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14

기쁨을 주는 사람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1:7)

빌레몬이라는 사람에 대해선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이 사람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를 동역자로 칭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요(1절) '기쁨과 위로'(7절)를 주는 사람이요,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표현한다(4절).

빌레몬은 개인적으로 바울을 따뜻하게 대하고, 바울의 선교사역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빌레몬이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평안케 하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목회의 현장에 있을 때 목회자인 내게 개인적으로 잘 대해주는 교우들을 만났었고 목회의 큰 격려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목회자인 내게 가장 큰 기쁨은 교우들이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을 볼 때다.

주님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역의 어떤 열매가 그분께 기쁨을 드릴 수 있지만,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고 성숙하는 것이 아닐까?

요한삼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쓴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1:4)
 

7/30/14

엄격함과 형제애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3:14-15)

작년에 ㄱ자 교회인 금산교회를 방문했을 때, 1921년도 이 교회의 회의록이 눈에 들어왔었다. 

"김 아무개와 김 아무개 모친은 가정불화에 관하여 권면하고 김 아무개 댁 김 아무개는 부모 불효와 주일 범하므로 회개할 동안 성찬 불참케 한다. 김 아무개는 주일 범하므로 권면하고 이 아무개는 도박한 일로 출교하고 박 아무개는 귀신 공경하므로 출교하고 김 아무개는 도박일로 학습 제명하고 ...”

초기 한국교회에는 엄격함이 있었다. 바울도 순종치 않는 자를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권한다. 그리고 엄격함 속에서도 형제애를 잃지말 것도 당부한다.

우리는 이 엄격함과 형제애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7/29/14

당황스러운 지침들

오늘의 묵상본문 살전3:6-12에서 오늘의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운  바울의 권면을 만난다.

1."...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형제를 떠나라니?  같은 교인이라도 가까이 하지 않아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이다.

2."누구에게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말씀에 따르면 값을 치루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누구에게든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서도,  당연시도 말아야 한다.   

3."...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 형제들이 자기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든 안하든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런 자들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며, 일하도록 권해야 했다(12절).

게으름을 사적 영역이 아닌 신앙의 문제요 공동체의 책임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권면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이다.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오늘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지침이다. 

이로 보건데 초대교회는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현대교회보다 훨씬 엄격한 삶의 기준들을 가졌다. 성경적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익숙한 우리들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7/28/14

사람들에 대한 신뢰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살후3:4)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쓴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생사를 건 교회개혁은 목회자와 장로의 문제였다. 결국 그분은 그 교회를 사임하셨다. 한국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십의 갈등문제로 곳곳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이 확신은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하여는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갈5:10) 했고


빌레몬에 대해서도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1:21)라고 기록한다.


관계의 기본은 신뢰다. 목회자로서의 바울은 교인들을 신뢰했다. 


바울이 교인들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심지어 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가졌던 이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앞뒤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는 미쁘사..."(살후3:3)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살후3:5)


바울이 교인들을 확신했던 근거는 주님의 일하심이었다. 주께서 그들가운데 일하시기 때문에 교인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주님의 일하심을 믿고 사람을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세라 생각한다.

7/26/14

사람을 보는 관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사람은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의 배경이나 성격, 그의 지위 혹은 부, 그의 학식이나 인간관계, 혹은 그의 업적 등의 관점에서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렇게 보는 바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형제들. 형제들은 세상의 수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이다. 

2. 성령께서 위하여 일하시는 형제들.  형제들을 성령께서 거룩을 위해, 성숙을 위해 일하시고 있는 사람들이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을 형제들.  지금의 그들은 초라할지 모르나 언젠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을 이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귀하지 않은 형제들이 어디 있으랴...

7/25/14

세상과 하나님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2:7)

막는 것, 불볍의 비밀, 막는 자, 옮겨질 때, 불법한 자, 강림하여 나타나심, 악한 자의 나타남, 사탄의 활동, 불의의 모든 속임, 하나님의 미혹의 역사.... 오늘의 묵상본문 살후 2:6-12에 나오는 표현들은 묵시록의 표현들이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이 세상엔 하나님의 계획들이 숨어있다.  '막는 자'의 옮겨짐, 불법한 자의 나타남, 예수님의 강림, 사탄의 활동의 때, 하나님의 미혹의 역사... 우리가 다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계획들을 엿볼 수 있다. 

