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11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야할 때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때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야할 때가 있다. 바울도 원래 계획하던 지역을 포기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우리가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야할 때는 언제인가?

현재의 길을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이다. 사실 우리는 그때 바울이 어떤 정황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바울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안다. 현재 그가 추진하는 것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바울이 그러했듯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할 때도 있고,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야하는 결단이 있을 수도 있다. 소아시아 지역이 1차선교여행을 다녀온 지역이라 애착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다시 원점부터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한다.

요즘 교회사역을 하면서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추구했던 사역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인가를 내려놓으면 그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아닌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6/27/11

사역은 교제에서 나와야 한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15:40-41)

실라가 선교의 사역에 뛰어들게 된 것은 바울과의 교제에서 나왔다. 실라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를 서신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동행했고, 안디옥 교회에 가서 혼란스러웠던 이방인의 구원이 모세의 의식법을 수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입장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한편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지를 다시 돌며 형제들을 격려하고자 했으나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결별하고 다른 루트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실라와 동행하게 된다. 실라가 이 사역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바울과의 교제였다.

오늘날에도 이 원리가 계속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제권을 사용하시며, 우리가 만난 사람들, 관계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 나의 동역자들을 내 주변에서 찾아주신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교제와 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기초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얼마나 소중히 여겨야하겠는가?

6/24/11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

행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신앙의 위선은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당시 어떤 이들이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베드로는 모세의 율법은 자신들의 조상도,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던 멍에였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도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들도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멍에를 사람들에게 메우게 할 수 있다. 설교자로서는 내가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삶을 사람들에게 메우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기에 말씀 앞에 설 때 설교자로 먼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된 한 사람으로서 서야 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서 먼저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런 자기 반성적 태도가 없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 위선에 빠질 수 있다. 설교말씀

6/23/11

사람들을 세우라

행14: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사도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바보-버가-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로이어졌던 선교를 마치고 다시 선교했던 지역을 되돌아가면서 사람들을 세우며 안디옥교회로 돌아갔다. 바울이 각 지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길어도 3개월을 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각 도시에 짧은 기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을 위해 장로들을 세웠다.

그런데 바울이 세운 장로들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이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회심한지 3개월도 채안되는 새내기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의 도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 비록 새신자이지만 그 모임을 이끌 수 있는 이들을 장로들로 세웠던 것이다. 오늘날 장로로 피택되기 위해서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만 하는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신학교도 없는 시절이었고, 아직 목사제도도 확립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은 복음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을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을 세우기 위해 너무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세워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더 나쁜 것은 이런 직분이 사역의 기회로 여겨지지 않고 신분이나 계급처럼 여겨져서 교회 내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경우들이다. 사도바울에게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6/17/11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이유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13:4)

우리들의 중요한 기도제목 한가지는 성령충만이다. 혹은 성령의 능력,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인치심, 성령의 은사....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성령의 은혜를 구한다. 그런데 종종 왜 성령충만을 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을 때가 많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해야하는 이유, 사도행전에서는 대답이 명확하다.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이 임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을 보내시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입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가서 증인될 것을 말했고,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어 광야로 가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했고,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구해야할 때다.

6/16/11

교만한 자는 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12:23)

헤롯이 망하게 된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 왕이 그러했다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에도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며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찬양사역자는 찬양을 통하여, 혹은 교회를 위한 큰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교회는 하는 선한 일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을 수 있다. 이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교만은 패망이 선봉이며.."(잠16:18)

6/15/11

기도의 힘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 12:15)

야고보가 순교당하고 베드로가 투옥되는 상황이었다. 교회는 기도했고, 기도한대로 베드로는 감옥에서 나왔다. 그런데 정작 이 일이 일어났을 때 기도했던 그 사람들조차도 믿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엊그제 뉴질랜드 해밀턴에 다녀왔다. 원래는 주일에 출발하기로 했었으나 공항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모든 항공기가 취소된다는 안내방송을 듣게 되었다. 칠레에서 폭발한 화산재가 뉴질랜드 상공까지 퍼져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급하게 다른 항공편을 잡아서 그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예약했지만, 갈 수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이었고, 직접 가지 못하고 두번을 더 갈아타고 돌아가야만 했다. 다행히 비행기는 출발하였지만, 상황을 주시하면서 연착에 연착을 거듭했고, 3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었던 길을 저녁 8시가 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다시 출발해서 골드코스트로 올 수 있었다.

나는 칠레의 화산폭발이 나와는 상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나라는 너무나 먼 나라고 그곳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러나 엊그제의 모든 비행기 해프닝은 칠레의 화산폭발이 그 원인이었다. 너무나 먼 거리의 원인이지만 그것이 원인이었다.

마가의 집에서 기도했던 그 기도가 원인이었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믿기지 않는 현실같지만 그 기도가 원인이었다. 멀이 있는 화산폭발같은 것이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기적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또 다른 기적의 원인이 된다.

6/11/11

닫힌 문과 열린 문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11:19)

때로 우리 앞의 닫힌 문이 새로운 인생을 향한 열린 문이 된다. 예루살렘 선교가 핍박으로 닫혀졌지만, 이것은 유대를 넘어서는 선교의 문이 열리는 기회였고, 바울의 드로아에서 경험한 소아시아 선교의 닫힌 문이 유럽 선교의 열린 문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도, 사역도 종종 닫힌 문들을 경험하게된다. 닫힌 문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낙심하고 우울해하고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문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확장하시는 하나님의 열린 문일 수 있다.

