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10

요시아 개혁의 실패

열왕기하 23:25-30에서 요시야 개혁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하시다.  요시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2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요시야 개혁은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실패한 개혁이었다. 왜 요시야 개혁은 실패했을까?
한가지 이유는  마음이 공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발견된 여호와의 말씀에 요시야 왕은 마음에 불이 붙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이 소집한 모임에서 백성들은 왕이 명령에 따라 우상을 버리기로 언약을 세웠지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느헤미야-에스라 부흥은 그들이 수문 앞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할 때에 온 백성이 울고 회개하며,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더 듣고 배우고자 하고, 에스라의 가르침에 따라 대대적인 초막절 행사를 갖는다. 요시야 개혁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에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심령의 부흥,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은 개혁은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외적인 시스템을 바꾸고 행정을 개편하고, 교회에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는 것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흥과 회개가 먼저 선행되지 않는 한 어떤 부흥운동도, 개혁도, 그리고 교회의 사역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요시야 개혁 이후에 일어난 예레미야는 유다 말기에 "새언약"의 날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며, 마음에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만이 진정한 희망이 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 새언약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시는 역사라고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터치해주시기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한다.

또 한가지 요시야 개혁의 실패 요인으로는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의 무게추가 심판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26절). 므낫세 뿐 아니라 유다 선왕들이 쌓아논 악 때문에 유다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가벼렸다. 요시야의 대대적인 청결작업에도 불구하고 훌다를 통해서 말씀하신 심판의 메세지는 거두지 않으셨다. 이미 심판은 작정되었다.  무게추는 심판으로 기울었다.
이것이 나를 두렵게 하는 요소이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고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의 무게추에 의해서 비극적인 결말을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잘못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으실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이다. 아마 바울이 '복음을 전한 수에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얘기가 그것이 아닐까?  그것이 왕성한 사역을 하던 중 어떤 스캔들을 인해 회개하고 돌아온 목사님들이 예전처럼 그렇게 쓰임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주님께 쓰임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최대 비극은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를 순전하게 추스려야 한다.

10/29/10

성전이야기

열왕기하 25:8-21에서 <성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유다심판의 기록 중에서 오늘의 본문은 성전에 대한 심판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주요대상이 성전이었던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야긴과 보아스의 두 놋기둥과 열두마리의 황소가 떠받친 놋바다를 비롯하여 여러 성전집기들이 탈취당한다. 다른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는데 반해 성전 봉사자들이었던 대제사장, 부제사장 등은 느브갓네살 앞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의 집이었던 성전이 가장 주요한 심판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더 거룩하고 성별되기 원했는데, 유다 여러 왕들은 이 성전 안에다 태양신 보좌와 말형상, 아세라 목신상, 그리고 바알숭배를 위한 집기들을 비치해 두고 있었다. 거룩한 곳이 유린당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말을 믿지 말라 하였다.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으면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성전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더 큰 기대가 있는 곳에 더 큰 심판이 있었다.

포로 귀환 이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제 2성전이 지어지고, 헤롯은 이를 46년에 걸쳐 증축하여 화려한 성전을 짓지만, 예수님은 이 성전도 파괴될 것을 말한다.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이 성전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거리 설교를 했다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때가 되면 새언약의 날이 올 것이며, 하나님은 율법을 돌판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새길 것이라 예언했다. 미쉬나에서는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 성전의 중심은 법궤, 그리고 법궤의 중심은 법궤 안에 있는 율법의 돌판이라 했다. 말씀이 있는 곳이 성전이다. 성전의 핵심은 토라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때가 되면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을 예언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인 각자가 새언약의 사람들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고, 에베소서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다.  그런데 성전된 우리가 더 거룩하게 살지못한다면 하나님이 옛 성전을 심판하셨듯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가 큰 곳에  더 큰 심판이 있다. 하나님은 성전된 우리가 더 거룩히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10/28/10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신앙이다