이 세상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때가 되면 '불법한 자'가 나타나고, 그 때가 되기까지 '막는 자'가 활동한다. 사탄의 활동의 때가 있고, 예수께서 드디어 나타나시는 때가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탄이 활동하고, 불법한 자가 나타나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 처럼 보이나, 마지막에 주 예수께서 강림하시고, 모든 악한 것들을 폐하시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구속사이다. 성경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한다. 역사의 끝에는 '멸망'도 있고 '구원'도 있다. 심판받는 자가 있고, 구원받는 자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의 구원에 있다(10-12절).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구원의 방도를 마련해 두셨다. 진리다. 진리를 사랑하고(10절), 진리를 믿는(12절)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7/23/14

그날에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벧전1:10)


구약 선지자들은 '주의 날'을 고대했었다. 그날은 양면성이 있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고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신약의 성도들 역시 "그 날"을 기다린다. 

살후1:6-10은 그날의 정체를 밝힌다.


그날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날이다(7절).

그날은 믿는 이들에게 안식의 날이다(7절)

그날은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다(8-9절)

그날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날이다(10절)

그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다(10절)


우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7/22/14

자랑스러운 교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1:4)

데살로니가 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자랑스러워했던 교회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라고 했다.

바울이 이 교회를 자랑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거나 큰 건물과 시설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다. 혹은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 교회도 아니다. 바울은 매우 짧은 기간 이 지역에 방문하여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는 거의 자생적으로 자라갔다. 그렇다고 이 교회를 통한 무슨 큰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울이 이 교회를 자랑했던 것은 그들에게 가해진 박해에도 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잘 견뎌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인내하며 버티는 것인지 모른다. 삼십대 초 목회의 현장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함께하던 동역하던 한 형제의 "때로는 버티기만 잘해도 위대한 일을 하는 겁니다"라는 말이 큰 격려의 말이 되었다.

어떤 교회는 위대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더 많은 교회들은 목회현실의 극한 어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견디고 있다. 아마도 이 교회들을 통해 위대한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바울이 그랳던것 처럼 하나님도 이 교회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리라 믿는다.

7/21/14

고난과 마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신학교 시절 축구시합 중 한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그 교회 출신들이 갑자기 응원석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가 '축사'기도가 행했다. 그 교회에서는 모든 질병이나 사고도 귀신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고난의 원인은 마귀가 아니다. 


그러나 고난에 처한 이들을 노리는 것은 사실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는다고 했을 때, 본문에서는 고난받는 이들이 표적이 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 


마귀의 주 무기는 속임수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 


마귀는 우리 자신에 대해 거짓을 말한다. 자기만 고난 속에 있다는 거짓된 생각을 주어 하나님과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한다.


본문에서 마귀를 대적하라 함은 마귀가 주는 생각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만 고난에 처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벧전5:9)는 것이 진실이다.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거짓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에 무관심하다는 거짓된 생각을 주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한다. 마귀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벧전5:7)이 되신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굳게 하시며,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벧전5:10)이 되신다는 것이 진실이다.


고난의 때는 마귀가 우리를 노리는 순간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귀가 주는 거짓된 생각들을 대적하기 위해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7/19/14

고난과 공동체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벧전5:1)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공동체다. 홀로 있어 붙들어줄 이 없으면 고난에 승리하기가 어렵다.

베드로가 '나는 함께 장로된자요 고난의 증인요'라고 했을 때, 이는 우리는 고난의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벧전5:1-6은 고난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두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사람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리더
.리더를 겸손하게 따름

이를 위해서는 리더와 따르는 이들은 모두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리더들이 주의할  3M-must, money, master-이 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의무감 때문에 하는지, 어떤 이득때문에 하는지, 군림하는 자세로 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공동체엔 언제나 선한 목자가 있다.

