.

오늘날 주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그런 백부장이 아닐까?

1/28/13

열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6)

우리 인생 중에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거짓의 사람이 많다. 모든 이를 선하다고 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예수님도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 하셨다. 물론 교회에도 들어올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열매라 하셨다. 사람의 말은 우리를 혼란케 하고 속일 수 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라 하신다.

또한 이것은 진정한 예수 제자의 표지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제자됨은 주장과 의견이 아니라 열매다.

1/24/13

염려

마6:25-34에서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 책망하시고 염려는 믿음의 문제임을 말씀하신다. 염려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1.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2.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26절)

3. 하나님께서 우리 필요를 아신다는 믿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염려가 되는 생활의 필요가 먼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하신다. 아직 염려가 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다.

1/23/13

하늘

마6:16-24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대비된다. 얼굴이 상할정도로 금식하는 경건한 사람과 재물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다. 예수님은 이 두 종류의 삶이 모두 잃어버린 것이 하늘이라고 말씀하신다. 경건을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것은 하늘에서 받을 상을 잃어버리게 하고, 물질을 이 땅에만 쌓아두는 것은 좀과 동록 등으로 안전하지 못할 뿐 더러 하늘의 보물이 없다는 뜻이다. 하늘이 없는 경건은 위선자로 만들고 하늘이 없는 물질은 맘몬의 종이 되게 한다.

경건도 물질도 하늘을 잃어버리면 우리 영혼엔 독이 된다. 하늘의 빛으로 경건을 취하고, 하늘의 빛으로 물질을 취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상을 쌓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

1/22/13

기도

마6:9-12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1.기도는 요란떨지 말고 조용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회당 어귀 등에서 하지 말고 조용하게.
2. 기도는 친근하게.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친근함으로
3. 기도는 간결하게.  주기도문에는 형용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기도제목을 핵심적으로 기도한다.
4. 기도는 솔직하게.  우리의 양식, 우리의 죄, 보호가 필요한 우리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기도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거룩한 기도라면 기도는 조용하고 친근하게, 간결하면서 솔직한 기도가 거룩한 기도다.

1/20/13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사64:3)

신앙공동체는 거짓 위안을 줄 수 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제사나 절기 등의 종교행위를 통해서, 혹은 거짓 선지자들이 들려주는 말에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 오늘의 신앙인들도 동일한 거짓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사야64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이들에게 이것은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필요한 것은 자각이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라면 우리의 한국 교회에, 아니 우리의 교회 공동체에, 혹은 나 자신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회개로 주 앞에 나가는 주일이기를....

1/19/13

모든 것을 은밀하게"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4)

인간은 이중적이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약점은 최대한 숨기고 싶어하고, 또 한편 또 다른 우리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고 싶어한다. 예수님은 구제나 기도, 혹은 금식까지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들의 병적 위선을 꼬집는다.

예수님의 치유는 간단하다. "모든 것을 은밀하게."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할 수 있는한 조용히, 은밀하게, 드러내지 않게,  "골방에서" 하라 하신다. 은밀함, 이것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는 자기 부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인간의 위선의 중독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다.

1/18/13

관대함

은혜의 다른 이름은 관대함이다. 마5:38-4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관대함이라 할 수 있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 보다는 더 돌려주고, 친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 미워하는 사람에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것은 관대함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우리가 따라가야할 삶의 모습이라 하신다.

최근 관객을 동원한 레미제라블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자베르적 접근을 하는 오늘의 시대에 그런 자베르에게 마저 용서를 베푸는 장발장의 관대함이 현대인을 위한 치료가 아닐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 그런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1/17/13

단순한 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메시지 성경역은 맹세애 대한 이 본문을 의역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겉치레로만 하는 것을 맹세 남용의 사례로 든다. 생각해보면 진심을 담지 않은 종교적 겉치레 말들이 많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것은 악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언어가 종교적 부풀림이 없는 단순한 말들이기를 원하신다.

1/16/13

성경말씀의 권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2)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한 그 말씀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려 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엄중히 적용하신다. 형제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부주의하게 쏟아내는 말도 이 살인의 범죄와 같다 하신다. 이후에 예로 드는 간음, 맹세, 이혼 등의 문제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태도를 보이신다.

우리는 편한대로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것을 걸러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인다. 사람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말씀의 권위를 높이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을 엄격히 대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들보다 더 엄중하게 말씀을 대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씀을 대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영혼의 부흥이 온다고 생각된다.

부흥은 말씀의 권위에서 시작된다.



1/15/13

공적 제자도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

하워드 스나이더는 예수가 가르치신 제자도는 "공적 제자도"라고 했다. 제자의 삶, 혹은 영성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묵상과 교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 서야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우리가 서야하는 세상은 불신의 세상이다. 그 자리에 서는 것은 불편하다. 그들 앞에 서면 믿음과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다. 도전이 있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 당국자들에게는 trouble maker로 비쳤다. 바울은 소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고소당했다.