열왕기하 25:1-7에서 하나님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신앙이라 하신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반바벨론 정책을 폈다가 유다 왕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두 아들이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본인은 두 눈이 뽑힌채 놋쇠사슬에 매여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수차례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바벨론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메세지 대신 바벨론은 곧 멸망당할 것이며, 여호야긴(여고니야)와 함께 끌려갔던 모든 유다인들도 2년안에 돌아올 것이라는 조기 귀환의 희망을 전하는 메센저들의 메시지를 채택한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에게 곤란한 입장에 서게 만든다. 목회 초기에 암환자가 있었다. 치유와 기적의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그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에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옳은가 고민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마음의 갈등이 여러 케이스에서 경험한다. 치유의 사역도 주께 속하였고 호스피스 사역 같은 것도 주께 속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특정한 공식은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우리와의 인격적 관계와 상황 가운데서 주시는 메시지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드기야는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도 신앙이다.

10/27/10

말씀을 분별하자.

열왕기하 24:8-20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바로 분별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유다왕국의 마지막에 여호야김, 여호야긴(여고니야),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세지가 있었음에도 반바벨론정책을 폈다가 모든 왕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왕들이 예레미야의 메세지에 귀기울지 않았던 한가지는 거짓 메시지들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바벨론은 하나님이 지우신 멍에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냐 같은 선지자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꺾으면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멍에를 꺽으셨고, 2년안에 잡혔던 모든 이들을 돌이키시고 바벨론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냐의 메시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메시지는 우리가 선택할 사안이 아니다. 올바로 분별하고 순종해야할 사안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선별적 청취'로 많은 교우들은 '듣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별적으로 청취'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에 교회들도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 가정, 치유 등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질문해야할 것은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회개가 필요할 때 위로의 메세지를 전함으로 유다 백성들을 오도했던 거짓 선지자들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자칫하면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닌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대중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교회성장이 말씀의 건강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기쁘게 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이다. 때때로 소화되지 않는 주의 말씀을 피하기 위해 쉬운 길을 걷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10/26/10

불확실한 때의 선택

열왕기하 24:1-7에서 하나님은 불확실한 시기의 최선의 선택은 말씀에 귀기울이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유다의 마지막은 유다의 아들들로 끝이났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를 끝으로 유다종말이 다가왔다.  유다의 마지막 시기는 격변의 시기였다. 주전 612년 세계를 제패하던 앗시리아 제국은 메대-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이집트가 세력을 키워 북상하던 중 609년 요시야 왕은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하고, 이때부터 유다왕국은 잠시 이집트의 속국이 된다. 요시야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 의해 폐위되고 여호야김이 왕이 된다. 그러나 주전 605년 이집트와 바벨론의 결전인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승리하자 다시 유다왕국은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여호야김은 충성을 서약한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1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3년만에 다시 배반한다.  이후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한 이집트가 다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이집트가 유다왕국을 보호해줄 것을 약속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때 활동하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그냥 충성할 것을 말하지만 왕은 듣지 않고 이집트를 신뢰하고 바벨론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바벨론 군대는 다시 유다를 칭공한 것이 주전 598년, 그리고 그 이듬해 3월 16일 유다는 패전하여 성전의 많은 보물을 탈취당하고 다수의 귀족들과 신하들과 함께 여호야김은 쇠사슬에 매여 포로로 잡혀간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은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위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는데 몇개월만에 바벨론은 다시 그를 폐위시키고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요시야의 막내아들이었던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우는데, 그는 11년간 통치를 하다가 주전 586년 유다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였다. 여호야김은 주변의 상황을 읽어가며 때로는 이집트에, 때로는 바벨론에 왔다갔다 하는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상황판단대로 움직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오늘날도 불확실한 많은 요소가 있다. 특히 세계적인 경제한파로 인해 그 불확실성이 더해져간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호야김에게 계속 말씀하셨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의 판단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에게 말한다.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판단)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10/25/10

하나님의 보물찾기

왕하 23:31-37에서 하나님은 보물찾듯이 사람을 찾고 계심을 말씀하신다. 유다의 운명은 이제 기울어졌다.  요시야 이후로 세워진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의 급격한 통치권 변화 속에서 유다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반복적인 문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라는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물 찾듯이 순전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요시야 같은 개혁적인 왕의 노력도 유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시다. 그리고 오늘도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10/23/10