리더십 아래 이들은 자신들이 잘 따르지 못함이 교만 때문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가 강력하기 위해서는 리더십을 존중하고 세워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7/18/14

고난과 위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고난 당할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 오늘의 묵상본문 벧전4:13-19에서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만난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 14절에서는 성령님, 19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언급된다. 늘 함께하시는 분이시지만, 고난 중엔 특별히 우리를 만나주시며, 그것도 삼위 하나님이 총출동하신다.


우리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함께 있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7/17/14

고난의 위기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고난은 아프고 두렵다. 고난 중에 많은 것을 상실해서 아프고, 더 많은 것을 잃을까봐 두렵다. 그런데 상실 그 자체가 위기는 아닌지 모른다. 진짜 위기는 고난 중에 이웃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벧전4:7-11에서 "서로"에 대한 세가지 권면이 눈에 띈다.
1.서로 사랑하라(8절).
2.서로 대접하라(9절)
3.서로 봉사하라(10절)

본문에서 '서로'를 말함은 그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난의 위기를 엿볼 수 있다.  고난은 '서로'를 잊게할 수 있다.  자기 아픔에 몰입하여 이웃과 멀어지는 것이 고난의 비극이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만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내 이웃들의 아픔엔 눈감게 된다. 그러나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순례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이 우리를 형제 자매들과 하나로 묶어 준다. 그들도 나처럼 경이로움과 고통이 어우러진 인생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고난의 위기는 이웃을 잃어버리고 홀로 걷는 것이다. 엘리야도 영적 침체 속에서 '나만 로 남았나이다'  고백한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모두 상처난 사람들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붙들어줄 때 고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공동체는 고난의 때를 지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7/16/14

고난의 유익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시편기자는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다. 고난의 유익은 많다. 그 중 한가지는 고난을 통해 영혼이 정화된다는 것이다.


고난은 죄의 문제를 정리하게 하고, 더 이상 인간의 욕정에 따라 살지 않도록 우리를 정화시킨다(벧전4:1-2). 반대로 생각하면 인간의 죄와 욕정은 스스로 정화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안엔서 죄씻음을 경험했다 해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옛습관의 문제, 찌끼같이 남아있는 인간의 욕심과 욕정들, 다듬어지지 않은 우리들의 감정들, 아직 끊어지지 않은 중독적인 행동들이 남아 있고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복음을 만나기가 어렵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동일하다. 성령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하는 이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안엔 뿌리 깊은 '견고한 진'들이 있다. 성령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찌끼들을 제거하신다. 고난으로 남은 욕심을 제하고, 남은 견고한 진들을 부수신다. 고난이 아니면 깨지지 어려운 것들이 깨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가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분은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기 원하시면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만일 깨닫지 못하면 깨달아질 때까지 고난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7/15/14

고난과 십자가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고난을 위로하던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죄없으신 분이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고난받으셨음을 강조함으로, 이유없는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둘째로 고난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왔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드었다(21절).


고난 이후 예수님이 가신 두 장소를 비교해서 언급한다. 바로 옥(prison)과 하늘이다. 옥에는 '복종치 아니하던 자들'(20절)이 있고 하늘에서는 모든 천상의 존재들이 '그에게 복종'한다(22절).


베드로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비그리스도인들의 별칭은 '복종치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복종치 않던 자들에게 그분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분께 복종하는 이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 역시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종종 고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길 끝에 믿영광의 주님이 계심을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이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하다.

7/14/14

선과 양심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악이 승리하는가 하면 선이 외면당하기도 한다. 오늘의 묵상본문(벧전3:13-17)에서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있고(16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17절)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베드로가 말하는 선은 무엇일까? 문맥상 고난과 연관이 깊다. 소극적으로는 고난을 초래할만한 비방거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축복하고, 선하게 대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선대해도 선이 보상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설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13절)고 베드로는 말한다.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는데 왜 우리가 선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첫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베드로는 말한다(15절). 우리의 선의 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온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공평과 정의, 진실과 선함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소망하며  언젠가 주어질 하나님의 상급을 소망한다. 우리에게는 "소망의 이유"가 있다(15절).