6/10/11

불편한 친구, 오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행11:2)

오해는 불편한 친구와 같다. 매우 불편하지만, 인생 중에 피할 수 없는 악연의 친구와 같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을 인도하는 일에 쓰임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이 이방인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동료 사도들과 형제들에게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 따라가다 보면 이런 일들은 반드시 일어난다. 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에 관련된 일들이 일의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오해를 야기기키고 비판받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다행히 베드로의 경우는 베드로의 간증으로 오해가 풀리고 다른 형제들도 같은 마음을 품고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절).

그러나 많은 경우 오해가 풀리지 못하고 계속 비난받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속이라도 뒤집어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오해는 불편한 친구와 같은 것, 우리가 주님 따라가면서 함께 가야하는 친구와 같다. 내가 감수해야만 하는 오랜 친구처럼...

영화 뷰티플 마인드에서 주인공 존 내쉬는 정신착락을 경험한다. 늘 쫒아다니는 대학친구와 어느 소녀의 환상을 갖게된다. 결국 내쉬는 마지막까지 정신착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천재적인 강의를 대학에서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대학친구와 어린 소녀의 환영는 시시때때로 그를 찾아온다. 달라진 점은 그 환영을 없애려 하지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처럼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 따라가다 보면 쫒아내고 싶은 환영들이 있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것들이 있다. 오해도 그러하다. 그것마저도 친구처럼 대하는 것 밖에 없는 듯 하다.

6/08/11

열린 마음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완고함이 다 있는 것 같다. 완고함이 올바른 신념을 향한 것일 때는 매우 숭고한 모습도 되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친구의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신앙적 고집은 느브갓네살 왕의 입장에서는 완고함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완고함을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고한 입장은 이제까지 계속 예수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고, 이방인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유대인의 전통과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과 식탁을 대하는 것도,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위법"(28절)이었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이제까지 견지해왔던 입장을 철회하고 이 이방인을 가까이하며 그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유태인의 패러다임에서 자라난 베드로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많은 유태인이 이 패러다임 속에서 완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절) 타부시했던 이방인과의 교제를 결단한 것이다. 베드로는 말씀에 응답했던 것이다. 우리는 말씀앞에 설 때마다 내가 깨질 각오로 서야한다. 말씀은 베드로의 생각을 바꿨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우리가 완고한 입장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적 전통, 자녀관, 국가관, 사회관, 정치관, 기타 많은 것들을 언제든지 말씀에 빛 아래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베드로는 고넬료를 인도하셨던 하나님과 자신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서로 간증하면서 이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더욱 확신하기에 이르른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면 자신들에게 내키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들의 태도일 것이다. 이 이방인과의 교제는 다른 완고한 유태인으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에 그의 생각을 다 내려놓고,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열린 마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위험하다 했다. 그분은 우리를 안전지대로만 이끌지 않으신다. 때로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내가 내키지 않는 골짜기로 우리를 끌고 가시고, 때로는 나를 부인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길목으로 이끌어가신다. 그러기에 열린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는 것이 매일의 과제일 것이다.

6/07/11

하나님이 깨끗하다 한 것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유대인들은 음식정결법에 따라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한다. 물론 다른 구약의 의식법례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요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키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 규정에 따라 음식을 취한다.

이 음식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부정한 음식을 피하듯 그들은 이방인과는 식사도 함께 하지않고, 그들을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부정한 음식과 같았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에게 그 음식을 먹으라 하였고, 베드로는 이에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 하신다. 이방인들도 이제 깨끗한 음식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식사시간에 이 구분을 없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부정한 음식이 있을 수 있다. 내게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깨끗하다 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그들이 준 상처를 끌어안고 그들을 속되게 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자를 우리가 속되게 보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가까이 하지 않듯이 우리가 그들을 멀리하며 지내게 한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부정하게 여기던 이방인을 그 집에 들여 함께 유숙하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고넬료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 순종의 발걸음을 통해서 초대교회 역사는 또 한번의 큰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의 순종의 발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큰 경계선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 믿는다

6/06/11

복음주의자가 본 고넬료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2)

사도행전에서 고넬료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회심은 이방인 선교의 걸림돌이 되었던 유태인들의 고정관념이 교정되는 살아있는 사례로 채택되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총회에서 초대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성경은 그가 회심이기 이전에도 경건하여 구제와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인 것을 주목한다. 그의 회심은 베드로의 방문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우리 보기에 충분히 경건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런면에서 교회는 경건한 교인들 가운데에도 여전히 회심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들의 회심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또 한편 그의 경건과 구제와 기도가 비록 회심 이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것을 귀하게 보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복음주의가 지나치면 회심이전의 교회활동 내지 경건한 삶의 모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거나, 아직 회심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모두 '바리새인'으로 정죄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4절)고 말한다. 회심 이후의 삶만 하나님에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회심이전의 우리의 모든 삶의 경험과 경건과 말씀연구 등을 다 사용하신다. 때때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경험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의 눈물의 기억까지도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신다.

6/02/11

인간변화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바울의 회심은 인간변화의 희망을 갖게한다. 살기등등했던 그가 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변화에서 우리가 절망했던 사람들의 변화를 꿈꾸게 된다. 나의 변화를 희망하게 되고, 내 주변인의 변화를 꿈꾸게 된다.

그의 변화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된다. 그의 변화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변화 프로그램'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수많은 시도 끝에 우리가 늘 고백하는 말은 나는 단 한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개입이 있으면 누구라도 변화될 수 있다. 예수님이 개입하시자 그는 변했다.

그의 변화에서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우리 없이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꼭 우리를 그분의 일에 참여시키신다. 바울의 회심에는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