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14

고난을 통해 얻어야할 것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드디어 욥이 회개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논쟁으로 저항했었고, 하나님께도 마지막까지 저항했었다.

그러던 그가 회개했다. 그의 회개는 깨달음에서 왔다. 욥기 42장 2절에서 욥은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새번역). 비로소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오게 되었다. 

고난의 최대 축복은 그 자리에 가야만 보이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1.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긴 질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는 절대주권자임을 깨닫게 된다(2절). 그가 원하시면 고난까지도 허용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닫는다.

분명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러나 고난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대면한 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2.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깨닫게 되었다. 그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했고,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노라 고백한다(3절).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고 고백한다. 고난을 통해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뵙고 알게 되었고, 그 전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정도였다고 고백한다(5절). 그는 철저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 지식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무슨 정보나 피상적인 앎을 말함이 아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라는 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고 회개의 자리로 나가게 한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이 대답을 시작하셨을 때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냐' 는 질문으로 시작하셨다. 이제 욥은 '제가 바로 그 자입니다' 라고 고백한다(3절). 진정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욥처럼 엎드리게 된다.

고난을 통해 얻어야할 것은 이런 깨달음이다. '무조건 이겨내자'는 것이 고난의 목적이 아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시간이다. 

6/27/14

리워야단을 만드신 하나님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욥41:1)

하나님은 리워야단 얘기로 그분의 말씀을 마무리 하신다. 리워야단의 정체는 확실치 않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참조해 볼 때 거대한 바다의 뱀 혹은 악어 형상의 괴물인 것 같다. 

1. 오늘의 실용적 관점에서 베헤못과 리워야단 같은 음울한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이뿐이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다. 고난은 욥에게 리워야단 같은 것이다. 

2. 리워야단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욥기 41장에서 리워야단은 인간이 더불어 싸울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리워야단을 만나게 되면 "절망만 감돌 뿐" 이다(욥41:22).

고난 앞에 우리는 그렇게 무력하다. 욥기 1장에서 욥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져버렸음을 보았다.  고난 앞에 서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3. 사람들에게 불길함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이 음울한 피조물을 포함하여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 하셨다(욥41:11). 

우리의 인생의 바다에도 리워야단은 존재한다. 이것을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이를 통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우리는 리워야단을 통해서도 영광받으실 하나님을 믿는다.

6/26/14

무너지는 의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욥40:8)

욥기의 핵심 쟁점은 고난이라기 보다는 의의 문제다.  고난이 임하자 친구들은  그의 의로움을 의심했고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재판정에 불러내서라도 자신의 의를 입증받기 원했다.

욥기의 결말에서  하나님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38장)과 동물들(39장)에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씀하시면서 욥에게 들이대신 문제도 바로 의의 문제였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표적인 거대한 동물들 두가지-베헤못과 리워야단(40-41장)-를 말씀하신다. 

거대한 자연의 현상들,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들, 거대한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언급 사이에  태풍의 눈처럼 의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욥은 자신의 의를 결코 양보할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의 의를 입증받고 싶었다. 아니 확신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욥은 자신의 작음을 체감해야 했다. 하나님의 거대함 앞에 서자, 자신의 존재도, 그렇게 투쟁하며 싸웠던 자신의 의라는 것도 한없이 작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의와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하나님 앞에 서자 그의 의는 무가 되었다. 하나님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욥의 경건과 의도 하나님의 거대함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욥은 비로소 자기의 무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항복한다. 바로 그것이다. 그가 배웠던 교훈, 그가 고난을 값지불하고 배운 보석같은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복음의 핵심 이슈를 만나게 된다. 복음은 우리의 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의를 내려놓는 항복이 없이는,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진정 만났다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자기 의를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6/25/14

까마귀의 하나님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38:41)

욥기 38장과 39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인간들만의 하나님만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바다와 하늘의 별들과 광야를 "강보"에 싸듯 보살피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야생동물들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까마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까마귀의 하나님도 되신다. 