우리는 불편하지 않게 "말 아래" 숨을 수 있다. 그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 믿는 자들의 모임에만 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가르치신 제자도는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등경 위에" 두기 원하신다.

각자마다 서야하는 불신의 세상이 있다. 만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예수의 제자임을 공언하면서 공적 제자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1/14/13

평화

마5:7-12의 덕목은 경쟁적인 오늘의 사회에서 선호되는 덕목들이 아니다. 치열한 삶 속에서도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잊지않고 목적달성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 속에서 마음의 청결함을 추구하고,  자신의 이념과 목적을 위해서 모두가 싸움닭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화평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사회의 경쟁에서 밀리는 처럼 보인다.  

확실히 이것은 이기기 위해 사는 삶은 아니다. 오히려 핍박받는 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삶이 복된 삶이라 하신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를 이 땅에 조용히 심는 자들이다.

1/13/13

구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창49:18)

야곱이 기다렸던 구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본문에서는 쉽지않다. 신약적 의미의 구원을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구원이란 말은 매우 포괄적인 뜻을 지닌다. 질병, 탄압, 가난, 곤궁, 위기...등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구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구원받았고 동시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마지막 임종시의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이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12/13

불행이 축복으로

마4:1-6에서 예수님은 다른 기준의 복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민중들이 모습은 객관적으로 복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온유" 역시 어떤 정황을 암시해준다. 성경에 온유와 연관된 에피소드는 모세가 리더십의 도전을 받을 때, 이삭이 계속적으로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겼던 상황들이었다.

이런 상황들은 불행이라 여겨지는 삶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불행들이 하나님을 위한 문이 되면 불행은 복이 된다. 가난 속에서 영적인 가난을 생각하고, 애통에서 하나님이 위로를 사모하고, 빼앗김과 갈등의 상황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찾고,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될 때 우리의 불행은 오히려 더 큰 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불행이라 불리는 상황들이 있다. 경제적인 파탄과 사랑하는 이의 잃음과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이 상황들이 하나님을 위한 문이 되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부요할 때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면 이것들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니다.

1/11/13

부르심

마4:12-25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을 즉흥적으로 부르신 것 같지만 다른 4복음서와 비교해보면 침례요한이 사역하던 요단강에서 처음만난 이후 거의 1년의 시간이 지난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참여하고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등을 함께 만났다.

즉 오랜 관찰 끝에 제자들을 부르셨다.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제자들을 부르는데 있어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사회적 조건이 예수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는 모자람이 많아 보였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종교당국자들이 이들이 "학문이 없는 범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느 목사님의 주장처럼 "사회적 고지"에 있는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의 기준에는 이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면 자신의 생계까지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즉시 응답하고 예수를 따랐다.  모든 부르심에는 결단이 필요하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라고 되어있다. 아버지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할 때 많은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했다. 제자들이란 댓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1/10/13

틈

마4:1-11에는 예수님의 세가지 시험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결국 한가지 시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틈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적인 떡을 더 추구하는 것, 하나님 자신보다 사람들의 갈채를 더 갈망하는 것,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광을 더 추구하는 것.... 결국 에덴의 시험처럼 하나님에게서 독립적 존재가 될 것을 시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시험에서도 사단은 우리와 하나님의 틈을 내려한다.

예수님은 조금의 틈도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 대한 신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예수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


1/09/13

어떤 자리

마3:13-17에서 예수님은 침례장면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말한 "회개의 침례"가 사실상 필요없으셨다. 그러나 침례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다 하셨다.

나 자신에게는 필요없지만 어떤 자리에 서야하고, 어떤 일을 해야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나 자신에게는 필요도 유익도 없지만, 더 큰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서야할 자리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가늠하는 테스트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부흥이 없어도 지켜야할 교회가 있고, 열매가 없어도 감당해야하는 선교사역이 있고, 사람들의 환호가 없어도 감당해야할 주님의 일들이 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서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1/08/13

불편함

마3:1-12의 침례 요한은 우리들에게 불편하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한 자로 언급된 그가 광야에서 활동하고 지극히 단순한 삶을 살아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청중들을 위로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회개의 메세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의 설교자들과 정반대의 길로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을 수 있는 곳이 그의 사역지가 아니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예루살렘이나 다른 도시로 가야했다. 그의 사역은 생활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곳이 아니었다. 그의 메세지는 당시의 회중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던 이들에게 그리 생각지 말라 한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될 때 시행되던 침례를 유대인들에게 베풀면서 회개하고 나온 자만이 참 유대인이 될 것을 선포한다. 그의 메세지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침례요한은 우리들에게도 불편하다.

