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13

COME BACK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슥 1:16)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말씀하신 하나님 역시 당신의 백성들에게 돌아오셨다. BC 586년의 예루살렘의 파괴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떠났음을 의미했다. 스가랴 1장의 천사의 말처럼 이들의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진노의 하나님이 다시 긍휼의 하나님으로 돌아오셨다.

하나님의 긍휼의 가시적 사건은 파괴되었던 성전의 회복이었다. 하나님이 진노 때문에 파괴되었던 성전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셨음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긍휼의 게시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준은 성전이었다. 이미 사람들이 귀환을 시작했지만 아직 성전이 완성되지는 못했다. 성전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BC 586년에 파괴되었던 성전은 BC 516년에 재건이 완성된다. 정확히 70년만의 일이다. 파괴되었던 성전의 재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갈등을 경험한다.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제한됨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항상 먼저 손을 내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는 불안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돌아왔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신다. 그래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곧 우리들의 파괴되었던 성전들을 회복시켜 주심을 통해 하나님의 COME BACK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들의 파괴된 성전은 가정일 수 있고 관계일 수 있고 실패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에 망가졌던 우리들의 파괴된 성전들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온전히 확신하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들의 성전회복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 회복보다 더 기쁜 것은 하나님이 내게 돌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성전회복은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5/30/13

활동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슥1:2)

스가랴와 학개는 동시대 선지자로서 포로귀환 이후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지도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독려로 귀환 유대인들은 성전건축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한 스가랴의 메세지는 "돌아오라"는 말씀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이들을 돌아왔다. 바벨론 포로 이후 그들이 정착했던 땅에서 팔레스틴으로 돌아왔고 선지자들의 말에 따라 성전건축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스가랴 1:1은 다리오왕 2년 8월에 전해진 말씀인데 학개 1:1은 다리오왕 2년 6월, 즉 스가랴보다 2개월전에 예루살렘 성전건축에 대해 호소했고 성전건축을 시작한 것이 다리오왕 2년 6월 24일부터였다(학1:15). 이들은 선지자의 말을 따라 건축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약 한달후 스가랴를 통해 전해진 말씀은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활동(Activity)이 회개를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회개는 아니다. 분명 회개는 입술만의 고백이 아닌 삶이 뒤따르고 삶에는 어떤 활동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활동 자체가 회개는 아니다. 성전건축은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이었고 그 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활동이 기독교적 삶을 대변하는 기독교 문화 속에 살고있다. 예배도 활동이 되었고, 섬김도 활동이 되었다. 교제도 OO모임이라는 활동이 되었다. 분명 활동이 필요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활동 속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거룩한 활동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가장 세속적일 수 있다는 것은 나의 경험에서도 발견하고 주변에서도 많이 목격하였다.

그런 활동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활동으로 치자면 나무랄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십일조생활하고 길게 기도하고 회당활동을 하고 안식일에 철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심의 악함을 공격하셨다.

어떤 활동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어떤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안위할 수 있다. 그 활동 속에 내 역할이 주도적일 때 더욱 그렇다. 활동이 내 영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성이 빈약해도 왕성한 활동가일 수 있고, 때로는 그 빈약함을 활동으로 대치하려 한다. 그러나 결코 대치될 수 없다.

기독교적 활동이 왕성한 지금의 시대, 수많은 기독교적 활동과 집회가 많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메세지는 스가랴의 메세지인지 모른다. "돌아오라".

5/27/13

지도자의 죄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디모게가 이 편지를 받을 당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었고 아마도 어떤 지도자들의 범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지도자의 범죄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교회공동체에서 종종 발생하게 되는 문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지침들은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된다.

1. 어떤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좋은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 "잘 가르치는 지도자는 배나 존경하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교회는 모든 성도가 지체가 되는 교제공동체인 동시에 지도자에 의해 인도되는 조직체이기에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우시고 지도자를 통해 교회를 이끌어가신다. 교회 공동체에서 지도자들 대한 존경심이 없으면 교회는 견고하게 세워질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이들의 스캔달이 숨겨진 7000명 같은 건강한 지도자들에 대한 존중심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

2. 범죄문제에 대한 고발은 신중해야 한다.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의 이야기들이 디모데의 목회장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없는 떠도는 얘기는 받지도 말라고 한다. 바울은 두세증인이 있어야 고소를 받는 모세법을 들어 교회에서도 증인없이는 함부로 사람을 단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19절). 이것은 사적인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귀에 어떤 이야기들이 들릴 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은 판단을 보류해야 하고 언급을 피해야 한다.