셋째로 그것은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한다(16절).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결국엔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종종 양심을 억누르고 살던 사람들이 양심선언을 하는 경우들을 본다.  우리의 선한 양심은 잠자는 양심들을 일깨운다.

우리는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하고, 그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시작은 우리가 직면한 작은 문제들이나 우리를 향한 무고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7/12/14

부르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기독교 신앙은 부르심을 강조 한다. 부르심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부르심 있다는 것은 그 이전의 계획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우리 인생을 계획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우연인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을 위한 부르심과 삶을 위한 부르심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선교사가 되는 것, 목사가 되는 것, 혹은 어떤 분야의 직업적인 헌신을 하는 것은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것,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예수님이 "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요17:4) 하신 것도 일을 위한 부르심이다.

삶을 위한 부르심도 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받았고 말한다. 골로새서 3:15에서는 한 몸됨을 위해, 살전4:7에서는 거룩함을 위해, 딤후6:12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벧전2:21은 고난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이들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않고 오히려 복을 빌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는 이들로 부르심받았다.

부르심은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들, 화해의 악수를 꺼내기가 어려운 이들...이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복을 비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다.

삶을 위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역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전도나 제자양육 등의 사역의 열매 뿐 아니라 인격의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축복이다. 오늘의 본문은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부르심의 목적을 밝힌다. 축복된 인생의 비밀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매일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현장이다.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있고 악을 복으로 갚을 수 있다. 우리를 욕하고 악하게 대하는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부르심의 현장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에 주목하신다

7/11/14

단장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오늘의 본문(벧전3:1-6)은 아내들에 대한 권면이다. 여인들에게 기대되는 한가지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본문의 '단장'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러나 비단 여인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름다움일 것이다. 신앙은 옳음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옳은데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심이 뜨거운 것 같은데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복음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본문에서의 아름다움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아름다움이다. 아내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을 위해 단장하듯 우리의 아름다움은 내 곁에 있는 자들에게 나타야 한다.


이 아름다움은 믿지않는 이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아내의 아름다움이 믿지않는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오늘의 본문은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값진 것으로 인정받는 아름다움이다. 창세기에서 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런 아름다움엔 두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외적인 것이 아닌 마음가짐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겉으로 꾸미는 아름다움은 생명이 길지 않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가꾸는 것은 은은하지만 오래간다. 


본문에서 강조한 마음의 온유함이 그런 종류다. 온유한 마음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긴 여운을 준다.


둘째는 태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본문은 아내의 아름다운 태도로 순종을 꼽았다. 베드로는 순종이 아름다운 단장이라 말한다. 마음은 태도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리에서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태도들이 있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 부하직원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보살핌, 마음 아픈 사람들을 헤아림, 이웃에 대한 넉넉함..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이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성경의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인 동시에 아름다움을 즐기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은 기능적으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아름답게 설계됨을 봐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을 감상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하루이기를....

7/10/14

본과 구세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기독교 소설의  원제 In His Steps는 이 구절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따라야할 본이었다.


유명한 기독교 고전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자취라고 말한다. 그분처럼 우리도 고난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분처럼 고난을 악으로 갚지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기독교 기본진리'에서 이 본문만큼 구세주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되심을 말하는 맥락에서  24절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하는 죄사함의 대속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초대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확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 비의도성이 예수님이 단순한 본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구세주되심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임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본이 되신 예수와 구세주 예수는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 되는 동시에 길을 잃은 우리가 돌아가야할 영혼의 목자가 되신다(25절). 


우리들은 예수님을 갈라놓기를 좋아한다. 예수의 구속을 배제하고 따라야할 본으로만 추종하는가 하면, 구세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그분의 본을 따르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내부의 양 끝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더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한분이시다. 복음은 하나다.

7/09/14

시민과 그리스도인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벧전2:1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동시에 이 사회의 시민들이다. 이 편지는 네로시대로 추정되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공격이 극심할 때에 당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반사회적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민으로서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한다고 권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우리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그리할지라도 이 사회의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라야 한다.