물론 하나님의 소명의 길이 각자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요한은  우리들에게 헌신의 원형(prototype)을 보여준다.  광야,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함을 보여주며, 메뚜기 석청 낙타옷, 이것은 아무런 생활의 보장이 없어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순종해야 하며, 그의 메세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세지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해도 가감없이 전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헌신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불편함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07/13

조명

마태 2:19-23은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 된 경위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믿음은 메시야는 유대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을 메시야로 추종하는 무리들을 볼 때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의 시선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단지 나사렛이 비천한 장소였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야는 유대사람이어야한다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나사렛 예수를 의심했던 것이다. 마태는 유대땅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신 메시야가 애굽 땅을 거쳐 왜 나사렛에 올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빠질 수 있는 오류를 보여준다. "메시야는 유대사람이어야 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혀 "메시야는 유대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는 마태의 관점을 보지 못하면 메시야를 대망하면서도 메시야를 거부하는 비극적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메시야는 말씀을 성취하였지만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취하셨다. 그러나 그 예상치 못함 때문에 말씀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결국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예수를 나사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씀이해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메시야는 유대땅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의 편린에 사로잡혀 버리게 된다.

"하나님이여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1/06/13

모호한 어둠

창12:1-3에서 익숙함에서 떠남이 신앙의 새출발이 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제1성은 "떠나라"는 것이었다. 익숙한 환경, 사람들, 가족을 떠나서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선명한 그림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는 항상 모호한 어둠처럼 다가왔다. 나는 청사진처럼 구체화된 비전을 기대했지만, 비전은 작고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밝아져 나중에 가서야 형체를 알아보게 되었다. 익숙한 곳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예상되지만, 아직 선명하게 계시되지 않은 그  땅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땅이다.

신앙이 꽃피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모든 것이 가려져 있고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불안 속에서는  "내가 너를...하리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온다.  믿음이 자라는 곳은 바로 그런 모호한 어둠 속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불안함이 나를 지배할 때 그 때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할 때이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때이다.

1/05/13

걸림돌

마2:13-18에 보면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하여 베들레헴 근방의 아이들을 무참히 살륙하게 된다. 만백성의 기쁨을 위해 오신 구주의 탄생이 베들레헴의 부모들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베들레헴 학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가장 선한 것에 악이 따라오곤 한다. 예수는 머릿돌이시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신다. C.S. 루이스는 "시편강해"에서 시편기자의 저주시를 설명하면서 신앙의 길은 위험하다 했다. 위험의 골짜기를 거치지 않고 신앙의 정상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정제되고 아름다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투박함이 있다. 정제된 언어로만 복음을 이해하다가 비수로 우리를 찌르며 다가오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당황해하곤 한다. 그리고 비로서 깨닫는 것은 예수님은 몇가지 우리의 단편적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느낀다. 결국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예수의 존재 앞에  두손들고 항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1/04/13

다른 길

마2:7-12의 동방박사들을 오늘 우리가 만난다면 매우 낯설어할 것 같다.  정통적인 말씀연구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아니고 별을 보고 메시야를 찾아나섰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수상쩍게 여겨질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했고, 유대땅에서 목자들 외에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지하지 못했을 때 그를 찾아가 경배하게 된다.

종종 나의 신앙배경와 매우 다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들을 만날 때 심리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그들의 신앙 진정성을 부정하고 싶은 유혹도 생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내가 주님께 드리지 못했던 주님을 향한 헌신과 경배를 보게 될 때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가로막는 장애물의 하나는 우리의 라벨링(labeling)이다. 복음주의자, 오순절주이자, 사회운동주의자, 영성주의자, 자유주의자..... 이런 라벨링을 하면서 다른 이름을 가진 이들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흔적을 부정할 때 교제는 단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길은 참 다양하다.  동방박사들처럼 별길을 따라 메시야를 만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 앞에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할 부분도 많다.

1/03/13

죽은 지식

행2:1-6에는 희미한 싸인을 보고도 멀리에서 메시야를 찾아나선 이들이 있는 반면 메시야의 탄생지를 성경에서 바로 찾을 수 있는 방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그 지식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 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지식이 예수님과의 만남과 경배로 이어지지 않으면 죽은 지식이다.

새해에는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는 순간들을 많이 갖기를 소망한다.


1/02/13

자연과 영성

마태복음 1:18-25절의 요셉의 모습에서 자연과 영성에 대해 묵상해 본다. 잉태한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정리하는 것이 요셉의 보여줄 수 있는 의였다. 그러나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은 성령의 의였다.

종종 자연적 의는 성령의 의를 거스린다. 인간적이고 신사적인 어떤 결정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의로운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는 무관할 수 있다. 그저 자연적 의에 불과할 수 있다.   자연을 넘어 영성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요셉이 그러했듯이 성령의 음성 들음이 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그분의 음성듣는 시간을 많이 갖기를 소망한다.

1/01/13

커넥션

마1:1-17절의 족보는 예수님과 아브라함/다윗의 커넥션을 보여준다. 그 중간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연결점들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애가 진정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커넥션을 이루고 있을 때이다. 족보에서는 개인의 성취가 중요하지 않다. 성취지향적 사고에 물든 우리들에게 마태복음의 족보는 지루한 책일 수 밖에 없지만, 관계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족보는 보고가 되고,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한다.

 성취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게 되면 경쟁심의 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인생을 바라보게 될 때 모든 순간이 의미가 되고 모든 관계가 감사가 되고,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한 위대한 사역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