우리는 너무도 인간 중심이어서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 일하신다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그러나 오늘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야생의 동물들을 세심히 보살피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중심이 인간의 구속사라는 것을 의심치 않지만, 하나님의 활동은 거기에만 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도 그분의 손길 아래 있고,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분의 보살핌 아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6/24/14

광야에서 우주를 만나다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욥38:26-27)

욥기 38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욥기 38장 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질문은 영어 성경에서 보자면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된다.  "Have you..." "Can you..."  "Do you know..."로 시작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의 경험, 우리의 능력,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파악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이 하나님의 질문 시리즈는 고난의 문제 역시 인간의 이해영역 바깥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욥기 38장의 하나님이 언급하신 광대한 자연의 현상 리스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것이 있는데 사람이 없는 광야와 황무지들에 대한 언급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다른 것들을 이해하는데 빛을 던져준다.

광야와 황무지는 사람들이 거하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이 없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비를 내리시고 풀을 돋아나시게 하시며,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다. 

사람들에게 설명도 없으셨고, 일일히 사람들에게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일러주지도 않으셨지만 그분은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광야에서 우주를 볼 수 있다. 잊혀진 땅에서 일하셨듯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우주 만물의 질서를 정하실 때도 홀로 일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적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영역 바깥에서 여전히 일하시고 계신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활동정지된 것 처럼 여긴다.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당장에 어떤 설명이 없으면 하나님이 방관하시고 계신 것 처렴 여긴다. 

욥기 38장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도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바다의 샘, 하데스의 문, 광명과 흑암의 갈림길, 동풍이 시작되는 지점, 눈의 곳간과 우박창고, 북두칠성과 오리온 성좌와 큰 곰자리 별 사이 등을 거니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그분은 그분의 스케일대로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에서도 그분의 일을 하고 계신다.

6/23/14

떨림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욥37:1)

떨림. 이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에 찬 하나님을 의식함에서 오는 떨림이다. 36장 후반에 이어 37장에서 엘리후는 이 초월자 하나님을 그린다.

그분의 음성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1-5절), 그분의 말씀에 눈과 폭풍우가 온 지면에 쏟아지고(6-9), 그분의 입김에 천하가 얼어버리고 우박이 떨어지며(10-13절), 그분의 완전한 지혜는 겹겹히 쌓인 구름 사이에 경이롭게 펼쳐지고(16절), 그분의 위엄은 황금 빛처럼 찬란하다(21-22절).

하나님의 위엄은 우리를 떨리게 만든다. 그분은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하며, 아무 말도 토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 조차 없는 위엄 속에 계신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엄과 신비에 대해 "그대는 아는가"를 반복하며 욥을 추궁한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로 마지막 충고를 남긴다(24절).

욥을 향한 마지막 충고는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충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욥처럼 생각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며, 떨림으로 그 분 앞에 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떨림은 하나님의 존재로 압도되어 엎드리는 떨림이다.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음에서오는 떨림이다. 내 앞의 존재가 너무 크면 그분의 자상한 손길에도, 온화한 미소에도 우리는 떨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 너무 친숙하여 그분이  두렵고 떨림으로 만나야할 하나님임을 잊을 때가 많다. 우리에게 이 떨림이 필요하다. 이 떨림에서 예배가 나오며, 이 떨림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항복이 나오고, 이 떨림에서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생긴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성경의 처방은 고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그래서 그 분 앞에 떨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서게 하는 것이다. 

이 떨림을 공동번역에서는 보다 원어에 가깝게 리얼하게 묘사했다.
"그 생각만 하면 이 염통이 떨다 못해 퉁겨나가기라도 할 것 같소"(욥37:1)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떨림이 있는가?

6/21/14

인간의 책임을 넘어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욥의 세 친구들이 프로이드를 닮았다면, 엘리후는 현실요법의 주창자 윌리엄 글라서를 닮았다. 프로이드가 과거의 무의식적  원인에 치중했듯 욥의 세친구는 욥의 고난의 원인을 추적했고, 욥의 숨겨진 범죄가 그 원인이라 생각했다.