요시아 개혁의 실패

열왕기하 23:25-30에서 요시야 개혁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하시다.  요시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2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요시야 개혁은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실패한 개혁이었다. 왜 요시야 개혁은 실패했을까?
한가지 이유는  마음이 공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발견된 여호와의 말씀에 요시야 왕은 마음에 불이 붙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이 소집한
모임에서 백성들은 왕이 명령에 따라 우상을 버리기로 언약을 세웠지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느헤미야-에스라 부흥은 그들이 수문 앞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할 때에 온 백성이 울고 회개하며,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더 듣고 배우고자 하고, 에스라의 가르침에 따라 대대적인 초막절 행사를 갖는다. 요시야 개혁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에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심령의 부흥,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은 개혁은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외적인 시스템을 바꾸고 행정을 개편하고, 교회에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는 것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흥과 회개가 먼저 선행되지 않는 한 어떤 부흥운동도, 개혁도, 그리고 교회의 사역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요시야 개혁 이후에 일어난 예레미야는 유다 말기에 "새언약"의 날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며,
마음에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만이 진정한 희망이 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 새언약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시는 역사라고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터치해주시기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한다.

또 한가지 요시야 개혁의 실패 요인으로는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의 무게추가 심판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26절). 므낫세 뿐 아니라 유다 선왕들이 쌓아논 악 때문에 유다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가벼렸다. 요시야의
대대적인 청결작업에도 불구하고 훌다를 통해서 말씀하신 심판의 메세지는 거두지 않으셨다. 이미 심판은 작정되었다.  무게추는
심판으로 기울었다.
이것이 나를 두렵게 하는 요소이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고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의 무게추에 의해서 비극적인
결말을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잘못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으실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이다. 아마 바울이 '복음을 전한 수에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얘기가 그것이 아닐까?  그것이 왕성한
사역을 하던 중 어떤 스캔들을 인해 회개하고 돌아온 목사님들이 예전처럼 그렇게 쓰임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주님께 쓰임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최대 비극은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를 순전하게 추스려야 한다.

10/22/10

동역자에게 오는 시험

왕하 23:17-24에 언급된 한 선지자의 얘기를 통해 동역자에게 오는 시험을 기억한다. 요시아의 개혁은 당시 패망한 이스라엘까지 미쳤다. 그 과정에서 한 비석을 보게 되는데, 과거 벧엘제단을 탄핵하기 위해 유다에서 올라온 선지자의 무덤이었다.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전하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는데, 당시 사마리아의 한 선지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기가 하나님께 말씀을 유다 선지자를 대접하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전하고 그를 대접했다. 때로 동역자에게서 시험이 올 수 있다. 유다 선지자는 사마리아 선지자가 같은 동역자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을 놓았는지 모른다. 때로 우리는 기도와 말씀 중에 확신한 바를 내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 선후배들, 혹은 가족이나 나의 멘토...이런 이들의 충고에 의해 쉽게 바꾸어버릴 수 있다. 주변인들의 말에 늘 귀 기울여야 겠지만, 우리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하는 사람들이다. 가까이 교제하는 이들에게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때로 말씀의 기준까지 내려놓을 수 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할 사람들이다.

10/21/10

마음을 지키자

열왕기하 23:8-16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지킬 것을 교훈하신다. 우리가 아는 솔로몬은 지혜가 출중하고,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부국강병을 이루었던 왕,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어냈던 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우상숭배자 솔로몬을 말한다. 그는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몰렉을 위해 산당을 지었다(13절).
 
역대상 11:9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라고 말한다.   즉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우상에게로 돌렸고,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던 솔로몬을 이방 신들을 위해서 산당들을 건설하는 자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은 산당들은 유다 역사 말기까지 여호와 신앙을 훼손시켰다.

지도자가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그 개인 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 치명적인 결과들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미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성적 스캔달을 일으킨 목회자들로 인해 많은 공동체들이 깨어지는 것들을 목격했다.

잠언서는 우리에게 교훈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10/20/10

마음의 성전을 정결케...

