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13

이제는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슥8:11)

스가랴는 성전재건을 시작하기 전과 지금을 비교한다. 당시 귀환민들은 오랫동안 버려져 황폐해진 땅으로 돌아와 시편 137편이 노래하는 것 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출이 없어 일터에서 사람들이나 짐승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정도였 안전이 보장되지도

선지자는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선지자는 풍요와 평화의 메세지를 전한다. 밭에서는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며, 불안한 그 장소는 평화의 장소가 되며, 이방인 가운데 저주가 되었던 그들은 복이 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 약속한다.

"이날 전"(10절)과 "이제"(11절)의 차이는 성전재건이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학개는 귀환민들의 고통과 빈곤은 자기 집을 세우기 바빠 하나님의 집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설파했었다.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존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생존 때문에 성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었다. 성전은 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했었다.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 말씀하신다.

15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주신다. "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본문에서 만나는 스가랴는 구약의 번영신학자 처럼 보인다. 축복을 노래하고 은혜를 말한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 될 때 염려에서의 자유와 삶의 축복이 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축복된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자신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 자신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세우는 사람이 자신의 가정을 세우게 될 것이다. 귀환민들이 자신의 집을 짓던 손을 놓고 하나님의 집을 먼저 세우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다시...은혜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6/14/13

꿈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슥8:3)

성전재건은 스가랴 시대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꿈이 필요했다. 본문은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진리의 성, 거룩한 산으로  여겨지고, 전쟁없는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여 거리엔 노인과 아이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세계각지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림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그들이 꿈꾸어야할 공동체의 모습들이었다.

우리들에겐 꿈이 필요하다. 개인적이 꿈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꿈,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꿈꾸는가? 우리들이 꿈꾸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 것들인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꿈꾸는 것인가?

꿈이 없으면 열정도 식어진다. 교회에 대해 꿈꾸는 것이 없으면 교회공동체에 대한 열정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꿈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교회상황 가운데서 이루시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자.

6/12/13

명분과 실제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7:5-6)

스가랴 시대의 귀환자들 중 벧엘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대표단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질문했다. 유대력으로 5월과 7월에 예루살렘성 파괴와 멸망 이후 잔존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그달랴의의 암살을 슬퍼하는 금식일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전을 새로 짓고 있는 이 마당에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금식일이 만들었고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꼴로 금식일을 지킬 정도였다.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금식과 반대로 축제일에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여기 금식일과 축제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많은 것이 사실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 많다. 하나님의 이름을 건 비전이 사실은 나의 야망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건 이벤트가 사실은 그저 우리들의 이벤트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건다고 다 하나님의 일은 아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그것은 너희를 위하여...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 하신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우리 인생이 얼마나 화려한가 소박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 처럼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인생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요17:4).

6/11/13

왕관과 성전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슥6:9)


대제사장의 머리에 왕관이 씌우라 하셨다. 그동안의 역사는 왕과 제사장은 구분되어 있었지만, 메시아는 왕이시며 대제사장이 되어 통치하시며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 하셨다. 왕관은 통치를 보여주고 성전은 속죄를 위함이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는 대제사장이시다. 통치와 속죄는 구분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구원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를 받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을 받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6/04/13

그슬린 나무, 더러운 의복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3:2)

스가랴가 본 여덟개의 환상 중 네번째 환상은 당시 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의 법정 환상이다. 여호수아가 피고석에, 사탄이 검사석에 등장한다. 더러운 의복을  입고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은 사탄의 고소를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로 묘사하신다.

어찌보면 이것은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더러운 의복을 입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 앞에 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의복을 벗기고 새로운 의복을 입히신다. 묘사된 의복은 제사장 의복이다. 제사장으로서 합당치 않은 의복을 벗기고 새로운 의복을 입히셔서 제사장 사역을 감당케 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6/03/13

싸움, 달려감, 지킴

싸움, 달려감, 지킴...바울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 자기 생을 이 세 단어로 요약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제 후로는...."

인생은 싸움이다.  선한 싸움이다. 대항해아야할 무언가가 있고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할 무언가가 있다. 죽는 그날까지 방심할 수 없는 악의 실체는 우리의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에도 산재해 있다.

인생은 경주다. 우리가 달려가야할 인생코스가 있다. 달려가야할 푯대가 있고 이루어야할 인생과업이 있으며 주님이 부르신 소명이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어야 하는 우리의 인생목표가 있다. 우리는 경주를 완주해야 한다.

인생에는 꼭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달라져도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과 연합하며 사는 믿음의 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가야할 길이다.

눈동자와 소유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가? 스가랴 2장에 나오는 두개의 단어를 보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8절에서 우리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눈동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눈동자와 같은 이들이다.

12절에는 소유란 말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 NLT에서는 이를 "special possession" (특별한 소유)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보물을 지칭하는 말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하신 말씀이다(출19:5-6). 모든 땅이 하나님의 소유지만, 그중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물로 여기시겠다는 말씀이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눈동자이며 보물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행위와 성취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우리의 위대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