윌리엄 글라서는 무의식적 본능이나 잠재의식 같은 것 보다는 당면 문제의 현실적인 의미와 책임이 더 중요하다 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의 원인 같은 것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난이 주는 현실적 의미를 살핀다. 엘리후에게 있어 고난은 우리를 각성시키고 단련하는 기회다. 

욥기 36장에서 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난의 시간은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9절),  귀를 열어 그의 음성을 듣고(15절), 높은 곳에 권능으로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할 시간이다(22절). 엘리후는 고난의 이유를 찾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글라서처럼 엘리후는 인간의 책임과 선택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을 결단하고(11-12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13절), 주권자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24절).

그런데 엘리후는 글라서가 가보지 못했던 지점까지 우리를 안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엘리후의 최후진술은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를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와 섭리의 세계 앞에 서게 함으로 그분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외감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 감동하고 그의 크심 앞에 엎드리며, 그의 주권 앞에 손을 들고, 그의 지혜 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예배의 자리가 고난을 헤쳐나가는 우리가 결국 찾아 가야할 곳이며, 우리가 영원히 자리잡아야할 곳이다. 

6/20/14

저 멀리 계신 하나님?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35:6-7)

이 말은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욥의 푸념에 대한 엘리후의 답변이다. 엘리후는 욥이 진술은 인간이 자신의 경건으로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진단했다. 

엘리후의 진단이 욥에겐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겐 적중될 때가 많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도,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도,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를 명하신 것은 그분의 필요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헌금을 말씀하심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며, 찬양을 명하심은 칭송에 굶주리셨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존할 필요가 없는 스스로 계신자다.

엘리후는 우리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 해도 하나님께 어떤 유익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점에서 엘리후는 옳았다.

그러나 엘리후가 간과한 것이 있다.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의미를 가진다.

나의 죄가 그를 분노케 하며, 우리의 헌신과 성장이 그를 기쁘시게 한다. 신문지상의 범죄기사가 나에겐 작은 반향도 던지지 않을 수 있지만, 자녀의 거슬리는 행동 하나가 나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라면 십자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 삶에 개입해 들어오셨다.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전 우주의 초월적 통치자가 작고 미약한 나와의 관계를 위해 엄청난 값지불을 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6/19/14

논리의 함정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욥34:36)

엘리후가 본 욥의 문제는 두가지였다.
1.자신은 의로우나 하나님은 이를 부정하시고 자신을 죄인취급한다고  여기는 것( 5-6절)
2.하나님 앞에서 경건과 도덕은 결국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9절)

엘리후의 입장에서 욥의 무죄주장은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경건과 도덕의 폐기를 조장하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논리로 답변한다.

1.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다(10-12절).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공의를 굽게하지 않는다.

2.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다(13-16절). 온 땅의 통치자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면 누구라도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3.그의 절대주권은 정의에 기초했기에 그의 심판은 늘 정당하다(17-30절).  

하나님이 정의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라면 우리를 다스릴 자격이 없는 분이라고 말한 후(17절), 엘리후는 가상의 "그들"을 예를 든다. 욥기 34장은 계속 "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정체는  왕이나 고관들, 혹은 부자들이다(18-19절).

그들이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임과 "제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20절) 사람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21-22절). 

"오래 생각하실 것도 없이"(23절), "조사할 것도 없이"(24절) 그들의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 길을 떠난 것과 가난한 자들을 억압한 것을 알고 계시기에(27-28절) 그들을 심판하여, 그들이 "백성들을 옭아매지 못하도록" 하셨다(30절)는 것이다.