열왕기하 23:1-7에서 하나님은 마음의 성전을 정결케 하라 하신다. 요시야 개혁에 대한 기록에서 당시의 종교의 부패상을 엿볼 수 있는 한가지는 하나님의 성전에 까지 들어왔던 우상들이다.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비치되어 있었고, "아세라 상"이 있었고, "남창의 집"까지 있었다. 본문은 거듭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임을 강조한다.  여호와의 집에 우상이 들어와 숭배받고 있었다.
이런 개탄스런 일들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가? 거듭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의 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마음 속에서 현대판 아세라 상과 남창의 집과 온갖 세상적인 집기들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주님과 동행은 거룩한 동행이며, 거룩은 나 자신을 비워가는 길이다. 내 안에 비워야할 것들, 여호와의 성전에서 몰아내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척결되어야할 제 1호 우상은 내 인생의 주인행세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대중가요 노래 한소절이 생각난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네"

10/19/10

단 1분이...

"1분은 얼마만한 길이의 시간인가? 1분이란 고작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거나 교향곡의 첫 소절을 들을 수 있는 시간, 또는 책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낯선 사람의 첫인상을 잠시 훑어볼 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1분이 한 가족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기다 한다."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 102 -

헬라어에서는 시간을 뜻하는 말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말이 있다. 일상적인 시각은 크로노스로 표현되는  반면 결정적인 순간, 전환점이 되는 순간 들을 카이로스로 표현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는 카이로스이다. 우리들에게도 단 1분이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카이로스가 될 수 있다.  바로 오늘 카이로스를 만날 수도 있잖은가?

말씀 앞에 겸손하자

열왕기하 22:14-20에서 하나님은 말씀앞에 겸손할 것을 말씀하신다. 요시야 왕이 성전에서 발견되어 사관을 통해 낭독되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며, 매우 겸손하다. 
먼저 자기가 들은 바 말씀에 대해서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대제사장 및 핵심 고위관리들을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보낸다. 여성선지자인데다가 예루살렘의 하급관리의 아내였던 훌다에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요시야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훌다에게 한명만 보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명의 고위관리들을 보냈던 것은 그만큼 들은 바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씀 앞에 겸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19절에서는 요시야가 말씀을 들었을 때에 마음이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영어성경에서는 Responsive라고 되어있다. 말씀 앞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할 줄 알았다. 머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 들은 바 말씀 앞에 옷을 찢으며, 통곡했다(wept).

하나님이 요시야를 높이 샀던 점은 바로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평가자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많다. 오늘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이 많다. 방송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적을 통해서, 교회에서 말씀을 대한다. 한가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할 점은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서적이든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말씀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내가 듣는다는 것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내가 선택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를 선택하는 것도 설교에 대한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우리가 메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메세지의 선택은 메세지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전제되어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메세지를 평가하는 태도로 임하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태도는 말씀에 대한 겸손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받고자 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10/18/10

말씀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오늘 열왕기하 22장 말씀에서 말씀에 대한 헌신을 말씀하신다.  성전에서 말씀이 발견되었다. 그 말은 유다백성들은 오랫동안 말씀없이 지내왔다는 얘기다. 오늘날 처럼 인쇄된 성경이 없던 시대에 말씀은 귀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도자에게는 말씀을 늘 가까이할 것이 요구되었고(수1:8), 일반 백성들은 각 성에 파견된 레위인들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후자는 초기부터 작동이 되지 않았고, 전자는 왕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다윗 같은 왕은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왕이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율법책 자체가 사라졌다. 말씀 없이 사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전해주는 말씀 외에는 말씀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제한되었다.
결국 요시야 개혁의 핵심은 말씀의 재발견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비록 각 집에 성경책이 7-8권씩 있는 실정이어도 말씀의 부재 속에 살아갈 수 있다. 성경말씀에 대한 묵상없이 생활하는 나날들이 멀어져갈 때 우리도 모르는사이 신앙의 쇠퇴가 오는 것이다.  내가 사모하는 부흥, 그것은 나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말씀의 묵상이 풍성해지는 부흥이다.

