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13

하나님께 담대함을 갖자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사단의 전략 가운데 하나는 좋은 단어들을 오염시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랑이란 단어를 오염시키고 예배, 교제 등 기타 많은 단어들을 오염시킨다. 긍정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번영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나님께 대한 긍정적 믿음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긍정적 믿음의 적용이 거의 현세적인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든가 고난 없는 축복만을 얘기하는 것은 분명 반쪽 복음이다. 그러나 고난만을 말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질 수 있는 담대함, 당당함, 자신감, 확신, 용기를 말하지 않는 것 역시 반쪽 복음이다.

오늘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을 말한다. 배경은 구약의 제사와 관련이 있다. 구약에서 지성소는 오직 일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만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0장은 그 몇가지 이유를 말해준다.

첫째는 예수 자신이 새로운 길이 되시기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19-20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우리 영혼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이 되셨다. 그것은 새로운 길이고 살아있는 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나가는 우리 자신이 예수의 피로 정화되었기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21-22절).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염소와 황소의 피를 가지고 나가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피뿌림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 우리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많지만, 그것들로 인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의 피뿌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나가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담대할 수 있다(23절).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거절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일해주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29/13

다시 제사드릴 것이 없나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8)

이 구절은 내게 특별히 애착이 가는 구절이다. 이 구절로 인해서 회심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꽤 오랫동안 영혼의 구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때였다.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점은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현재의 나와의 연관성이었다.

그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늘의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내 삶에 개입하신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기에 고민이 되었던 것 같다. 구원을 꽤나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같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많을 것 같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도 해주셔야할 것도 많을 것 같았다.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다시 제사드릴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실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다 하셨다. 구원의 길은 이미 준비되었다. 그렇다면 단지 내가 그분께 나가면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는 깨달음이 번개치듯 다가왔다. 내게 회심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반복할 필요가 없음을 거듭 말한다. 구약의 제사 처럼 반복하는 것은 불완전을 의미하고 미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분의 일을 끝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복음의 기초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성이다. 다시 제사드릴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미진한 것도 없고 추가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미진한 것 처럼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더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완성된 십자가의 사역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반복음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충분성을 믿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7/28/13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고난의 시간에 고난 자체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이다. 욥기에서 욥을 힘들게 했던 것은 고난보다도 고난을 둘러싼 친구들의 충고였다. 욥의 고난에 대해서는 1-2장을, 친구들의 충고에 대해서는 거의 욥기 전체를 할애하는 것을 봐서도 욥기의 초점은 고난 자체보다는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욥은 친구들의 오해 앞에서 결국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침묵만 지키는 것만 같다. 이때의 욥의 심경은 이렇게 기록된다.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9)

그러나 욥은 하나님만은 자신을 제대로 알고 평가해줄 것을 확신한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이것은 미래의 길이 아닌 욥이 살아왔던 길이었다. 그가 순전하게 살아왔던 길이다. 다른 이들은 욥을 삐뚤게 보지만, 하나님만은 자기를 알아주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같이 나올 것이다". 아마 현대에 와서 가장 오역되는 구절이 이 구절이 아닌가 싶다. 욥기에서의 의미는 친구들이 아무리 나의 흠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해보시면 내가 흠이없는 순금이라는 것을 보시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전히 살아왔다는 것이 판명날 것이라는 뜻이다. 고난을 통한 성장이라는 개념은 본 구절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구절도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고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그의 말씀을 음식보다 귀하게 여겼다"(11-12절)

인생을 살다보면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의 곡해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 이리 저리 배회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를 정당하게 알아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욥은 욥23:10에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가장 위대한 대 반전은 나에게는 욥기의 마지막부분이라 여겨진다. 거기서 의인 욥의 회개로 마감한다. 그렇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자신의 순전함을 말하던 욥이 하나님 앞에 회개의 제사를 바친다.

이는 마지막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이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상황에 대한 동문서답같은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창조의 위대함과 거대함이었다. 거대한 창조물들, 태풍과 천둥과 바다의 생물들의 거대함을 말씀하시며 "그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욥에게 반문하셨다. 하나님의 거대함 앞에 인간은 먼지같은 존재다.

욥은 하나님의 거대함 앞에 자신이 주장하는 의와 주변 사람의 악의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눈으로는 사람의 차이가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람들의 악과 의의 차이점이라는 것이 미세한 먼지같고 사람들의 차이점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티끌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정당성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서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가 비로소 씻겨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크게 보인다. 다른 사람의 악이 크게 보이고 나의 의가 크게 보인다. 그러나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다른 이가 내게 준 상처도 작아지고 내가 주장하는 내 의도 작아진다.