3. 범죄처리는 단호하게 해야 한다. 교회공동체에서 일반 성도들의 범죄도 작지 않은 문제지만 지도자의 범죄는 그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처리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교훈 삼도록 해야한다. 바울은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으라" 한다(20절). 오늘날은 조용하게 취급하고 조용하게 사직처리하려 한다. 바울의 가르침을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교회문화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4. 지도자의 범죄처리는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 바울은 매우 엄격한 어조로 이를 강조한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라 말하면서 지도자의 처리는 편견없이 공평해야할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도 편견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다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편견의 찌꺼기들이 우리의 중대한 결정에 작용할 수 있다. 바울이 이런 교훈을 주는 것은 편견에 의한 잘못된 결정들이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정을 내리는 자에게 최고의 덕목은 공평이다.

5. 그러므로 지도자를 함부로 세워서는 안된다. 바울은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한다. 지도자의 범죄가 심각하기 때문에 교회의 목회리더십이든 평신도 리더십이든 경솔하게 세우는 것은 자칫 하면 그들의 범죄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22절).

6. 우리의 판단은 부분적일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죄는 밝히 드러나지만, 어떤 범죄는 마지막 심판석 앞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24절). 지금 정죄받는 사람의 죄는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돌을 들었던 사람들의 드러나지 않았던 은밀한 범죄는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한다.

5/26/13

한 사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창세기 6장은 왜 홍수심판이 필요했었는지를 설명한다. 온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사람지으심을 한탄할 정도였다. 모든 사람이 악한 것만을 생각하고 악한 일만 행함으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다. 온 세상과 한 사람이 대조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

우리 시대의 도덕적 영적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린다. 창세기의 거룩한 씨, 하나님의 아들들마저 타락하여 온 세상이 희망이 끝나 보인 것 처럼, 교회가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할 때라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노아 한 사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셨고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새역사를 만드셨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으로 새 시대를 열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숫자적 대결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편에서서 일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이루어질 것 처럼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그 한사람이 있는가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5/25/13

먼저 자기 집에서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딤전5:4)

초대교회 당시 과부의 처지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경제활동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교회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했다. 이는 사도행전 6장에서도 나온다.

바울은 만일 그 과부에게 가족이나 친족이 있으면 그들이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4절) 돌보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라 했다(8절).

이들을 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이 믿음의 행위이며, 믿음은 "먼저 자기 집에서"(4절)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믿음이 허공에 뜨기 쉽다. 신앙의 거창한 구호가 있는데 삶의 실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선교를 외치는 것이 가정을 돌보지 않는 고르반이 되기 쉽다.

"먼저 자기 집에서". 우리의 신앙이 출발해야할 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돈의 문제다. 신앙실천의 첫번째 장은 가정이요 실제적인 면에서 마땅히 행해야할 것을 행하는 것이 신앙이다.. "먼저 자기 집에서"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야 한다.

5/24/13

핸디캡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디모데의 핸디캡은 젋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한국사회와 같이 연장자가 자연스러운 권위를 갖는 사회에서는 핸디캡이이었다. 원래 장로는 나이와 경륜이 깊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자연스레 생겨진 지도자들이었다. 나이 많음이 권위가 되는 사회 속에서 디모데는 젊은 지도자가 되었다.

바울은 디모데가 가진 이런 핸디캡은 그의 삶의 모본으로만 극복될 수 있음을 코칭해준다. 지위를 가지고 권위를 행사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삶이 본이 되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존경을 받게 되면 그의 권위는 확고해진다.

섬김의 리더십이 권위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더욱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우리들에게 그 권위를 행사하는데 핸디캡이 있을 수 있다.

그 핸디캡은 지식의 부족일 수 있고, 언변이 탁월하지 못할 수 있고, 건강이 좋지 못할 수 있고 과거 경력의 문제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이 본이 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각인될 수 있다면 우리의 핸디캡은 극복될 수 있고 영적 권위는 바로 세워질 수 있다.

5/23/13

거룩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본문의 메세지역은 이렇다.

"Everything God created is good, and to be received with thanks. Nothing is to be sneered at and thrown out. God’s Word and our prayers make every item in creation holy."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혐오스러운 것도 버릴 것도 없으며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이며 인간들의 역사이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오염되었다. 결혼이 그렇고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다. 비록 많이 오염되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그렇게 될 때 소위 세속적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 속에서 신성의 가득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기도와 말씀이다.

