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3

비움과 채움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12:44-45)

영적 세계에는 비움이 있고 채움이 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채움이 없는 비움은 위험할 수 있다.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쫒겨나 거할 곳을 찾다 찾지 못하면 자기가 떠난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고자 하는 곳이 비어있으면 이번에는 더 많은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확실히 비움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는 욕심과 탐욕은 비어져야 한다. 우리의 집착은 비어져야 한다. 비움은 어떤 면에서 불교적 영성과 비슷한 면이 있다. "칠층산"을 쓴 토마스 머튼이 불교도들과 가까이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비움만 있고 채움이 없으면 복음과 상관없는 영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채워지고 그분의 말씀으로 채우지지 않으면 귀신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 귀신은 빈집을 찾기 때문이다.

2/27/13

악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 12:34)

본문의 발단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사사역이 귀신의 힘을 빌어 하는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악담하는 사람을 간혹 만나기도 한다. 혹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반대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리가 깊히 생각해야할 몇가지가 있다.


1. 내 반대는 상식적으로 타당한가?
예수님은 어떤 나라, 혹은 집안이 스스로 분쟁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데, 귀신이 귀신을 쫒는 일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타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다.

때로 우리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 있다. 우리의 반대하는 논리 자체가 모순 덩어리인 경우가 많다. 사실보다는 우리의 감정이 앞서, 객관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나 비방을 할 수도 있다.


2 내 반대가 혹시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자신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마12:28). 그러나 이 성령의 일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된다는 끔찍한 말씀도 주셨다. 우리들의 실수와 연약함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일하심을 보고도 고의적으로 계속 거부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


3. 내 반대가 혹시 내 문제가 아닌가?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비방과 악담은 그들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하셨다.

아무리 좋은 것도 삐뚤어진 사람에게는 삐뚤어지게 보여진다. 우리는 그 삐뚤어짐에서 우리의 악함과 죄인됨을 보아야 한다.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스캇 펙 박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상담하고 치유하면서 이들의 문제는 결국 "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그 보다 더 큰 문제, "악함"의 문제를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말한다.


4. 내 반대하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 하나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반대하기 위해 내놓은 말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단을 받아야한다. 우리는 생각해야한다. 누군가를 반대하는 내 언어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가?

2/24/13

예수님에게 배우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5)

사역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우리들에게 빛이 된다.

1. 긍휼 : 사역의 현장에서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이다. 이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은 바로 이 마음,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역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2. 영적 분별력 :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의 처지나 환경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이들은 병자들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고 정치적으로 억압받았던 민중들이었고, 가난으로 인해 도탄에 빠져있던 이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신 그들의 필요는 목자요 추수할 일꾼이었다.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3. 위임 : 예수님은 이 땅의 참 목자요 선한 목자로 오셨지만, 영혼들의 목자 역할을 할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추수할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 하셨고(38절) 친히 제자들을 세우셨다.(10장 1절). 예수님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E.M.바운즈의 말대로 사람은 그의 방법이다(Man is his Method). 사람은 시대의 요청이요 주님의 요청이다.

4. 주권 : 예수님은 목자의 필요를 느끼시고 제자들을 세우셨지만,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하라 하신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아 하나님의 일터에서 쓰임받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5. 나눔 : 예수님은 자신이 보시는 영혼들의 필요와 시대적 요청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다. 제자들은 아직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영적 부담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과 동역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쓰실 때 먼저 그의 비전과 부담을 먼저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우시기 전에 먼저 이 부담을 먼저 나누셨다.

6. 기도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시기 전에 기도를 요청하셨다. 이 순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사역이 있기 전에 먼저 기도가 준비되어야 한다.

7. 준비 : 예수님이 목자의 필요를 보시고 구체적으로 하신 일은 열두제자를 세우신 일이었다. 예수님이 사역의 현장에서 보신 것은 수 많은 무리들의 막대한 필요들이었지만, 그는 소수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 소수를 통해 영혼들의 필요를 섬기도록 하셨다. 비전는 원대하셨지만, 그의 행동은 구체적이셨다. 그는 사람을 준비하셨다.