10/15/10

난해한 하나님의 용서

열왕기하 21:10-26에서 하나님 용서의 불가사의함을 주목하게 된다. 므낫세는 지극히 악한 왕이었다. 온갖 우상들과 산당들을 다시 세웠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상전에 이방신을 위한 제단까지, 그리고 "무죄한 자"들의 죄까지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다고 본문은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실까? 우리가 예상하듯이 용서하신다.  역대하 33장에서 므낫세의 또다른 스토리를 듣게 된다. 므낫세는 앗수르에 갈고리에 꿰어져 끌려가고 거기서 진심으로 뉘우쳐 회개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신다. 돌아온 므낫세는 자기가 세웠던 우상들을 허물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때때로 악인이 쉽게 용서받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은 우리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차원의 심연이 있다. 때로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 깊어 만져지지 않는다.

또 한가지,  하나님은 비록 므낫세를 용서해주셨지만, 그로 말미암은 유다 심판의 말씀을 거두지는 않으셨다. 개인적으로 므낫세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지만,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때에 멸망하게 된다. 다윗의 경우에도 그의 범죄를 용서하셨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또 다른 차원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서와 분명 다른 색깔의 그림이 있다.

주님과의 동행은 위험한 동행이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 왕국의 진짜 주인은 아슬란 사자라는 말을 들은 루시는 비버 부부에게 묻는다."안전한가요?"  "안전?  도대체 누가 안전 따위를 말하든? 그 사자는 평탄대로만 주지는 않아.  하지만 선하단다." 
우리의 작은 소치로 주님 이해하며 따라가기가 평이하지 않다. 그러나 한가닥 잡는 것은 그분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선 때문에 몰이해와 두려움 속에서도 안심하며 따라간다.


10/14/10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합시다

열왕기하 21:1-9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해야함을 말씀하신다. 히스기야왕은 개인적으로 경건한 왕이었고, 민족에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가져왔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렸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유다는 다른 민족들보다 오히려 더 악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우리가 세운 모든 것을 다 헐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의 자녀, 교회의 다음 세대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 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10/13/10

멀리있는 것이 위험하다

열왕기하 20:14-21에서 우리에게 멀있는 것들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사신들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묻는다. 히스기야는 이들이 '먼 지방"에서 왔음을 강조한다. 먼지방에 있기에 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먼지방 바벨론이 유다멸망의 장본인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 땅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말씀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부족이 여부스족이다. 왜냐하면 처음 이스라엘이 처들어왔을 때 그들은 먼지방에서 온 것 처럼 낡은 옷, 낡은 신, 마른 떡을 준비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이 먼지방에서 왔기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과 조약을 맺었기에 이들을 진멸할 수 없었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영적 생활에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멀이있는 것들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우리의 돈 사용이 영성과 무관해 보이는 멀이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직장에서 부하직원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과 상관없어 보이는 멀리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내 이웃집에 사는 이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세금문제에 있어서,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의 나의 모습에 있어서, 인터넷을 서칭하는 일에 있어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관련없어 보이는 멀리있는 것들로 생각하고,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위협이 될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궁의 구석구석 보여주었듯이, 이런 것들이 우리 생활 깊숙히 들어오도록 허용한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랬다.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허용한 것들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쌓아왔던 영적 생활의 보물들이 하루 아침에 다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멀리있어 보이기에 허용한 작은 일들이 내 영적생활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12/10

위로가 주는 시험

열왕기하 20:8-13에서 위로도 시험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고통과 스트레스 가운데 있을 때 누군가로 부터 오는 위로는 큰 힘이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위로가 주는 시험도 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다.
나라의 사정은 앗수르 군대의 침공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죽을 병에 있었던 차에 바벨론 사신들이 선물들과 더불어 찾아왔다. 이들의 방문은 히스기야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게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사신들에게 왕궁의 모든 것들을 다 보여줄 정도로 환대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당시 유다민족에게 큰 압박을 가했던 앗수르 군대는 유다민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위로자로 왔던 바벨론은 결국 유다를 멸망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결혼생활의 어려움 속에 배우자 아닌 다른 이를 통해서 위로를 발견하고자 했던 이들이 결국은 파국에 이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인생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아니하는 방법들로 고통의 위안을 삼고자 하는 이들이 영적인 파국을 경험하는 것도 많이 보았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보혜사 성령님, 위로자 성령님이시다.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우리에게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기도 중에, 때로는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천국의 실제를 비쳐줌으로서 옆에 함께 계시는 그분이 참 위로자이다.