베드로는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든다(벧전2장).
첫째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기위해서다(15절). 우리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복음과 교회를 폄하하는 말을 하게 된다. 잘못된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둘째로 복음을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16절). 복음은 자유의 복음인데, 어떤 이들은 이 자유를 남용한다. 자신들의 악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복음을 핑계로 댄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는 섬기는 자유임을 분명히 한다(16절, 갈5:13). 우리는 복음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시민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서는 안된다.

내가 속해 있는 지구촌교회에서는 창립초기부터 목회자들이 세금을 내왔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주를 위하여' 이 사회의 질서도 존중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권한다(13절).

7/08/14

버린 돌, 걸림돌, 머릿돌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7)

오늘의 묵상본문에서(벧전2:6-12)에서 예수님을 신령한 집을 이루는 돌로 묘사하고 세가지 돌의 이미지를 예수님께 적용시킨다.

1.버린 돌. 예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이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예수가 그러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베드로는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버린 돌이셨던 예수님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2.걸림돌.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묘사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면 깨어짐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의 가치와 충돌하며, 예수님이 제시한 길은 우리의 욕망과 충돌하며,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의 제국의 꿈과 충돌한다. 

3.머릿돌. 사람들에게 버린 돌이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머릿돌이 되셨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버렸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받았고,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7/07/14

현실과 영성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오늘의 말씀(벧전2:1-5)에는 신령한 젖(2절), 신령한 집(5절), 신령한 제사(5절)가 나온다. 치열한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신령함을 추구하라는 권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고통의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겐 보다 현실적인 권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폴 투르니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을 배제한 현실주의자도 아니요, 현실을 무시하고 신앙만 중시하는 맹목주의자도 아니요 현실에 뿌리박은 신앙인이라 했다.  신앙은 현실에 눈감는 것은 아니다. 

한편 헨리 나우웬은 '현실적이 되라'는 것이 예수님이 받았던 시험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배고픔으로 허덕이는 민중들을 위해서 돌이 떡이 되게하라는 것은 그들에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왜 그것이 시험이 될까?  그것은 현실은 너무나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추구는 쉽게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고통의 현실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은 온통 그것만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우리의 눈을 묶어 두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의 욕망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고난의 진짜 위험은 바로 현실을 아파하다가 영적 추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먹고 사는 염려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7/05/14

상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베드로전서 1장을 읽어보면 유난히 '없어질 것' '썩어질 것'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에 대해서, 7절에서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에 대해서, 18절에서는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로 에 대해서 말한다. 

23절에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라고 하고 24절에서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한다.

이 땅의 것들은 언젠가 마르고 썩고 없어진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이것을 강조한 것일까? 

아마도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재산과 가족과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많은 것을 상실한 그들에게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진 것들은 어차피 없어지고 말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 같다.  

더 나아가서 결코 없어지지 않고 잃어버릴 수 없는 우리가 가진 영적 부요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천국의 유업이 그러하고 우리가 간직한 믿음이 그러하고, 우리로 죄사함받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주의 말씀이 그러하다. 

베드로는 풀처럼 꽃처럼 마르고 시드는 인생 중에 오직 주의 말씀만이 세세토록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이 바로 그 말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얻은 것은 잃어버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상실하고 그로 인해 아파한다. 그 상실은 복음 때문일 수도 있고, 풀과 같은 인생을 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는 상실을 경험한다.

어차피 인생 중에 잃어버릴 것들이라면 놓아줄줄도 알아야 한다. 대신 그 보다 더 귀한 없어지지 않는 것들을 붙잡을 줄 알아야 한다. 인생 중에 진짜 가난은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놓치는 것이다.