"그들"의 심판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정당한 것이고 정의였다면, 욥에게 일어난 일도 하나님께는 정당한 것이며, 하나님은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불의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후의 입장에서 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다. 회개다(31-33절). 그에게 욥은 "악인과 같이 되었고" "반역했고"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36-37절)

엘리후에게 욥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하나님께 고통스럽게 자신의 질문을 던질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엘리후의 논리 속에는 욥의 아픔이 설 자리가 없고, 너무나 명확한 진리 앞에 욥이 그저 엎드려 회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엘리후의 하나님은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인간이 고통하고 신음할 수 있는 여지와 여백까지 남겨두지 않는 기계적인 하나님 처럼 여겨진다. 엘리후의 논리 속에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리스도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엘리후는 말한다.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그 엘리후의 모습에서 오늘의 우리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은 어찜인가?

6/17/14

고침받기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욥33:19, 새번역)
 
우리 모두는 고침받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고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를 고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의 자기 개발서들은 우리들은 스스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 희망이고 거짓 복음이다.
 
자신의 변화를 위해 정말 몸부림쳐 보지만 우리 내면엔 견고한 진이 있음을 발견한다. 쉽게 무너지지도, 정복당하지도 않으면서 항복하는 체 하다가도 틈만 나면 다시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마는 내면의 진지를 본다. 이것들은 너무도 견고하여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고 결국 고난의 자리까지 가야 무너진다.

고난이 없으면 잘 변화되지 않는 우리들의 완고함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신다.

질병(19절)을 허용하시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자리(22절)까지 가게도 하신다.

죽음의 문턱은 어떻게 하든 우리를 빚어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고통이 클수록 거기서 그만큼 우리를 향한 강렬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게된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고 이를 즐기는 가학적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고난을 허용하시지만, 결국은 다시 회복시키시기 원하시는 회복의 하나님이다.
 
33장 후반부에는 회복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25절은 육체적인 회복을, 26절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뵙는 영적 회복을, 27-28절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찬양의 회복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망가짐 그 이상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고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고난을 넘어 회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이다.

6/16/14

경고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33:16-17)

엘리후는 고난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입장을 가진다. 세 친구는 고난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엘리후는 고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세 친구는 욥의 죄가 고난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였지만, 엘리후는 경고의 신호일 수 있고, 잘못을 고치며 교만을 막으시기 위함이라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잘 못보는 경향이 있다. 남들의 티끌을 보지만 자신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한다. 어느새 나에게 쌓여있는 교만과 질투와 욕망의 실체를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낼 수 있다. 

그러다가 고난을 통해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문제없었던 자신 속에 곪아터진 실체를 만나게 된다. 

확실히 낮을 대로 낮아져야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고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고난을 통해 낮아져서 깨닫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겸손케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분명 엘리후의 관점은 새로운 것이며,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교훈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욥의 고민하는 바에 대한 대답일까?

6/14/14

나이 듦과 지혜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32:9)

폴 투르니에는 노인의 영광은 힘이 아니라 지혜라 했다. 어느 공동체건 시간이 지나가면 원로들이 생겨난다. 그분들에게 젊은 시절의 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연륜의 지혜는 공동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엘리후는 "어른이라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아름다운 노년의 준비는 지혜의 우물을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나이 듦에 따라 축적된 경험들을 바람에 나는 겨처럼 흩어지게 하는 것은 너무 아쉽다.  사람들이 와서 길어 먹을 수 있는 우물 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가둬진 물은 썩기 쉽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우물 물이 썩지 않도록 공돌을 배치하여 돌 사이 물길을 만들고, 물들의 흐름과 부딪힘을 기획하여 우물 물을 늘 신선하게 하였다. 

그저 물들이 많이 고여있는 것만으로는, 그저 경험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경험 많음이 해악이 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물 물을 늘 새롭게 해야한다. 그 새로움은 성령으로 우리의 경험들을 비추어 보고,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경험들을 재조명할 때 주어진다. 

엘리후는 노인 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32:8).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자. 하나님은 숨결로 함께하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

6/13/14

페르소나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욥31:27-28)

욥기 31장은 재판정을 연상케 한다. 욥은 자신에 대한 고발장을 스스로 쓰고, 스스로 무죄를 주장한다. 