10/11/10

눈물을 보고 계신 하나님

열왕기하 20:1-7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앗수르 군대가 침공해 들어와 어수선한 때에 히스기야마저 병들어 죽게 되어 그가 벽면하고 통곡하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그가 치유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보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을 보고 계신다. 때로 우리는 눈물을 감추어야할 때가 있다. 가족들 앞에서 감추어야할 때가 있고, 교우들 앞에서도 감추어야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도 내 눈물을 감추어야할 때가 있다. 그런데 눈물을 감출 수 없는 그분, 하나님 앞에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신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안해 주셔도 좋다. 그저 내 눈물의 의미를 이해해주시는 것만이로도 내게는 응답이며, 안식이 되기도 한다.

10/08/10

교만필패

열왕기하 19:20-28에서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시다. 앗수르 왕의 정복전에 수많은 민족들이 제물이 되었다. 거기에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되었다. 이것이 앗수르인들의 마음을 교만케 하였고, 여호와를 신뢰하고자 했던 유다 민족들을 조롱하며 '내 앞에 자기 민족을 지켜준 신들이 있었느냐?' 하며 하나님도 자기의 칼날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 교만스레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 귀에' 들렸다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앗수르 왕이 그러했고, 앗수르 뒤를 이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도 교만 때문에 7년간을 들짐승처럼 지내야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10/06/10

그건 너무 간단해

열왕기하 19:1-7에서 우리에게 심각할 수 있는 인생사들을 주께는 너무 간단한 것들임을 말씀하신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사신 랍사게의 항복권유 통첩을 받고 옷을 찢으며 굵은 베를 두르며 주의 전에 나간다. 그도 그럴 것이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에 히스기야나 유다민들에게는 매우 상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심정을 출산을 앞둔 여인이 해산할 힘이 없는 것 같다 하였다.

그러나 주께로부터 온 말씀은 주께서 '한 영을' 앗수르 왕에게 불어넣어 소문을 듣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거기서 칼에 죽게하리라는 것이다. 너무 간단했다. 대단한 전투도 필요없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도 필요없고, 멀리서 수많은 용병을 불러올 필요도 없다. 주께는 너무도 간단한 사안이었다.

우리의 인생사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민족의 존망을 좌우할 것 같은 사안도, 가정의 붕괴를 앞둔 상황도, 교회의 존폐를 가늠하는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해결의 기미도 없이 답답해 보이지만, 주께 가져가면 너무도 간단히 처리될 수 있지 않을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


10/05/10

현실의 벽이 커보일 때

열왕기하 18:28-37에서 믿음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당시 세계 최고의 앗수르 군대 앞에 당해낸 민족이 없었고, 쓰러진 민족들도 다 자기 신들이 구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망했다는 사실, 그러므로 여호와가 구원해줄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는 랍사게의 말은 유다인들의 마음에 믿음의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믿음이 너무 왜소해 보일 때가 있다. 믿음을 갖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커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유다인들이 취했던 한가지 전략,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대안인 듯 하다. 우리의 현실을 끌어안기엔 너무 벅차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성급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논하기 보다는 잠시 말과 생각을 아끼고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품으려고 하기 보다 하나님의 품에 그저 안겨 그분이 말씀을 주실 때까지 기다려보는 거다.
홍해 앞에 선 모세가 종용했던 말도 '가만히 있어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는 말이었고, 막강한 아람군대의 침략 앞에선 여호사밧의 기도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다만 여호와만 바라보나이다'.

