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14
7/30/14
엄격함과 형제애 7월 30, 2014
7/29/14
당황스러운 지침들 7월 29, 2014
7/28/14
사람들에 대한 신뢰 7월 28, 201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살후3:4)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쓴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생사를 건 교회개혁은 목회자와 장로의 문제였다. 결국 그분은 그 교회를 사임하셨다. 한국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십의 갈등문제로 곳곳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이 확신은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하여는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갈5:10) 했고
빌레몬에 대해서도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1:21)라고 기록한다.
관계의 기본은 신뢰다. 목회자로서의 바울은 교인들을 신뢰했다.
바울이 교인들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심지어 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가졌던 이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앞뒤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는 미쁘사..."(살후3:3)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살후3:5)
바울이 교인들을 확신했던 근거는 주님의 일하심이었다. 주께서 그들가운데 일하시기 때문에 교인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주님의 일하심을 믿고 사람을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세라 생각한다.
7/26/14
사람을 보는 관점 7월 26, 2014
7/25/14
세상과 하나님 7월 25, 2014
7/23/14
그날에 7월 23, 2014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벧전1:10)
구약 선지자들은 '주의 날'을 고대했었다. 그날은 양면성이 있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고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신약의 성도들 역시 "그 날"을 기다린다.
살후1:6-10은 그날의 정체를 밝힌다.
그날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날이다(7절).
그날은 믿는 이들에게 안식의 날이다(7절)
그날은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다(8-9절)
그날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날이다(10절)
그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다(10절)
우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7/22/14
자랑스러운 교회 7월 22, 2014
데살로니가 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자랑스러워했던 교회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라고 했다.
바울이 이 교회를 자랑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거나 큰 건물과 시설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다. 혹은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 교회도 아니다. 바울은 매우 짧은 기간 이 지역에 방문하여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는 거의 자생적으로 자라갔다. 그렇다고 이 교회를 통한 무슨 큰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울이 이 교회를 자랑했던 것은 그들에게 가해진 박해에도 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잘 견뎌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인내하며 버티는 것인지 모른다. 삼십대 초 목회의 현장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함께하던 동역하던 한 형제의 "때로는 버티기만 잘해도 위대한 일을 하는 겁니다"라는 말이 큰 격려의 말이 되었다.
어떤 교회는 위대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더 많은 교회들은 목회현실의 극한 어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견디고 있다. 아마도 이 교회들을 통해 위대한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바울이 그랳던것 처럼 하나님도 이 교회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리라 믿는다.
7/21/14
고난과 마귀 7월 21, 2014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신학교 시절 축구시합 중 한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그 교회 출신들이 갑자기 응원석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가 '축사'기도가 행했다. 그 교회에서는 모든 질병이나 사고도 귀신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고난의 원인은 마귀가 아니다.
그러나 고난에 처한 이들을 노리는 것은 사실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는다고 했을 때, 본문에서는 고난받는 이들이 표적이 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
마귀의 주 무기는 속임수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
마귀는 우리 자신에 대해 거짓을 말한다. 자기만 고난 속에 있다는 거짓된 생각을 주어 하나님과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한다.
본문에서 마귀를 대적하라 함은 마귀가 주는 생각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만 고난에 처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벧전5:9)는 것이 진실이다.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거짓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에 무관심하다는 거짓된 생각을 주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한다. 마귀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벧전5:7)이 되신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굳게 하시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벧전5:10)이 되신다는 것이 진실이다.
고난의 때는 마귀가 우리를 노리는 순간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귀가 주는 거짓된 생각들을 대적하기 위해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7/19/14
고난과 공동체 7월 19, 2014
7/18/14
고난과 위로 7월 18, 2014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고난 당할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 오늘의 묵상본문 벧전4:13-19에서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만난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 14절에서는 성령님, 19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언급된다. 늘 함께하시는 분이시지만, 고난 중엔 특별히 우리를 만나주시며, 그것도 삼위 하나님이 총출동하신다.
우리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함께 있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7/17/14
고난의 위기 7월 17, 2014
7/16/14
고난의 유익 7월 16, 2014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시편기자는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다. 고난의 유익은 많다. 그 중 한가지는 고난을 통해 영혼이 정화된다는 것이다.
고난은 죄의 문제를 정리하게 하고, 더 이상 인간의 욕정에 따라 살지 않도록 우리를 정화시킨다(벧전4:1-2). 반대로 생각하면 인간의 죄와 욕정은 스스로 정화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안엔서 죄씻음을 경험했다 해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옛습관의 문제, 찌끼같이 남아있는 인간의 욕심과 욕정들, 다듬어지지 않은 우리들의 감정들, 아직 끊어지지 않은 중독적인 행동들이 남아 있고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복음을 만나기가 어렵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하다. 성령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하는 이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안엔 뿌리 깊은 '견고한 진'들이 있다. 성령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찌끼들을 제거하신다. 고난으로 남은 욕심을 제하고, 남은 견고한 진들을 부수신다. 고난이 아니면 깨지지 어려운 것들이 깨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가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분은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기 원하시면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만일 깨닫지 못하면 깨달아질 때까지 고난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7/15/14
고난과 십자가 7월 15, 2014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고난을 위로하던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죄없으신 분이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고난받으셨음을 강조함으로, 이유없는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둘째로 고난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왔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드었다(21절).