5/22/13

교회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교회의 일꾼들에겐 고난이 있다. 디모데전서 3장은 감독과 집사,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회 리더십과 평신도 리더십의 자질에 대해 언급한다. 초대교회 리더들의 기준은 엄격했다.

이런 엄격함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위대함 때문이다. 바울은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한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위대한 공동체다.

교회의 위대함은 교회의 사이즈나 재정자립도의 문제가 아니며, 구성원들이 어떤 이들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공동체라는데에 있으면 하나님의 진리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교회의 일꾼들이다. 할렐루야!

5/21/13

검증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

얼마전에 검증이란 말이 정치권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리더는 검증이 필요하고 이것은 교회의 목회적 리더십이나 평신도 리더십에도 마찬가지다.

본문에는 교회리더십에는 세가지 검증이 적용되었음을 볼 수있다.

첫째는 개인적 삶의 검증이다. 자신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릴 수 없는 이가 교회 리더가 될 수 없다. 리더가 자신을 다스려야할 목록들을 본문은 보여준다.

둘째는 시간의 검증이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리더로 세워선 안된다. 영성이 자라가고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째는 사회적 검증이다. 교회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꼭 이웃에게 칭찬받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교회리더는 불신자들에게도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성경의 이 검증시스템은 오늘과는 사뭇 다르다. 오늘은 설교라든가 행정적 능력, 혹은 교육적 배경 등을 더 중요시 하는 것 같다. 능력보다는 삶과 인격과 영성이 더 중요하다.

아마도 성경은 능력은 자라가고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의 리더가 됨은 까다로움이 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리더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이를 선한 야망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음을 계속 사모하자.

5/20/13

이미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사람들마다 그 사람이 풍기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 남성들이 풍기는 이미지가 있고 여성들이 풍기는 이지미가 있다.

바울도 당시의 남성들과 여성들이 가진 어떤 이미지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남자들은 주먹을 쥐고 혈기를 부리는 성난 이미지를 생각하고 여성들은 유행과 자기 치장에만 신경쓰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바울은 교회 안의 남성과 여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기를 원했다. 남성들은 주먹대신 거룩한 기도의 손을 올리는 이미지를 가져야하고, 여성들은 외적 치장 대신 내면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어 그것이 그의 이미지가 되기를 원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들을 한다. 교회 안의 남녀들이 어떤 이미지로 비쳐지며, 나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세속에 찌든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책임인 것 같다.

교회의 이미지는 결국 교인들의 이미지다. 교인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이는가가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한다.

이미지는 치장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은 결국 위선적 이미지만 만들어낸다. 진정한 이미지 메이킹은 우리의 삶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요 일관적 습관의 문제다. 일관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는 하나님의 사람의 이미지다. 기도하는 사람의 이미지요 목자의 이미지다. 그렇게 살고 싶다.

5/18/13

World Christian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오늘의 묵상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두번 언급된다.
첫째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두번째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모든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성향으로 구분하고 신앙색으로 구분하고, 기타 많은 요인들로 사람들을 나누려고 한다.
모든 사람을 품어야할 복음이 특정한 이들만을 위한 것 처럼 비쳐진다.
"개념"있는 사람, 혹은 "의식"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개념이나 의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우리가 세상을 품어야 하고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을 품어야 한다.

누군가를 필터링하는 우리의 필터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리들의 독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World Christian"의 시작은 내가 배제해온 사람들을 품고 기도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5/17/13

본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모데전서 1:16)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가 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말한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본이란 무엇일까? 여기서는 그가 본이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긍휼의 본이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 말한다. 자신은 도무지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휼이라 표현했다.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본은 바로 이 긍휼의 본이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본보기를 삼아주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의 본이다.

어찌 바울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보여야 본은 두가지 차원의 본이 다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인 다운 성품과 섬김과 여려 가지 모습의 본을 보여야할 것이요,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죄인이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 본은 우리의 죄인됨의 본이요 실패의 본이요 연약함의 본이다. 우리의 잘남이 아니라 못남이 드러나고 그 못남 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가 부어졌음을 보여주는 본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본이 된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께 나가는 용기를 갖게 할 수 있다.

5/16/13

자격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충성된 것과 충성되이 여겨주심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충성되었기 때문에 직분을 맡은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겨주셨기 때문이다.