7/04/14

얄팍한 복음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싸구려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신앙생활의 기초단계 정도로만 이해하는 이들도 많다. 베드로의 글(벧전 1장)을 읽어보면 복음의 깊은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1.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해야할 분으로 여겼다. 그분은 아버지인 동시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요 두려운 경외감으로만나야 할 분이다(17절)

2. 십자가를 보배처럼 여겼다.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는 세상의 은금보다 더 보배로운 것이라 했다(18-19절). 베드로의 글에는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애정이 물씬 풍겨난다. 십자가는 단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3. 그리스도를 영광스러운 비밀로 여겼다. 혹자들은 그리스도의 출발점을  나사렛으로 기억할지 모르나, 베드로는 창세전부터 비밀처럼 계시다가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분으로 소개한다(20-21절).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했다(골1:27). 그분은 영광스러운 비밀이시다.

누군가 복음은 어린 아이라도 건널 수 있는 시냇물이나, 거인이라도 건너지 못할 깊은 강이라 했다. 그 생수의 깊은 강으로 나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새롭게 느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히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에 깊히 취하는 우리가 되자.

7/03/14

다시 붙잡아야할 복음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2)

너무 익숙해져 그 귀중함을 놓쳐버리는 것들이 있다. 베드로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박해를 받던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들이 놓으려 하는 이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상기시킨다.

이 복음은 선지자들이 간절히 원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이다.
천사들마저 흠모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값지불하셨고, 부활로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계시되도록 성령께서 참여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수고한 것이다.

그렇게 이 복음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런데 우리도 역시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가 붙잡았던 복음을 놓으려 한다.

삶이 주는 평안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그럴듯한 위안들로
정치적 사회적 신념들로
삶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비전으로 둔갑한 우리들의 욕망으로
우리의 복음을 대치시키고 복음을 뒤로 한다.

베드로의 진단이 맞다. 우리는 다시 이 복음의 소중함을 재확인해야 한다.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의 그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영혼의 진정한 부요는 복음이다.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것들로 우리를 치장한다 해도 우리는 그저 가여운 영혼들이니...

7/02/14

무조건 기뻐하기

무조건 기뻐하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 구절을 가리켜 성령받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한 적이 있다.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세상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은  '여러가지 시험'(6절)을 받는 상황에 대해 말한다. 이럴 때 보통 위축된다. 그런데 기뻐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 믿음의 '확실함' 때문이다(7절). 

당시 많은 신자들은 박해를 당하면서 자신들이 헛된 것을 믿고 있는 것을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이 입증될 '칭찬과 존귀와 영광'의 날이 될 것이라 말한다.


믿음의 신비 때문이다(8절)

눈으로 보이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안다. 이 신비를 알기에, 현재의 눈에 보이는 고통을 넘어서 기뻐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의 결국을 알기 때문이다(9절)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끝이 어딜까 생각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스러움에 사람들은 흔들린다. 그러나 '구원'의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고통의 끝날이며, 믿음이 승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올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기쁨은 믿음의 증거다. 상황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무조건 기쁘게 여기자. 

7/01/14

산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즈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힘겨웠다. 여기 저기서 박해받는 자들이 속출했고, 교회의 존립이 위협당하는 시점이었다. 베드로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쓴다.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무슨 교회갱신운동이나 교회 내의 윤리회복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 것 같지 않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그 희망을 보았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3절).

소망은 거듭난 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의 거듭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우리를 미리 아셨고, 예수님의 피뿌림을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2절),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도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이다(4절). 

우리의 거듭남에 인간의 공로와 선함이 개입될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자에게 하늘의 유업과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신다(4-5절).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며 언젠가 우리에게 나타나기로 예비된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만일 미래가 우리 손에만 달려있다면 희망을 가질 근거가 별로 없다. 인간의 손은 충분히 그 무능력을 입증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나 현실적인 교회의 자기 갱생능력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산 소망이 있음은 죽은 소망도 있고 거짓 소망도 있음을 생각케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 땅의 어떤 공동체도 소망이 되지 않음을 로마와 교회의 쇠락을 경험하면서 써내려간다. 우리의 쇠락과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역사의 소망이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민족도 바벨론 유수를 겪으면서 그들의 공동체가 소망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메시아가 만드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소망이며, 그래서 예수 오심의 제 일성이 '하나님 나라'였다.

거듭남이 산소망인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늘의 기업을 약속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 손이 우리의 미래까지 붙들고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 거기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