2/23/13

조용하게...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마12:19, 공동번역)

병자를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 비밀주의가 메시아적 이미지임을 지적한다. 메시아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선전도 광고도 없으셨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꼼수를 부리지도 않으셨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경쟁과 다툼도 없으셨다. 그는 조용하게 사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어떤 리더보다도 더 많이 알려지셨고,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신다.

우리들은 웬지 시끄럽다는 느낌이 든다. 교회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들의 사역의 현장에서도 조용하게 섬기셨던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들의 주장은 너무 강하고, 의견을 말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는 너무 크다. 우리들의 성과는 요란하게 선전되고 우리들의 신학은 너무 전투적이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 큰 소리 내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조용하게....

2/21/13

미드라쉬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12:7)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가다 벼이삭을 비벼 먹었다. 이것은 곧 사람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경우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의 예를 들어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들고나온 안식일 문제는 율법의 문제가 아닌 전통의 문제였다. 그들은 안식일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가미시켰다. 이들의 토라(율법)에 자신들의 해석을 담을 미드라쉬(해석집)를 더하여 미드라쉬에서 정한 안식일 준수 규칙을 "율법"준수로 예수님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장로의 전통"이라고 비판하신 적이 있다(마가복음 7장)

오늘의 기독교계에는 다시 복음과 제자도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동안의 치유와 번영 중심의 메시지에 식상한 대중은 또 다른 맛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된 복음과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소위 "성경적" 논의가 실상은 또 다른 미드라쉬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와 개혁에 대한 외침들이 안식일 준수를 외치는 외침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명분은 정의롭다. 그런데 그 외침엔 우리들의 미드라쉬가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소위 복음을 말한다는 이들의 미드라쉬를 복음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다. 미드라쉬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듯이, 사람들의 눈에 오늘의 교회는 복음이 빠진 장사꾼 교회들로만 여겨질 수 있다.

미드라쉬 자체가 악이 아니고 오늘날 복음적 설교가들의 설교와 책자들은 절대 악이 아니다. 그러나 그 미드라쉬가 정죄의 수단이 되면 악이다.

복음을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교회들에 대한 정죄의 마음이 있다면, 안식일 준수 문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했던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염려하는 듯 하면서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것은 안식일 준수를 자기 의로 삼았던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음과 영성이 따뜻하기를 기대하셨다.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구약 선지자들의 비판적 선언들에는 이스라엘을 마음에 품은 선지자들의 깊은 고뇌가 묻어있다.  우리들의 복음에 대한 논의와 외침에는 한국 교회를 끌어안는 자비가 있어야 한다.

2/20/13

단순함의 신비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요즘의 기독교 리더십은 엘리트 리더십, 혹은 스마트 리더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리더십은 종의 리더십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리더십이다. 엘리트적 자질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계시된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때문에 회개하기를 거부한 당대의 엘리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열리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회개한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비가 계시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내놓을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었다.

그 평범함이 자질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평범함이 겸손이 되어 주님께 나아가게 하면 평범은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 자질이 된다. 결국 영적 리더란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19/13

열광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마11:20)

예수님의 말씀선포와 병고침 등의 기적으로 인해 민중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광 그 이상을 원하셨다.

우리는 말씀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방송에서 이 설교 저 설교를 찾아 들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말씀 세미나에 찾아다닐 수 있고, 찬양집회 혹은 성령집회 등에 열광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광 그 이상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회개를 원하신다. 좋아하는 것과 반응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말씀을 좋아하고, 찬양을 좋아할 수 있지만, 그 좋아함이 내가 예수님께 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좋아함"으로 "회개"를 대치할 수 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메시지였다. 그들은 예배와 제사를 좋아하고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는 회개의 열매가 없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저희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이사야1장)고 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 열광 그 이상의 회개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2/18/13

흉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8)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기대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교회의 교회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침례 요한이 부드러운 옷 입은 귀족의 패션쇼를 보여줄 수는 없다. 예수님은 그걸 보고 싶으면 왕궁에 가라 하신다.