충성되었기 때문이라면 자격이 있었다는 뜻이요, 여겨주셨다는 것은 자격은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비슷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우리의 태도를 가른다. 자신이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교만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격이 되지 않았는데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겨주셔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겸손히 주를 섬기게 된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는 그의 인생을 마무리 하는 시점이다. 그동안 많은 사역이 있었고 놀라운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로 자신이 자격됨을 생각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은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귀한 사역을 맡겨주셨다는 생각을 품고 사역에 임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 일은 내 일이 되어버리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하는 일은 주의 일이 된다. 하나님은 바울에게만 이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고 우리들에게도 내려주셨다. 우리 또한 자격 없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게 하신다. 감사, 또 감사.

5/15/13

전문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에 언급된 사람들을 종교문제에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라 묘사한다. 

어릴 때 교회에는 목사님만 계시는 줄 알았다. 지금은 기독교계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있고, 그 길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다. 상담이든 코칭이든 가정문제든, 리더십이든 혹은 청소년 문제든 전문적인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존 파이퍼 목사님이 낸 책 가운데 "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s"라는 책이 있다. 너도 나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시대에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성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영성이 있고 그 기초 위에 전문성이 세워져야 한다. 그런 보편적 영성이 없고 전문성만 있는 교회는 뿌리를 잃은 교회가 되어버린다.

본문에서 문제되는 전문가는 율법 문제에 전문가를 의미한다. "율법의 선생"이란 표현은 통상 랍비들에게 주어지던 표현이었다. 문제는 삶이 없는 전문성이었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했지만 자신들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보편적 영성의 기초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바울은 가르침의 목적은 사랑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5절).  교회 가르침의 목적은 수많은 전문가들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들을 배출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율법을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바울과 예수님은 말씀의 지향점을 명확히 했고 단순화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순화한 것을 다시  끊없이 세분하여 그 세분화된 어떤 영역의 전문성을 추구한다.

다시 한번 말씀의 지향성, 복음의 단순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접하는 지향점은 사랑이다. 우리의 길이 사랑의 길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5/13/13

무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

만일 예수를 찾는 그곳에 예수가 계시지 않는다면? 그를 만나리라 예상했던 곳에서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예수의 무덤가에서 여인들은 이 경험을 했다. 당연히 예수는 그 무덤에 계셔야 하는데 그는 거기 계시지 않았다. 천사는 말한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 여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은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제자들조차 찾지않았던 그 무덤을 먼저 찾아갔다. 그러나 사랑이 믿음을 대신하지는 않는 것 같다.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기에 무덤에 온 것이다.

우리도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만나러 어느 곳으로 간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그곳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일까? 혹시 우리는 무덤으로 가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그 무덤은 예수가 계셨던 곳이고 그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그의 세마포를 발견할 수도 있는 곳이다. 우리가 찾는 그곳에도 예수가 일하셨고 역사하셨던 흔적이 있는 장소일 수 있다.

그 무덤은 교회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기독교적 모임일 수 있다. 예수의 유품이 있고 역사가 있지만, 단 한가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을 수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는 천사의 말이 다시 들려지는 것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를 향해 이 말이 들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목회자인 우리를 만나러 오는데, 찾아온 그 발걸음들이 무덤가의 여인들의 빈 발걸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그저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5/09/13

십자가

"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

십자가는 믿음의 방해물이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식이면 믿을 수 있겠다 말하곤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시면, 살아계신 증거들을 보여주시면, 우리들의 기도가 모두 응답되면 그러면 믿을 수 있겠다 하신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그리스도를 기대했는데, 죄수의 모습으로 나타난 메시야를 사람들은 혐오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능력이 아닌 무력함의 길로 가셨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길은 능력이 아닌 사랑의 길이었다.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로 가는 길이다. 그것이 그분의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하나님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대한다.

참 믿음은 사람들에 실망을 안겨준 십자가에 담긴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생겨난다. 오늘도 우리를 실망시키는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 실망 때문에 돌아서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했던 그길이 우리를 사랑하는 길이었고, 그것이 참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 길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5/08/13

억지로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27:32)

우리가 자원하여 하는 일 뿐 아니라 억지로 하게 되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 그가 그날 억지로 한 그 일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였다. 그의 두 아들이 초대교회의 일꾼이 되었음을 로마서 16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억지로 한 그일은 은혜였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수는 없다. 원하지 않은 일인데 해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나중에는 억지로 해야만 했던 그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인기주의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주시지 않는다.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도 주신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용하시고, 억지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만할 때 우리 마음이 기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그런데 억지로 감당해야만 했던 그 일이 내게 축복이 되었음을 자주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이 무엇을 허락하셨든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자.