고난 이후 예수님이 가신 두 장소를 비교해서 언급한다. 바로 옥(prison)과 하늘이다. 옥에는 '복종치 아니하던 자들'(20절)이 있고 하늘에서는 모든 천상의 존재들이 '그에게 복종'한다(22절).
베드로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비그리스도인들의 별칭은 '복종치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복종치 않던 자들에게 그분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분께 복종하는 이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 역시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종종 고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길 끝에 믿영광의 주님이 계심을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이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하다.
7/14/14
선과 양심 7월 14, 2014
7/12/14
부르심 7월 12, 2014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기독교 신앙은 부르심을 강조 한다. 부르심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부르심 있다는 것은 그 이전의 계획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우리 인생을 계획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우연인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을 위한 부르심과 삶을 위한 부르심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선교사가 되는 것, 목사가 되는 것, 혹은 어떤 분야의 직업적인 헌신을 하는 것은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것,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예수님이 "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요17:4) 하신 것도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삶을 위한 부르심도 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받았고 말한다. 골로새서 3:15에서는 한 몸됨을 위해, 살전4:7에서는 거룩함을 위해, 딤후6:12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벧전2:21은 고난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이들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않고 오히려 복을 빌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는 이들로 부르심받았다.
부르심은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들, 화해의 악수를 꺼내기가 어려운 이들...이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복을 비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다.
삶을 위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역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전도나 제자양육 등의 사역의 열매 뿐 아니라 인격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축복이다. 오늘의 본문은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부르심의 목적을 밝힌다. 축복된 인생의 비밀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매일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현장이다.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있고 악을 복으로 갚을 수 있다. 우리를 욕하고 악하게 대하는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부르심의 현장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에 주목하신다
7/11/14
단장 7월 11, 2014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오늘의 본문(벧전3:1-6)은 아내들에 대한 권면이다. 여인들에게 기대되는 한가지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본문의 '단장'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러나 비단 여인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름다움일 것이다. 신앙은 옳음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옳은데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심이 뜨거운 것 같은데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복음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본문에서의 아름다움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아름다움이다. 아내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을 위해 단장하듯 우리의 아름다움은 내 곁에 있는 자들에게 나타야 한다.
이 아름다움은 믿지않는 이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아내의 아름다움이 믿지않는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오늘의 본문은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값진 것으로 인정받는 아름다움이다. 창세기에서 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런 아름다움엔 두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외적인 것이 아닌 마음가짐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겉으로 꾸미는 아름다움은 생명이 길지 않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가꾸는 것은 은은하지만 오래간다.
본문에서 강조한 마음의 온유함이 그런 종류다. 온유한 마음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긴 여운을 준다.
둘째는 태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본문은 아내의 아름다운 태도로 순종을 꼽았다. 베드로는 순종이 아름다운 단장이라 말한다. 마음은 태도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태도들이 있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 부하직원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보살핌, 마음 아픈 사람들을 헤아림, 이웃에 대한 넉넉함..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이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성경의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인 동시에 아름다움을 즐기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은 기능적으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아름답게 설계됨을 봐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을 감상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하루이기를....
7/10/14
본과 구세주 7월 10, 2014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기독교 소설의 원제 In His Steps는 이 구절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따라야할 본이었다.
유명한 기독교 고전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자취라고 말한다. 그분처럼 우리도 고난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분처럼 고난을 악으로 갚지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기독교 기본진리'에서 이 본문만큼 구세주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되심을 말하는 맥락에서 24절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하는 죄사함의 대속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초대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확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 비의도성이 예수님이 단순한 본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구세주되심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임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본이 되신 예수와 구세주 예수는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 되는 동시에 길을 잃은 우리가 돌아가야할 영혼의 목자가 되신다(25절).
우리들은 예수님을 갈라놓기를 좋아한다. 예수의 구속을 배제하고 따라야할 본으로만 추종하는가 하면, 구세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그분의 본을 따르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내부의 양 끝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더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다. 복음은 하나다.
7/09/14
시민과 그리스도인 7월 09, 2014
7/08/14
버린 돌, 걸림돌, 머릿돌 7월 08, 2014
7/07/14
현실과 영성 7월 07, 2014
7/05/14
상실 7월 05, 2014
7/04/14
얄팍한 복음주의에서 벗어나려면... 7월 04, 2014
7/03/14
다시 붙잡아야할 복음 7월 03, 2014
7/02/14
무조건 기뻐하기 7월 02, 2014
무조건 기뻐하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 구절을 가리켜 성령받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한 적이 있다.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세상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은 '여러가지 시험'(6절)을 받는 상황에 대해 말한다. 이럴 때 보통 위축된다. 그런데 기뻐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 믿음의 '확실함' 때문이다(7절).
당시 많은 신자들은 박해를 당하면서 자신들이 헛된 것을 믿고 있는 것을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이 입증될 '칭찬과 존귀와 영광'의 날이 될 것이라 말한다.
믿음의 신비 때문이다(8절)
눈으로 보이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안다. 이 신비를 알기에, 현재의 눈에 보이는 고통을 넘어서 기뻐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의 결국을 알기 때문이다(9절)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끝이 어딜까 생각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스러움에 사람들은 흔들린다. 그러나 '구원'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고통의 끝날이며, 믿음이 승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올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기쁨은 믿음의 증거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무조건 기쁘게 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