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09

고전1장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인 이유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내에 분쟁과 다툼, 갈등이 심했습니다.
성적인 스캔달도 있었고, 교우 간에 법정 소송 문제도 있었습니다.
은사문제로 교회가 질서없는 아수라장 같은 교회였습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소문이 좋지 못한 교회, 건강하지 못한 교회,
등록하고 싶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의 교회 역시 많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불완전한 교회요, 해결되어야할 문제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도로 부르심받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바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구별하셨습니다.
구별된 사람들... 이것이 거룩의 뜻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많은 문제점도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여기서 일하시는 흔적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방언과 예언을 비롯하여, 지식의 은사, 기타 많은 은사들을 주셨고,
이 은사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면 하나님이 아직도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왠만하면 철수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습을 보면 때때로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일하신다는 흔적들을 봅니다.
그래서 감히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스스로를 부릅니다.

셋째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일하실 완성된 모습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일하셔서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없는 모습으로 이들을 서게하실 것을 확신한다고 편지합니다. 당시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일하신다면 언젠가 영광스럽고 흠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될 날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전투하는 교회"에서 "승리하는 교회"를 꿈꾸며 우리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6/24/09

창50장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간 이유

창세기 50장에서 야곱은 자기 시신을 고향 땅,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장례해줄 것을 부탁한다.
애굽 땅에서 야곱의 가족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총리 요셉의 덕에 그들은 풍요로운 고센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야곱이 부탁한 매장지는 척박하고 작고 초라한 땅이었을 것이다.

왜 야곱의 가족은 이 초라한 땅을 고집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후손들의 미래가 펼쳐질 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질 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풍부를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초라하고 척박한 선택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인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해야하는 복음, 교회 공동체,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비전들...

이러한 것들은 애굽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야곱의 가족이 고집하는 가나안 땅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최선의 장소가 소명의 장소임을 믿는다.
약속의 땅이 가장 좋은 땅임을 믿는다.
현재는 작고 초라할 지라도 그것이 내가 있어야할 장소임을 믿는다

6/10/09

창44장 유다의 고민


유다는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베냐민이 노예로 잡혀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베냐민은 다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있고, 아버지 야곱이 막내 아들 베냐민을 요셉의 사후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는지도 알았지만, 또 다른 이유에서 유다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섭니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입니다.
십대 소년이었던 요셉을 모든 형제들은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형제들은 어느 들판에서 요셉을 죽이려는 찰라, 유다의 제안으로 목숨은 건드리지 않고, 애굽으로 가는 대상에게 동생 요셉을 팔아넘깁니다.  물론 집에 와서는 야곱에게 동생 요셉이 짐승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를 했구요.

그 이후 유다의 그 형제들은 야곱이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목격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에 대한 시기심에 그러했지만, 나이가 들어도 요셉 대신에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야곱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와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백하지 않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베냐민 마저 노예가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양심의 죄책감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노예가 되고자 자청하게 됩니다.

죄책감은 묻어둠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백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