욥의 고발장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돈을 의지하는 것, 재물의 많고 적음에 일희일비하는 것, 아름다운 경관에 압도되어 슬며서 자연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재난을 기뻐하거나 그들의 파멸을 구하는 것, 두려움 때문에 그렇지 않아야될 때 그냥 침묵하는 것 등등(24-34절).

 이것들은 다른 이들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가려진 우리들의 모습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더 정확히 말해주는 경우들이 많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이 있다. 우리의 진짜 인격을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들이라 말한다.

원래 인격이란 말은 '페르소나'(persona)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 연극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뜻한다.  배우가 가면을 쓰고 어떤 이의 성품과 역할을 드러내기에, 가면을 그를 특징지워주는 인격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모습이 우리의 참 인격은 아닐 수 있다.  글자 그대로 가면일 수 있다. SNS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가면을 쓸 수 있다. 

성경은 인격의 지성소는 마음이며, 진정한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예수님은 우리의 종교가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속은 더러운 사람들을 양산할 수 있음을 꼬집으셨다. 

복음은 마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회심이다.

참 인격의 척도는 드러나지 않는 사적 공간에서 돈에 대해서, 이성에 대해서,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도 보는 이 없었던 무화과 나무 아래의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를 제자로 삼으셨다.

6/12/14

강자의 도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욥31:16)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강자와 약자가 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 성경은 부자와 강자를 무조건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자 아브라함을 만나고 권세자 다윗도 만난다.

그러나 강자의 위치에 있되 강자의 도를 지키지 않는 것은 간음의 죄 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욥기 31장은 그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강자의 도는 관대함(generosity)이다.  
욥은 자신이 약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혼자만 누리거나 그들의 필요를 못본체 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말한다(13-23절).

욥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가지다:

1. 사람들에 대한 일체감 
고대사회는 현대보다 훨씬 사회적 계층구조가 엄격했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욥은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15절) 말한다. 

2.하나님께 대한 경외감
욥은 약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두려운 일이라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23절)

야고보는 낮은 자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라고 권면했다(약1:9-10). 하나님 앞에서 높고 낮음은 없다. 이 세상 살면서 다른 사람보다 잠시 더 높다면, 낮은 자를 섬기라는 소명이다.

6/11/14

낮아짐

욥기 29장의 욥은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재산이 풍부했고, 사회적 위치가 있었고, 사람들에겐 존경과 환영을 받았다.

30장은 몰락한 욥이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조롱과 멸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낮아지게 되는 때가 있다. 친구들은 낮아짐의 원인을 욥에게 찾았고, 욥은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19절).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때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순간에 낮아져서 엎드려야 있어야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자녀 때문에 낮아지고, 어떤 때는 사역의 결실 때문에 낮아진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낮아지고 어떤 때는 들려오는 말 때문에 낮아진다.

낮아짐의 날엔 자신은 황망스럽고 사람들의 돌아섬은 씁쓸하다. 욥은 자기의 친구라곤 이제 적막한 들판의 이리와 타조 뿐이라 한다(29절).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은 잔혹하게만 느껴지고(21절), 힘으로 억누르시듯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22절).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셔야만 하는지 대답을 다 듣지 못한다. 욥도 "내가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지 않으신다"(20절)고 푸념한다.

그럴 때 사실 우리가 할 일이 거의 없다. 낮아진 상태로 그대로 있는 것이다. 아니 낮아짐과 빨리 화해할 수록 평화의 시간이 길어진다. 잔혹하고 거친 손이지만, 전능자의 손이기에 피조물인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욥은 이 화해를 욥기의 마지막에 가서 이룬다. 