사람들은 웃음을 찾고 있다. 그걸 보고 싶으면 개그컨서트나 드라마를 보면 된다.사람들은 퍼포먼스를 좋아한다. 그걸 보고 싶으면 뮤지컬이나  음악 컨서트에 가면 된다. 그들이 확실히 교회보다 낫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왔는가?"  교회에 나오는 이들이 들어야 할 질문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교회가 들어야 할 질문이다.

교회가 왕궁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순간 교회는 맛잃은 소금이 된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옷을 보고자 침례 요한에게 갔던 것이 아니다. 침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패션쇼를 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는 우스운 꼴이 되고만다.

침례 요한은 그만이 들려줄 목소리가 있었다. 회개를 외치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민중들의 마음을 끌었다. 몌시아의 도래를 선포하는 목소리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교회만이 내야할 소리가 있다. 첼로가 기타를 흉내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첼로 연주회에 가는 이유는 기타 소리를 듣고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16/13

실족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

침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분"으로, 자신이 그 신들메도 감당치 못할 분으로 선언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한의 이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요한이 이 실족은 자신의 예상과 예수님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메시아가 오시면 하시게 될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예상과 달랐고 믿음은 흔들렸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도 종종 이 실족을 경험한다. 요한이나 우리나 예상 밖의 예수님은 당황스럽다.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이 우리를 찾아올 때,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일어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어떤 일이 일어날 때, 나는 예수님이 그저 당황스럽고 낯설기만 하다.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의 몇대목을 요한에게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경의 그 메시아이셨지만, 요한은 메시아에 대해 좀 다른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요한의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요한은 자신의 예수상을 새롭게 해야했다.

믿음의 균열이 생기고 실족하게 되는 상황은 사실 새로운 성장의 기회이다. 우리에게 잘못 그려진 예수상을 새롭게하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새로운 면에 눈을 뜨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0:6)하셨다.

2/15/13

화평과 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마5:9).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오시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위장된 평안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하였다.

문제를 덮어두면 평안해 보인다. 부부의 문제도 덮어둘 수 있고, 교인간의 갈등도 없는 척 할 수 있다. 목장 내의 갈등요소도 건드리지 않으면 화평한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누군가의 어떤 행동이 사람들을 시험들게 하여도 그것을 내가 문제 삼지 않으면 그와 나는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화평일까?

예수님께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예수얘기 꺼내지 않으면 나는 그들과 화평스럽게 지낼 수 있다. 물론 예수 얘기는 적당한 때가 있을 수도 있고, 듣는 자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할 수도 있다. 예수 얘기하는 우리에게 지혜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얘기를 꺼내지 않는 진짜 이유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화평이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의 검을 들어야한다. 복음 얘기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쌓아온 관계를 어렵게 만들 수 있어도 예수 얘기를 꺼내야 한다.



2/13/13

사역의 현장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10:16)

우리들은 좋은 교회,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역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우리의 현장은 "이리들" 이 있는 곳이며(16절),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며(17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22절)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 혹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서 떠나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가 없다. 예수님은 사역의 현장은 최악을 경험할 수도 있는 곳이라 하신다.

그러므로 사역에 임하는 우리들은 깨어 기도함이 필요하다. 뱀같은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험한 풍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강팍해질 수 있는데,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2/12/13

사역과 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8-10)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로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에 물질에 대한 말씀이 있음이 흥미롭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물질이 가장 큰 유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물질에 대해 두가지를 말씀하셨다..
무상의 정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을 위한 봉사이다. 사역을 물질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순간, 주님의 종이 아닌 물질의 종이 된다. 우리는 무상의 정신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은 무보수의 사역은 아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셨다.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합당한 사람"을 만나면 그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말씀도 하셨다. 사역을 하면서 그 사역을 통해 필요를 보충받는 것을 무조건 정죄할 필요는 없다.

