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08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

갈라디아서를 보면 성령을 따라 살라고 되어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영의 역사이기에 신비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의 문맥은 보다 실제적인 지침을 준다.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상반됨을 설명하고, 성령을 따라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육체를 따라 살 때의 삶의 모습들과 성령을 따라 살 때의 열매들을 열거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들은 우리의 선택을 요청하는 것이다.
즉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등의 열매를 선택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육체의 열매인 미움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우리가 나타낼 수 있는 반응일 때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설명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십자가와 더불어 그 정과 욕심을 못박았다고 말한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성령이 원하시는 바, 성령의 열매들을 삶의 현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7/23/08

십자가는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게 되면 십자가의 복음이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다가갈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아주 단순하지만, 그러나 쉽지않은 면이 있다.

첫째로, 십자가에는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만들며, 돌아서게 만드는 면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는 면이 있다. 당시 할례는 당연시되었다. 할례를 문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히 할례의 무용성, 인간노력의 무용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십자가의 걸림돌은 우리가 못견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십자가를 맞춤형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가정사역, 문화사역, 찬양사역... 수 많은 이름을 들어 거기에 십자가를 끼어들게 만든다. 그러나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용하며 무익한지 깨닫기 전까지는 복음을 참으로 깨달았다고 얘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로 인간관계의 단호함을 강조하기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복음을 혼란케 하는 사람들을 스스로 베어버리라고 말한다.

7/22/08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갈라디아서 5:7

예수님은 한번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게 되라니요?
그것은 신앙의 여정에 도사리고 있는 영적인 위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후 갈라디아 교회에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도착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을 오도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달을질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처음에 들었던 바울의 복음에서 떠나 잘못된 신앙의 길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할까요? 갈라디아 5장에서 3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교회안에는 차선이 최선으로 오도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6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정작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잘못된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슬픈 사실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바울의 지도력아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은 복음적인 신앙을 가졌으나, 그 이후 지도자들에 의해 율법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하다.

3.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교회가 건강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늘 깨어있어야 되는 이유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깨진 창문 원리가 교회 안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7/21/08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 5:1

복음의 핵심은 자유함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종교, 신앙 이런 단어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속박이라는 단어인 것 같다. 사실 기독교회 안에는 그동안 복음과 상관없는 우리를 속박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왔다. 복음과 관계없는 전통과 문화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독교적 전통이라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어느새 복음과 전통이 혼합되어서, 복음과 함께 교회적인 전통을 따라야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해지는 것 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1세기 교회시절에는 아마도 할례문제였던 것 같다. 비유대인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와서 예수님을 믿음과 더불어 유대적인 전통인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자녀인 것 처럼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간단하다. 만일 구원을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면 1) 율법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를 다지켜야하고 2)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강경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한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단순한 주님의 외침 외에 우리는 수많은 사잇길들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오늘의 사람들은 복잡해진 복음 때문에 주님의 큰 대로를 놓치고 우리 문화의 사잇길에서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교회를 점검할 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일은 없어야 겠다.

7/18/08

선배 목사 바울에게 배우은 인생레슨

갈라디아서 4장 16-20절에는 당시 바울과 갈라디아교인간의 어떤 긴장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인생레슨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진실은 사랑의 또 하나의 얼굴이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사랑은 긴장을 가져오고 관계의 어려움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진실도 말하는 것이다. 요즘의 시대는 부담스러운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은 시대이다. 이것은 설교자요 목회자로의 유혹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때로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관계가 있어도 용기를 내는 것이 사랑이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이다.

둘째로 잘못된 동기로 선한 열심을 낼 수 있다. 이것은 바울 이후 갈라디아 교회에 왔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17절). 열심자체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거짓 선생들은 성도들이 바울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을 자신들에게로 향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열심을 내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선한 경쟁심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8절). 여기 사모함이란 '시기, 질투, 경쟁심'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대해서는 선한 경쟁심이 필요하며 장려할 만한 일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 자신도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이 달음질할지라도 오직 한 사람만 상을 얻지 못하느냐'고 상기시키면서 자기가 그 상을 받기 원한다고 한다. 일종의 선한 경쟁심이다. 어떤 이들의 경쟁심은 파괴적이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생산적일 수 있다.

넷째로 수고와 고통없이 이룰 수 있는 없다. 바울은 현재의 갈라디아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고통없는 결과는 없다. 아마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수고는 20절에 나와있는 모습인 것 같다. 바울은 다시 언성을 높여 교인들을 책망해야하는 심경을 말한다. 이것은 누구든 피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영적 아비로서 때로는 책망해야할 일이 있을 때 이것을 피하지 말자. 이것은 사람들과 대립구도가 되어 그들과 영적인 씨름을 해야하는 일인지 모른다. 아마도 나의 성격상 이것은 피하고 싶은 유혹인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없이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바울을 더 배우고 싶다.

7/15/08

율법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는 이유

갈라디아서 3장 21절 이하에 보면 율법이 우리의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세가지이다.

첫째, 율법의 한계성.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이나 모든 사람은 죄 아래(22절) 있다. 로마서 3:23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련되어야 했다.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믿는 자들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둘째, 율법의 한시성.
그러나 율법은 나름대로의 기여를 한다. 율법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23절)만 구속력이 있다. 이때 율법의 역할은 '초등교사'의 역할이다. 당시의 '초등교사'는 회초리를 들고 초기 어린아이들을 엄격하게 훈련하는 교사를 말한다. 율법이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죄인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하고(로마서 3:21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알게하고(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믿어야할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한다.
율법의 기능은 거기까지이다. 다시말하면 한시적으로 기역하는 역할이다.

셋째로, 율법의 폐쇄성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통한다면 유대인들만 특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믿음으로 가는 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여자나 남자나'(28절)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은혜의 복음은 성격성 선교적이다. 이제 갈라디아 사람처럼 우리 모두도 이방인들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법적으로주장할 수 있게된 것이다.

우리의 탄탄한 기초

하루에도 몇번씩 시간이 되면 기도하는 모슬렘인들을 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검은색의 복장을 하고 통곡의 벽앞에서 기도하던 유태인들을 보았을 때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우리의 신앙이 웬지 헐거워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야말로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15절이하에서 우리의 세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이것은 율법이 생기기도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에 대한 실패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전부터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구원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모세이전의 아브라함은 율법이전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둘째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다. 율법은 조건적이며, 우리가 그 조건에 맞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완전한 우리를 인지하고도 구원을 약속하셨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우리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에 기초한다면 우리의 구원이야말로 가장 탄탄한 기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우리의 구원은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다. 구약의 역사를 한마디로 언약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 언약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오신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된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초는 가장 탄탄한 기초위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