6/10/14

그때에는

고난의 시간에 욥이 그리워 했던 것들: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들(2-3절)
원기왕성함(4절)
그를 둘러앉아 있는 자녀들(5절)
모든 것이 풍요로왔던 시간(6절)
사회적 명성(성문에 앉음)(7절)
사람들로 부터 받았던 존경과 칭찬(7-11절)
아무도 그의 선행을 의심할 수 없었던 시절(12-17절)
편안한 죽음을 예상했던 평화로운 시간들(18절)
사람들에게 끼쳤던 그의 말의 영향력(21-22절)
어디를 가든 환영받음(23절)
그의 미소만으로 사람들에세 힘이 되던 시기(24절)
마치 왕이 된 것 같았던 그 시절(25절)

우리 모두에겐 '그 때'가 있다.
욥과 같은 엄청난 고난을 겪지 않아도 
나이듦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멀어짐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때가 있다.

당연하다 여겨지던 것이 그렇게 값진 것임을 꼭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우리다.

오늘의 일상을 감사하자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교훈이면서도 그 진정한 가치를 꼭 상실의 시간까지 가야만 실감하는 것이 우리다.

하나님, 오늘의 모든 것,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6/09/14

지혜논쟁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욥기의 주제는 고난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지혜논쟁이 벌어졌다.

지혜논쟁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신다"(5:13) 라고 욥을 책망함으로 포문을 열었다.

소발도 하나님이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한다"(11:6) 함으로 이에 가세했다.

욥도 가만있지 않았다.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12:2),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13:5)라고 응수한다.

엘리바스는 다시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15:8)라고 욥을 공격하고, 이에 욥은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17:10)라고 응답한다.

세번째 지혜논쟁은 빌닷으로 시작되었다. 빌닷의 입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 할 수 있느냐 말하며, 지하세계를 다스리시고 바다의 라합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을 말한다(욥25-26장).

욥은 이를 지혜 자랑이라 비아냥거린다.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욥26:3).

욥기에서 지혜문제가 계속 대두되는 것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고난의 이유를 헤아리는 것을 지혜로 본 것이다.

욥에게 그것은 하나님안에 꼭꼭 숨어있어서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욥기 28장은 세부분으로 나뉜다.

1-14절에서 사람들은 땅 속에 묻혀있는 보석을 기가막히게 찾아내지만, 정작 지혜는 찾아내지 못함을 말한다.

15-22절에서는 지혜는 아무리 값진 것을 치룬다 해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23-28절에서 지혜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 욥의 고민은 그 하나님이 그에게 숨어계신 것이다. 

숨어계시기에 지혜를 만날 수 없고,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듣지 못한다. 계속 무지의 밤이다. 

그런데 그 무지의 밤에 들려온 한마디가 있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라는 말씀이다. 

이는 지혜는 숨겨져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것이 지혜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라는 말씀이다.

욥은 끝까지 대답을 듣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대답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이미 사탄은 1장에서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의구심을 표했다. 

역설적으로 사탄의 말 속에 가장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까닭없이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며 그것이 성숙이다.

6/07/14

그리스도인은 무골호인?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욥27:2)

만일 우리 시대에 욥을 만난다면 사귀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 같으면 친구들과 그렇게 긴 논쟁을 하기 보다는 내 입장을 적당선에서 양보하고 싸움을 피했을 것 같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논쟁할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친구들이 서운한 얘기들을 했다고 해서 그들을 원수라고 부르고 그들에게 저주까지 쏟아내는  것은(27:7절이하)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논쟁에 끌어들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어하는 모습은 경건한 사람의 이미지로 보기가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욥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의 우리는 너무 순화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내 입장을 꾿꾿히 주장하기 보다는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미덕이라 배워왔고 그래서 신앙좋은 사람이란 무골호인 같은 이미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욥의 이미지는 확실히 다르다. 욥은 이제 맹세까지 해가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정당함을 물리치시고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셔도"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다(2절).

욥에게 이것은  절대 포기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자신은 친구들을 결코 옳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죽기 전에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무죄하다는 자신의 입장을 굳게 잡을 것이라 말한다(27:5-6).

13-23절까지 악인들에 대한 다양한 심판과 저주를 말하는 것도 만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악인으로 판명된다면, 자신이 그 저주를 다 받겠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런 욥의 이미지는 얼른 소화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 소화불량은 우리 시대의 신앙인의 이미지란 것이 너무 편안한 이미지로만 길들여져서인지 모른다.