이 두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진리인 것 같은데,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물질관이 될 수 있겠다. 복음 전하는 이들이 이로 말미암아 어떤 필요를 보충받을 수는 있지만, 사역을 물질적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존경받던 이들이 물질문제로 추락하는 과정을 우리는 많이 지켜보았다. 다시 한번 물질적 청렴성을 끝까지 지켜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11/13

기독교란


기독교는 도덕을 가르치서나 우리의 예법을 세련되게 해 주거나 우리가 점잖고 근사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연마해 주는 학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그 계획하는 바가 더 심오하고 더 거룩하며 목적하는 바가 더 고결하다.
기독교는 가장 엄정하고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삶의 철저한 변화, 우리 자신과 우리 영혼과 우리 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리엄 로(William Law) -

사역의 시작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35)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설명이다.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마태복음 5장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가르치심을 소개하고, 8장부터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적들과 병고침들을 소개한다. 예수님이 이런 사역은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신 이유도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그의 모든 삶, 그것도 그의 사랑때문이었다. 그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롬5:8) 죽은 이유도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거기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그의 마음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능력을 사모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배우고자 했던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내가 설교단에서 하는 설교는 그저 "울리는 괭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2/09/13

인식의 필터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막9:34)

모든 사람들에게는 필터를 달려 있는 듯 보인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정보를 필터링해서 수용할 것과 버릴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필터가 오염되어 있으면 수용과 버림이 왜곡되어 버린다. 버릴 것을 수용하고, 수용할 것을 버리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마태복음 5-7장의 천국의 메세지를, 마태복음 8-9장의 천국의 기적과 능력을 듣고 보았음에도 그들의 필터는 오염되어 예수의 능력은 귀신에게 나온 것으로 판정해 버린다.

필터가 고장난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무색해진다. 예수가 메시야 되심의 증거들이 분명히 제시되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을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낸다.

죄는 우리들의 필터를 오염시켜 버렸다. 편견과 전통과 고집과 짧은 지식에 대한 오만으로 우리들의 필터는 오염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바를 믿는경향이 있다. 그 믿는 바가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오해를 풀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인 경우가 많다.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사람들의 필터에 따라서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목격한다. 문제는 죄로 오염된 우리들의 필터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겸손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인식은 우리의 허술한 필터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확신으로 메시야를   교수대에 달 수도 있다.

2/08/13

믿음의 비약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한 관리가 자기 딸이 죽자 예수께 찾아와 도와달라 하였다. 예수께서 손을 얹으면 자기 딸이 살아나겠다는 것이다.

오랜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자락을 가만히 만진다.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오늘의 두 케이스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만 뉴스 매체에서 다룬다면 이들의 믿음은 맹신으로 오도되었을 것 같다.

키엘케고르는 믿음은 비약(leap)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있고, 소망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지점에서도, "그래도 나는 소망한다"고 하는 것이 믿음이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모든 주변 정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도 그를 믿는 것이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내 모든 상황이 믿음을 갖기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분을 기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판단하고 결정하면 믿음이 정박할 항구가 없어지게 된다. 때로는 우리의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다만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기 아들로 예수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의 기도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2/07/13

패러다임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다른 이를 판단하는 소재가 되어버리면 영혼의 독소가 된다. 금식이 그러했다. 금식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새벽기도에 열심을 내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들이 되어버리면 선이 독이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금식"의 패러다임으로만 보려는 이들이 있다. 엄격함과 자기 절제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 처럼 생각한다.

예수님은 "혼인집"의 패러다임으로 대답하신다. 혼인집의 흥겨움 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다를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예수를 경험하는 기쁨이요, 새 포도주를 맛보는 기쁨이다.