5/07/13

결정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26)

우리는 때로 양심에 따르기 보다는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결정하는 경우들이 많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 과정도 이를 보여준다.

빌라도는 예수를 향한 사람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전언도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예수를 내어주려 했고 사람들에게 바라바와 예수 중에 선택하라 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바른 결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자기 책임하에 있는 곳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가 먼저 고려한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이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지난 2000년 동안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인생은 수 많은 결정앞에 서게 한다. 우리도 빌라도와 같이 양심의 결정 보다는 우리의 어떤 이유로 인해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정도가 아니 길은 우리에게 더 큰 댓가를 치루게 한다.

5/06/13

온전성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마27:6)

우리들의 어떤 행위에 대한 기준이 사안마다 달라질 수 있다. 대제상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공모하는 행동, 이를 위해 거짓 증인을 세우는 행위는 허용했지만, 유다의 비극적 죽음 뒤에 남긴 돈을 성전고에 넣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살인공모에 참여하고 거짓을 허용하면서 예배적 불경건은 허용하지 않았다.

잘 살펴보면 우리들에게도 이런 면들이 많다. 어떤 사안에 있어서는 목소리 높여가며 그것을 지켜가지만,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허용하고 있는 영역들이 많다. 어떤 면은 광신적이기까지 하면서도 또 다른면에서는 무신론자와 같은 불일치의 모습을 우리도 가진다.

영어의 Intergrity는 이런 불일치를 극복하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양상과 모습을 가지는 온전성을 뜻한다. 내면과 외면의 일치된 온전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온전성, 신앙과 일상이 일치된 온전성을 추구해야 한다.

건강한 신앙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사안마다 사람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인격의 분열 뿐 아니라 삐뚤어진 영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

5/04/13

실패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이 실패는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패는 많은 간증이 있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베드로의 회심,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과정,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있었던 많은 에피소드,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는 등 베드로는 간증이 많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충심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마지막 만찬 때 자신은 절대 부인하지 않을 거라는 베드로의 말은 진심이었다. 결코 거짓된 꾸밈이 아니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해서 이런 실패가 우리에게 안일어나리라 보장할 수 없다.

베드로가 너무 멀리 있다면 요즘 사회적으로도 낮뜨겁게 만드는 기독교 인사들의 실패,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실패다. 우리 안에는 실패한 베드로의 얼굴이 숨어있다. 언제라도 그 얼굴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5/02/13

능력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능력이 있는 것과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주님은 위협당할 때 열두군단이 넘는 천군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조롱하는 대로 뛰어내리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실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듯 능력을 휘두르는 것은 유혹일 수 있다. 사단이 처음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보이라 했다.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했다. 능력은 시험이 된다.

반면 예수님이 능력을 유감없이 보이기도 하셨다. 바다를 잠잠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보여주는 케이스들이다.

예수님에게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천상의 군대를 부를 수 있으나 체포되고 십자가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베드로의 칼처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된다. 때로는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이나 스펙이나 경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칼보다 더 예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많은 재주와 능력을 가진 이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휘두르는 칼로 우리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묵이지지란 말이 있다. 말로 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알아줄 것은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묵묵히 살아가면 그것이 웅변이 되고 칼이 된다. 예수님은 천상의 군단을 부르지 않고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하셨지만, 그분은 만천하가 그분을 메시야로 고백한다.

우리는 그 길로 가야한다.

5/01/13

순종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의 정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이것은 세속적 욕망을 말함이 아니었다. 다만 십자가를 피하기 원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원이었다.

자연스러움이 신성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길목에서  우리의 자연스러움, 당연함 등을 부정해야 할 때가 있다.

선교사들은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가족을 떠난다.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사역자로서 사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말했지만 자비량했다. 그는 결코  결혼이나 사례를 부정하지도, 죄악시 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의 현장에서 그 자연하고 당연한 것도 부정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세속성과만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악된 것과의 싸움만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들을 내려놓아야할 때가 있다. 죄악된 것, 세속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 더 어렵다.

이것이 우리도 겟세마네로 가야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