6/06/14

하나님을 위한 열심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소발은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거냐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반문한다(25:3-4).

많은 성서학자들은 욥기 26:5-14은 소발의 말로 26:1-4절의 욥의 말 앞에 와야 맞다고 생각한다. 26장 5절 이하는 지하세계와 우주만물의 신비스러운 영역 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 선언한다(26:14).

어찌보면 소발의 말은 공감이 되고, 하나님을 위한 변론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욥은 이를 지혜자랑으로 받는다.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26:3)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실상은 우리 자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거창한 비전과 구호를 외치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들을 펼칠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구하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마귀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은 극히 선한 것들이다. 지극히도 선한 것을 변질시키고 탈색시키고, 목적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성(sex)은 선한 것이지만 잘못사용하게 하고, 지혜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독으로 변질시키고 위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인간의 야망으로 바꾸치기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 해도 거기에 우리들의 찌끼가 들어있는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렘45:5)

6/05/14

하나님의 시간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욥24:1)

욥기 22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죄인됨을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23장에서 욥은 언젠가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알아주실 것이라 대답한다. 이어서 24장에서는 그 때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함을 노래한다.

욥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의 제 현상을 조목조목 열거한다(24:2-16). 그리고 친구들이 말한 바 악인의 심판은 반드시 임해야한다고 말한다(17-25절). 그런데 그 때가 언젠인가 하는 것이 욥의 질문이다.

욥 뿐 아니라 우리도 이 세상의 수 많은 불의의 현장에 왜 하나님이 빨리 개입해주시지 않는지, 정의와 공평이 땅에 떨어져 있음에도 왜 하나님은 당신의 세상을 방치해 두시는지, 언제 하나님의 정의가 도래할 것인지 우리는 답답하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른 듯 하다. 내가 원하는 내 시간에 하나님의 등장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을 고집하신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당장' 예수님이 오시기를 원하셨지만 예수님은 '나흘 후'를 당신의 시간으로 정하셨다. 구약의 말미로 갈수록 고통스러운 이스라엘의 민중은 메시야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하지만, 하나님은 '400년 후'를 생각하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드디어 등장하신다(갈4:4)

하나님과 우리의 다른 시간표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도전이 된다. 우리의 시간표에서는 나는 답답한데,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당신의 시간표 대로 일하신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된다. 

6/04/14

영혼의 어두운 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어계신다. 심지어는 내가 그분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시간에도  숨어계신다. 그분이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는 시기를 신앙의 선배들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불러왔다. 

욥은 지금 그 밤을 지나고 있다. 우리도 때때로 그 밤을 지난다. 
욥에겐 그 밤이 어떤 밤이었을까?

무지의 밤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고난 속에 있는지, 하나님은 왜 숨어만 계시는지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무지의 밤이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

소망의 밤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의 소망은 더욱 간절해 진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이 그의 얘기를 들어주시고(6절), 그의 결백을 믿어주시는 것이다(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제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고백이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
금을 불 속에 넣어보면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그가 나를 털고 털어도 순금같이 나오리라'했고, 새번역은 '나를 시험해보시면 내가 흠이 없는 것을 아실 것'이라 했고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역은 '그가 나를 철저히 살펴보신다 해도 나는 영예롭게 그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라 했다.

앞장 22장에서 엘리바스가 고발하는 그런 죄인이 아님을 하나님 만은 알아주실 날을 소망한다.

그런데 그 밤은 두려움의 밤이기도 하다.
그 두려움은 어두움 때문 만은 아니라 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 했다(16-17절).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13절)
NIV는 '그분 홀로 서계시니..."(he stand alone)라고 했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주권자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기대할 수 없고 내가 받기 어려운 것도 내미실 수 있는 두려운 하나님을 우리는 그 밤에 만나게 된다.