혼인집에 금식이 어울리지 않듯이 새 포도주에는 헌 부대가 적당하지 않다. 신앙생활에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금식의 패러다임에서 혼인집의 패러다임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경건은 스스로에게 독이 되어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기 의가 스스로의 감옥이 되어버릴 수 있다.

2/06/13

긍휼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9:13)

이민 목회의 경험상 교민사회의 마태가 있음을 본다.  이들은 이미 소문난 이들이다. 이들의 과거 행적이나 지금의 모습에 대한 이런 저런 수근 거림이 있다.

이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늘 때 교인들의 얼굴엔 근심스러움과 꺼림의 표정이 역력하다. 이들은 마태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행실좋지 못한 여인의 향유 발씻음을 허용하셨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간음 중에 현장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은 자애로우셨고 사람들은 돌을 들었다.

오늘도 우리는 마태를 만난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05/13

신성모독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C.S. 루이스는 우리에게 익숙하여 그 중요성과 진정한 뜻을 지나쳐버리는 본문이 오늘의 본문이라 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병을 고치고 도와주는 선한 예수는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었다. 사람들은 곧바로 신성모독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죄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성인 예수, 선한 예수, 스승 예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예수는 곤란하다. 선한 예수는 좋아하고 추종하면 그만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무릎을 꿇어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곤란하다. 예수를 좋아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진짜 신성모독은 하나님되신 예수님을 선한 예수님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 신성모독이 우리 주변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C.S. 루이스는 이 말을 들은 이상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하신 예수를 미친사람 취급하든지, 종교적 사기꾼으로 여기든지, 아니면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든지 해야한다. 어중간하게 예수님을 좋은 분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2/02/13

안식은 믿음이다.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8:24)

예수가 계신 배가 큰 파도를 만나게 되었다. 제자들은 두려워 비명을 질러댄다. 그러나 주님은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우리도 가끔 이런 상황을 만난다.

우리가 만난 인생의 파도에 우리는 어쩔줄을 모르고 때로는 한숨짓고, 때로는 눈물짓고, 때로는 탄식한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상황을 모르시는 듯, 주무시고 계시는 듯한 상황들을 만난다.

어떤 경우는 예수님이 긴 잠을 주무시는 듯 하다. 오랜 기도가 여전히 응답되지 않고, 인생의 파도는 가라앉을 줄 모른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예수님을 깨웠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두려워하는가? 너희는 믿음이 적구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에게 두려움은 믿음의 부족이었다.

그러면 인생의 파도를 만난 우리가 제자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한가지 대답은 예수님은 예수님의 주무심일 수 있겠다. 바다의 파도와 배안의 주무시는 예수님은 대조적인 그림이다. 거센 외적 풍경 속에 배안의 내적 평화는 우리가 필요한 대답이다.

때로 우리에게 이 안식의 잠이 필요하다. 마르바 던은 사람들이 안식하지 못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는 힘겨운 환경을 만나면 잠못이루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눈물짓는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안식이다. 해결되지 못한 산적한 문제들이 있지만 주님께 맡기고 잠들 수 있는 안식이 필요하다. 그 안식은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고백이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긴다는 믿음이다.

어찌된 일인지 주님은 우리에게 문제 생기자 마자 처리해주지 않으신다. 신뢰는 기다림이다.  산적한 문제를 안고 하루를 마감해야하지만, 그 문제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오히려 잠들 수 있는 믿음의 안식이 필요하다.

어떤 일로 마음이 심란하던 내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아침이다.

2/01/13

연약함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8:16)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사53:6)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도 짊어지셨다(사53:4). 병고침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준다. 마태는 병고침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메시야인 것을 보여주는 지표임을 지적한다.  메시야는 죄 문제 뿐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까지도 담당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관심은 전인적인 관심이다. 우리의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까지 관심을 가져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온갖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