7/26/13

많음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사람들의 종교성을 잘 드러내는 한국적 표현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일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100일 기도, 1000일 기도를 드리고, 고행을 하고 순례를 떠난다. 이들의 정성의 기준은 "많음"이다. 많을 수록 정성을 들일 것이다.

이런 종교성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하는 이들이 많다. 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하고... 이런 것들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정작 그 동기를 살펴보면 또 다른 "지성이면 감천"이다.

많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번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 한번이 인류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 구약의 제사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자주 반복적으로 성소에 가야 했지만, 예수님은 "단번에"(once for all)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본문은 말한다. 그 한번이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바꿨다.

그러므로 무엇을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많음"은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단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이디어로 하는 많은 일들, 활동들, 이벤트들, 봉사들, 섬김들 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고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확신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요17:4)

7/25/13

과정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10)

하나님은 성막, 제사, 여러 여러 의식 등을 "개혁할 때 까지" 한시적으로 허용하셨다. 온전한 것이 오면 이것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의미를 가졌다.

하나님은 과정으로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준비의 과정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들이 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은 어린 시절에 필요하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그 장난감에 집착한다면 심리적인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또 어른이 되어 필요없다고 어린시절의 장난감의 필요성을 부정해서도 안된다. 한시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그것은 우리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한시적으로 허락하시는 만남도 있다.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지만 하나님은 계획은 또 다른 만남일 수 있다. 한시적으로 하게되는 어떤 일들과 사역이 있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지만 전반전에 하던 일이 무익한 것이 아니다. 그 일들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후반전의 일을 위해 준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정으로만 허용하시는 인생의 경험이 있다. 군 복무 시절 내가 하는 일이 장차 하나님의 사역과는 상관없는 인생의 낭비처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생낭비가 아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준비되는 것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치기 일을 40년 동안 했다. 모세가 쓰임받기 전에 40년동안이나 그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낭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 관점에서는 낭비처럼 보여지는 것들이 전혀 낭비가 아니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면 성막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성막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힌트를 제공해준다. 과정으로서의 성막은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과정으로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들이 성막처럼 하나님의 비밀이 되어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7/23/13

그림자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8:5)

성경에서 그림자의 이미지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영속적인 것이 아닌 지나간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참 형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쓰여진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고(욥8:29),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시102:11) 등의 구절들은 전자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며, 히브리서의"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8:5),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히10:1) 등은 후자의 의미에서 사용된 구절들이다.

그런데 성경이 이 그림자 이미지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적용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 훼퍼는 누구보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해악이라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 땅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그림자이다.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는 없고 하늘의 충만함을 온전히 드러내는 천상적 공동체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하여 배타성으로 가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자신의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섬김과 공동체가 가장 탁월하고 중요하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도 참 형상이 아니다. 하늘의 것의 그림자들에 불과하다. 온전한 것이 오기 까지의 희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라도 그림자같이 사그러지고 영향력을 잃고 심지어 존재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서구의 교회들에서 그것을 목격했고 한국의 교회들에서 목격하고 있다.

천국과 제국은 다르다. 하나님은 구약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의 흩어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고, 흥왕했던 로마제국과 교회의 쇠퇴 속에서도 복음의 부흥을 주도해오셨다. 어거스틴은 불타는 로마 도성과 교회들을 보면서 또 다른 도성, 하나님의 도성을 생각했다. 이땅의 교회는 파괴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제국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진다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 제국이 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 작은 홀씨에서도 엄청난 생명력으로 자라갈 수 있고 세워질 수 있다.

한국 교회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편 불편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했던 교회의 역사 속에 매여있는 것 같은 우리들의 의식이다. 우리의 섬김,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는 참 형상의 그림자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섬기며 온전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천상의 예배를 아직은 맛보지 못했고, 천상의 하나님의 임재를 아직은 체험하지 못했고 천상에서 이루어질 진정한 교제를 아직은 맛보지 못했다. 아무리 큰 교회의 부흥이 오고 교회의 역사들이 있어도 우리는 역시 그림자 사역을 하는 이들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7/22/13

copy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copy)과 그림자라"(히5:8)

사람은 이해의 한계, 표현의 한계 속에 살아갈 수 밖애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상의 것들을 지상의 인간들에게 온전히 설명하실 수도 보여주실 수도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도나 성막 등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한계인지 모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copy들은 의미가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말한다. 제사장제도나 성막제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늠하고 예배를 배울 수 있지만 천상의 원본을 완벽히 재현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도 한계가 있고, 첫 언약이이 있음에도 새언약을 말씀하신 것은 첫 언약 자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지상의 성막은 천상의 성막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copy본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copy를 통해 원본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C.S.루이스는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좋은 것들이지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결국은 천상의 기쁨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기쁨은 천상의 copy일 수 있다. 폴란드 대통령을 지냈던 극작가 하빌은 감옥에서 쓴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땅에서 우리가 갖는 갖가지 책임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킨다 했다.

