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14

틀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욥21:7)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틀'이 있어 그것으로 세상을 보고 인생을 설명하고 신앙을 말한다. 고난의 축복은 그것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틀로 신앙을 말하고자 했고 욥의 고난을 설명하고자 했다. 욥은 자신이 고난을 받아보니 이 '틀'은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며 이에 반박한다.

소발은 악인의 번성함은 잠깐이라 했지만(20:11), 욥은 악인들이 오히려 장수하는 세상이라 말하고(7절) 소발은 악인의 후손들은 구걸할 신세라 하지만(20:11)  욥은 그들의 후손이 오히려 굳건하다 말한다(8절). 

악인은 마음의 평안을 알지못할 것이라 했지만(20:20), 욥은 그들의 집이 오히려 평안하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는다(9절)고 하고, 악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했지만(20:21) 욥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지내다가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은 필요없고 기도는 소용없다 하는데(14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내리지도 않는다.

욥은 고난의 현장에서 인과응보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기시작했다. 인과응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지만 그것으로는 자신의 고난도, 하나님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렇게 욥은 깨어져갔다. 그런데 그 깨어짐이 바로 성숙이다. 제한된 시선으로 보던 하나님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틀'들이 깨어질 때 우리는 아프고 불안하다. 욥의 몸부림은 친구들에게는 불경건과 교만으로 여겨졌고, 자신도 답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욥의 이 몸부림을 통해 우리의 뿌리깊은 인과응보라 할 수 있는 공적주의를 버리고 '이유'와 '원인'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욥기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5/30/14

선의가 악의가 될 때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욥20:3)

처음에 점잖게 시작한 대화가 격해졌다. 욥기 19장에서 욥은 친구들이 위로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며 짓부수며 학대한다고 말하자, 20장에서 소발은 이것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받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악담을 욥에게 쏟아붓는다. 

욥을 똥으로 묘사하기도 하고(7절), 독사의 혀에 물려 죽고(16절), 하나님의 놋화살에 맞아 죽고(24절), 하나님의 불이 그의 집에 남은 것을 다 불태워버릴 것(26절)이라 한다.

권면이 악담으로 변했다. 말에 독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욥은 소발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모른다. 욥이 자신들의 선의를 받아들이기기는 커녕 "부끄럽게 하는 책망" 즉 그들을 모욕하는 말을 한다고 느끼자 소발의 말이 격해졌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선의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오히려 상처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명예를 짓밟는다고 느낄 때 오히려 공격자가 되고 선의가 악의가 되고, 권면은 악담으로 변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과정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의 한계를 만나게 되고, 처음과는 정반대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5/29/14

대속자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욥19:25)

"나의 대속자는 살아계시니..."  이 표현은 욥기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이고 찰스 웨슬레의 작사한 찬송가에서도, 헨델의 메시아에서도 노래로 불려진다.

이 구절은 사실 논란이 많다. 대속자를 하나님으로 보기도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이 구절이 부활신앙을 말한다 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다 하는 이들이 서로 맞선다.

성경을 오늘의 관점에서만 보려할 때 성경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칠 수 있다. 

욥을 악인으로 규정한 빌닷의 연설(18장)에 대한 응답으로 욥은 친구들마저도 떠나버리고 하나님마저도 그를 원수처럼 대하는 처절한 고독을 말한다. 그는 고난을 초래할 만한 죄가 없는데 왜 하나님이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한들 질게 뻔한 싸움이다. 그래서 자기를 도와줄 누군가를 소망한다. 욥기 9:32-35에서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제3의 "판결자"를, 16:19-21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증인이 되고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해주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19장에 들어 소망은 확신으로 변한다. 자신의 박해자 하나님(19:22) 앞에서 그를 위한 대속자( "고엘")가 분명있을 것이라 고백한다. 욥기에서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사실 욥은 그가 누구인가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신의 무죄함이 입증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죽음 이후라도 떳떳하게 서서 하나님을 대면할 날이 올 것이며, 하나님을 더 이상 낯선 타인처럼 보게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이다(27절)

이것이 욥의 세계관에서 풀 수 있는 해법이었다. 물론 우리는 신약의 빛으로 욥의 대속자를 감지한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소개된다.
욥과 다른 것은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해줄 중보자를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으로 인한 중보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 중보자를 만난다.

5/28/14

소외


고난이 주는 고통스러움의 하나는  소외다. 욥기19장에서 욥은 그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서 이 소외감을 말한다. 형제들(13절), 친척들(14절), 종들(15-16절), 아내(17절), 친한 친구들(19절) 마저도 그에게 등을 돌린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를 업신 여긴다(18절).


뿐만 아니라 유일한 피난처라 할 수 있는 하나님 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셨다 느낀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6절), "내 길을 막아...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8절), "나의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9절),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며"(10절)....  이것이 욥이 느꼈던 하나님이다.


욥은 갈 곳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처절함이었고 고독이었다. 신문지상에서 한 신학자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라고 권한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빠른 답변을 찾지만, 욥기도, 세월호도 그렇지 않다 말한다.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아무 대답이 없다"(7절. 공동번역)고 욥은 절규한다.


빠른 답을 주는 위로자는 쉽게 공격자로 변한다. 그것이 욥의 친구들에게서 확인하는 진실이다. 오히려 C.S. 루이스가 말한 것 처럼 아무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고난의 소외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5/05/14

간단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욥2:12)

욥기가 1-2장으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으로도 완성도 있는 이야기가 된다. 욥은 재물을 잃고 자녀들과 건강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완벽한 신앙의 승리를 보인다. 그것으로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충분히 귀감이 된다.

또 그 친구들의 위로도 매우 인상적이다. 각자 멀리서 서로 기별을 하여 욥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도착해서 그와 함께 있어주며 함께 울며 시간을 보내준다. 

이야기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욥기의 진짜 이야기는 3장 이후다. 우리는 거기서 욥의 승리 이면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고, 친구들의 위로 이면의 또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세월호 참사로 모두가 아프고 슬픈 시기에 욥기는 2장으로 끝나지 않음을 기억한다. 이런 슬픔을 이겨내는 것도 중요하고 이들을 향한 우리들의 위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있고 보아야할 우리들의 모습이 있고 만나야할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간단히 1-2장으로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욥기의 장들처럼 자녀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싸움은 길고 처절할 것이고 애도하는 우리들에게도 힘겨울 것이다.  힘겹지만 우리는 2장을 넘어선 그 길을 걸어야 한다. 

5/02/14

까닭없이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

욥기가 제기한 한가지 문제는 경건은 조건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욥은 경건한 자로, 의로운 자로 묘사된다. 사탄은 그 경건은 조건 때문이라 했고, 하나님은 그러면 시험해 보라 하셨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조건들이 깨져버리는 시험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조건없이 하나님을 따른다 생각했던 우리들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 깨지는 현장에서는 비명을 아니지를 수 없다. 그때 우리가 직면하는 질문은 '이래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가"다. 

하나님이 시험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의 경건이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보고자 하신다. 우리의 조건들이 다 없어지는 날, 그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이삭을 요구하시는 날, 그래도 우리는 모리아산에 오를 수 있겠는가? 

글쎄, 쉽지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