우리의 밤엔 무지와 소망과 두려움이 뒤섞여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정갈하고 고요한 정원이 아니라
어둡고 혼란스러운 숲속인지 모른다.

6/03/14

억측의 죄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22:5절)

욥기 22장에 들어서서 엘리바스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는다. 욥기 대화 2라운드에서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모두 "악인론"을 펼쳤다. 악인에 대해 말했지만, 실상은 욥을 빗대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해도 태도 변화가 없자, 더 이상 간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욥을 고발한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5절).

욥을 고발하는 내용은 욥이 약자들을 괴롭혔다는 것(5-8절)과 은밀한 죄를 숨기고 있다는 것(12-14절), 말씀을 멀리하고(22절), 은과 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는 것(24-25절) 등이다.

욥은 말씀을 멀리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23장에서 밝히고(11-12절) 나머지 혐의는 31장에서 자신의 결백을 밝힌다. 욥 자신의 주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의 경건과 도덕성을 이미 인정하셨다(1장).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정죄는 추측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욥기 22장을 읽어보면 추측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확신에 차있다. 마치 목격담을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엘리바스의 논리에서는 이것외에 다른 출구가 없었다. 엘리바스의 논리를 위해서는 욥은 반드시 죄인이어야 하고, 그렇게 욥의 죄를 추측하고 확신했다. 엘리바스에게 욥이 다른 출구에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억측의 죄를 범한다. 우리의 주장과 의견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인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죄를 추측한다. 엘리바스가 확인할 수 없었던 욥의 죄를 확신했던 것 처럼, 추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우리의 추측은 거짓말을 잘한다. 내 눈의 진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엘리바스가 보았던 욥은 다른 출구에 있었다.

우리가 욥기에서 배워야할 것은 세상에는 다른 출구도 있다는 것이다. 욥을 죄인이라고 몰아치지 않아도 되는 출구가 있었다.

6/02/14

헛된 위로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욥21:34)

욥은 친구들의 위로가 헛된 위로라 한다. 왜 이들의 위로가 헛된 위로였을까?

첫째 들음이 없는 위로였기 때문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내 호소를 들어다오. 들어주는 것만이 위로가 되겠네"(21:2, 공동번역)라 한다. 위로의 시작은 이해다. 그리고 들음없이 상대방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둘째로, 현실과 동떨어진 위로였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악인심판론을 말하지만, 욥은 현실속에서 과연 그러냐고 반문한다. "악인들의 등불이 꺼진 적이 있느냐..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처럼 된 적이 있느냐"(17-18절)고 한다.

친구들은 당장 심판이 없으면 그 자손들에게라도 있을 것이라 하지만 욥은 "죄지은 그 사람이 받아야 한다"(19절, 새번역)고 반박한다.

욥이 느끼는 현실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매 한가지로 흙속에 눕고"(26절)  악인들이 죽을 때 보니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행렬을 따르는"(33절, 새번역) 현실이다.

이것은 욥이 느끼는 현실적인 고민이었지만, 친구들의 위로는 현실을 눈감은 원칙론이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위로는 "거짓"이라고 말한다(34절).

셋째로 친구들의 위로가 헛된 것은 원칙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인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욥의 고뇌의 궁극적 지향점은 하나님이었다. 이해가 될 수 없는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원칙의 틀로는 설명이 안되는 하나님 때문에 고민스러웠는데, 친구들은 계속 원칙론만 말하니 헛된 위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고수하는 원칙대로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며, 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셈인데, 욥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22절)고 반문한다.

위로는 새로운 만남의 장이다. 진지한 들음을 통해 고통당하는 이를 새롭게 만나는 것이고,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들의 현실적 고민과 만나는 것이며, 때로는 당황스럽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위로는 주는 것이기 보다는 받는 것이다. 고통 당하는 이와 함께 하면서 새로운 만남에 눈뜨게 되는 것이기에 위로받는 이 뿐만 아니라 위로자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눈 뜸이 없으면 우리는 헛된 위로자가 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