이것들은 천상의 것들을 가리키는 나침판이요 표지판이다. 우리는 이런 천상의 파편들을 가지고 천상에 대한 목마름을 갖게 되고 영원한 것들을 찾아가게 된다. 가정, 교회, 사랑, 교제, 예배...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천상의 것이 아닌 copy들이기에 우리에게 목마름을 안겨줄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지상의 copy들에 몰입하여 천상을 부정하거나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것들로 인간이 만족할 수 있었다면 예수는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이 땅의 제사장들로 충분하셨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옛언약으로 충분하셨다면 새언약을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8:1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천상의 성소를 섬기시는 대제사장으로 묘사된 것은 그분만이 지상에서의 한계 속에 살아가며 천상의 것들에 목말라 하던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이 되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분은 copy본 속에 있는 분이 아니시다.

7/20/13

레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7:10)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났을 때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아브라함이 십일조할 때 레위도 함께 십일조 한 셈이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을 한다.

레위가 직접적으로 멜기세댁을 만났던 것도 아니요 십일조 한 것도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사실 때문에 아브라함의 행위에 동참한 것이다.

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축복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으셨을 때 우리도 세상에 대해 죽고 그가 부활했을 때에 우리도 새생명으로 부활한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며 그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이 된다. 우리에게 의가 없어도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허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또 할 수 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 인 것 같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된다

7/19/13

멜기세댁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3)

히브리서는 예수의 제사장적 모델로 구약의 멜기세댁을 든다. 멜기세댁이 모델이 된 이유는 그의 배경과 출처를 알 수 없고, 갑작스레 등장했다는 점이다. 아론 가계의 제사장들을 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뿌리가 분명하다. 반면 멜기세댁은 오리무중 같은 인물이다. 멜기세댁의 그 신비함이 그저 좋은 제사장을 넘어서 하나님께 출처를 둔 예수님과 유사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되려면 뿌리가 확실해야 했다. 포로기 이후 아론의 자손이라는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제사장들이 대거 파직된 이유도 뿌리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완전히 무너져 헤롯 왕가에 뇌물을 많이 바치는 자들이 대제사장이 되어 한 때 대제사장이 동시에 네명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적인 뿌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의 뿌리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아비도 어미도 설명되지 않는 멜기세댁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나세렛 목수로만 그를 보던 동네 사람들은 그를 끝내 부정했고 거부했지만, 베드로 같은 이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고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행적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배경, 학위, 경험, 인맥 많은 것들이 녹아져 있다. 그러나 그것 밖에 보일 것이 없는 인생이라면 너무 빈약하다. 예수님의 행적과 뿌리는 외견상 나사렛 동네의 목수로 빈약에 보였지만, 바울은 그를 가리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 불렀다.

논문에서는 확실히 참고할 있는 출처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객관적 출처로 담을 수 없는 신비를 담고 있어야 한다. 매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신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충만이 되시며 만족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가 말한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신비를 누릴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멜기세댁은 샬롬의 왕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등장했다. 어느날 갑자기 광야의 침례 요한은 메시아이 길을 준비하는 자로 등장했다. 이들은 오늘날의 스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길을 이들에게는 그 신비가 있어야 한다.

7/17/13

기억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7)

하나님은 기억에 있어 양면성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신다 하셨는데(히8:17-18), 우리의 섬김과 사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주신다 하신다.

하나님과 우리는 반대로 간다. 살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덕이나 호의는 쉽게 잊어버리고 작은 것이라도 우리가 받은 상처는 잊지아니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기억은 의지며 태도다.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지고 우리의 선을 잊지 아니하시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지다. 우리가 어떤 의지와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억은 결국 거기에 순응된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에 명령법을 구사한다. 히브리서에서도 "생각하라"는 말이 여러번 반복된다. 우리가 어떤 것들을 주로 생각하느냐가 결국 우리가 된다. 우리의 기억에도 명령법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기억하시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다. 어떤 기억은 애써 붙잡아야 한다. 그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어떤 기억은 애써 떠나보내야 한다.