당시의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사 30:15)

10/04/10

사탄의 언어

열왕기하 18:22-27에서 사탄의 언어에 대해 묵상케 하시다. 말은 힘이 있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말은 한 개인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히스기야와 유다 민족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앗수르 사신 랍사게의 말이 그랬다. 그의 말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사탄의 언어들이 있음을 생각케 하신다.

사탄의 언어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든다.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22절)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비웃고 흔들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사탄의 언어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나의 내부의 생각을 통해서 들려올 수도 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그저 루저의 궁색한 행보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같은 믿음도 칭찬하시며,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도 될 수 있다고 격려하신다.

사탄의 언어는 사람들을 이간질시킨다.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드릴 것을 종용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킨다. 백성 중 상당수는 예루살렘이 아닌 산당예배에 익숙하게 길들여져있었고, 역대 어느 왕도 이 산당만은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히스기야는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만을 인정했다. 백성들중 상당수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탄이 결국 노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도 사탄이 하고자 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우, 목자와 목장원,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사탄의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킨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시험의 예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고, 랍사게의 말처럼 '여호와'를 들먹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  결국 사탄이 노리는 것은 우리를 영적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빛을 비추는 조명의 사역을 하신다. 주의 음성을 사모하며 조용히 나아갈 때마다 성령은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생각들과 외부의 소리들의 공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빛이 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소리는 소리로 치유된다. 사탄의 언어는 주님의 음성으로 치유된다. 위폐는 진폐를 잘아는 이들이 쉽게 분변한다. 주의 음성을 더 많이 듣는 자가 미혹의 소리들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사탄의 언어

열왕기하 18:22-27에서 사탄의 언어에 대해 묵상케 하시다. 말은 힘이 있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말은 한 개인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히스기야와 유다 민족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앗수르 사신 랍사게의 말이 그랬다. 그의 말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사탄의 언어들이 있음을 생각케 하신다.

사탄의 언어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든다.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22절)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비웃고 흔들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사탄의 언어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고, 나의 내부의 생각을 통해서 들려올 수도 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그저 루저의 궁색한 행보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같은 믿음도 칭찬하시며,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도 될 수 있다고 격려하신다.

사탄의 언어는 사람들을 이간질시킨다.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드릴 것을 종용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킨다. 백성 중 상당수는 예루살렘이 아닌 산당예배에 익숙하게 길들여져있었고, 역대 어느 왕도 이 산당만은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히스기야는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만을 인정했다. 백성들중 상당수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탄이 결국 노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도 사탄이 하고자 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우, 목자와 목장원,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사탄의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킨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시험의 예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고, 랍사게의 말처럼 '여호와'를 들먹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  결국 사탄이 노리는 것은 우리를 영적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빛을 비추는 조명의 사역을 하신다. 주의 음성을 사모하며 조용히 나아갈 때마다 성령은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생각들과 외부의 소리들의 공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빛이 되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10/02/10

영원한 의인은 없다

왕하18:13-21에서 주님은 영원한 의인은 없다고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왕중 드물게 하나님을 의뢰하고 종교를 개혁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이사야의 권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맞서지 못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길은 매일 매일의 싸움이다. 한번 올랐다 생각되는 고지는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사이에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최근 한국교단의 젊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목사님이 성추행 문제로 근신중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한번 영원한 의인은 없음을 기억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10/01/10

차이

열왕기하 18:5-12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묵상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했다. 그런데 유다는 여전히 존속하여 앗시리아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남왕국 유다가 앗시리아에 맛설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음의 본문은 제1차 앗시리아 침공을 받아 은금으로 간신히 달래는 유다의 유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왕국이나 남왕국 유다나 앗시리아의 위세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유다가 살아남은 것은 예레미야의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습니다"(렘애3:22-23) 노래한 것 처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차이는 군사력이나 뛰어난 지도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그들의 의가 차이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더 도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에게만 긍휼을 베푸셨는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한가지 본문에서 확연히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6절과 12절이다.

6절(히스기야에 대한 언급)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12절(북왕국 이스라엘) :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이들은 누구든지 긍휼을 베푸신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져오는 자'였고, 그로 말미암아 유다 민족엔 희망이 생겼다. 히스기야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런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