주님은 그런 우리 모습도 기억해 주실 것이다

7/13/13

존귀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히5:4)

인간의 기본 욕망의 하나는 존귀라 할 수 있다. 래리 크랩은 인간의 욕망을 사랑의 욕구와 인정의 욕구로 압축하여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존귀의 자리에 오르고 대접받는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추구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불가능해보이는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소원의 자리에 이른 이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의 힘, 생각의 힘, 비전의 힘, 긍정의 힘을 외친다.

그러나 냉혹이 말해 원해도 이룰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한다" 했다. 원해도 이룰 수 없는 존귀가 있다. 히브리서 본문에서의 이 존귀는 대제사장됨의 존귀다. 이 존귀는 부르심 받는 자라야 얻을 수 있는 존귀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도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인간이 원해서 도달한 존귀의 자리는 기껏해야 인간적인 영웅담이요 감동의 주인공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세우신 그 자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함께하는 존엄성의 자리다. 우리가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단순한 인간 성인 정도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 눈에는 나사렛의 목수정도로 여겨졌던 이가 우리 영혼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셔서 세우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존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겨야할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면 자신의 사역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존엄성을 갖게 된다. 설사 그일이 빛을 보지 못하는 소박한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존엄성이 있으면 싸구려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자기 자랑의 여지도 없어진다. 내가 원하고 애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7/10/13

굳어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많다. 그중에 한가지는 마음의 굳어짐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어른들의 회의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평소에 내가 알고있던 그분들이 아닌 것 같았다. 목사가 되어 많은 회의를 주재하면서 어린 시절의 그 느낌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분들에게도 순수했던 주님과의 첫 사랑이 있었을 것이고 복음을 처음 대할 때의 겸허함을 간직하던 시절이 있었을 터인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면서도 똑같이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익숙해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교회에 익숙해져서 어느 정도에서 굳어져버리는 것이다. 구약의 한 선지자는 반쪽만 익은 전병을 말한 적이 있다. 복음도 어느 정도 알고 교회도 어느 정도 아는데 거기서 굳어져버린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알고 익숙해졌는데 거기서 마음은 굳어졌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굳어진 이들은 자기 기준만 확고하다. 다른 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배움이 없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면 다 정죄하고 부정하려든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사람와고 싶다.


신앙은 긴 여정이다. 그 여정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굳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자.



7/07/13

광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민21:5)

우리들은 광야를 피해 살 수는 없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지나 바로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가면 좋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생의 광야를 경험한다. 홍해를 지날 때 그 유명한 미리암의 구원의 노래처럼 기쁨과 감격을 우리도 경험하지만, 고통스러운 광야 역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광야는 분명 고통의 장소였다. 배고픔과 갈증, 극한의 더위를 경험해야했고, 갑작스러운 아말렉의 습격도 경험했다.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시는가?

우리는 그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런데 광야에서 누리는 한가지 축복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등의 기적들을 경험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곧 원망하고 불평하고 마는 우리들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상황을 더 많이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발견한다. 만나의 감격이 쉽사리 "우리는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는 원망으로 바뀐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다짐해놓고는 곧 바로 시내산 밑에서 우상을 만들어 놓는 우리들의 보게된다.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며, 또 우리들의 이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 광야에서 광야의 메마름 보다 더 메마른 우리들의 영혼을 보게되고 극한의 환경을 만나게 되면 쉽게 터져나오는 우리들의 내재된 악을 보게 된다. 우리는 광야에서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무너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우지지 않는다. 무너져 내린 우리들을 보면서 우리가 꽉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을 잡게 된다. 이것을 몇십번 몇백번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광야는 믿음을 배우는 곳이며, 그러기에 광야는 축복의 장소이다. 오늘 우리는 광야를 걷는다.

7/06/13

성육신의 리더십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7-18)

예수님의 리더십은 종의 리더십이요 성육신의 리더십이다. 하나님과 동등되신 그분은 자기를 비우고 낮춰 우리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 말한다.

한편 우리들은 리더의 차별성에 집중한다. 리더는 탁월성으로 일반인과 달라야 하고 그들의 대우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 총수가 넓은 사무실과 최고급 승용차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인기스타와 운동 선수들이 일반인의 몇 십배, 몇 백배의 연봉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선망한다.

물론 모든 사람의 삶의 조건을 획일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고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특권과 권리를 포기한다고 고백 했다면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에게 섬김은 사람들과의 동일시였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들은 예수님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형제된 자리를 즐기셨고 우리들의 고난의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들과의 동일시의 자리, 우리들의 고난의 자리에 함께 계셨기에 우리들을 능히 도울 수 있다 말한다. 리더십은 성육신의 자리에서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