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12

권력욕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야망 중에 하나는 권력욕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예수님과 3년여 시간을 보낸 야고보와 요한이 그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구했던 것도 가장 중요한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는 인간의 권력욕이 무엇인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1. 권력욕은 매우 이기적인 욕망이다.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 세번이나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는 자리가 있었다. 권력욕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욕망이다.

2. 권력욕은 관계를 수단화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예수님과 특별히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으로 알려진다. 이런 특별한 관계를 자리를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을 이용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할 가치들을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3. 권력욕은 예수 제자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욕망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의 길은 단적으로 순복(Submission)과 고난(Suffering)과 섬김(Servantship)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어떤 자리를 주시든 기꺼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제자들은 고난의 잔을 각오하고, 가장 낮은 위치인 종의 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은 예수 제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1/25/12

지배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의, 혹은 무엇의 지배 밑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죄의 용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권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로마서 5-8장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지배권을 보여준다.

아담의 지배에서 그리스도의 지배로(5장, 7:1-6)
죄의 지배에서 의의 지배로(6장)
죽음의 지배에서 새생명의 지배로(5:12-21, 6:1-4, 8:1-13)
율법의 지배에서 은혜의 지배(6:14-15), 성령의 지배로(7:6, 8장)

우리가 누구인가는 무엇이 혹은 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새로운 지배권에 들어가는(종이 되는) 복음의 역설을 경험하는 것이다.

11/23/12

새로운 삶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MESSAGE 번역이 생생하다 : 
"If we’ve left the country where sin is sovereign, how can we still live in our old house there?"
(우리가 죄가 지배하는 나라를 떠났다면 어떻게 거기에 있는 옛날 집에 계속 살 수 있겠는가?)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상징하는 침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When we went under the water, we left the old country of sin behind; when we came up out of the water, we entered into the new country of grace—a new life in a new land!"
(우리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뒤에 있는 죄의 옛 나라를 떠난 것이고, 물 속에서 나왔을 때 우리는 새로운 은혜의 나라-새 땅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죄에 대한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11/22/12

거룩을 추구함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시급하게,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할 것은 거룩이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진술한  바울은(로마서 3-5장)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문제를 바로 다룬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이것은  기독교적 사역에 대한 관심보다 우선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의 상처보다 우선해야 한다. 우리의 현재의 고난보다 우선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더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상처는 치유받아야 하고 고난 속에서 승리해야 하고, 우리의 불안스러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것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거룩을 향한 추구는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관심이어야 하고, 최대의 관심이어야 한다. 

11/21/12

죄와 은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1)

복음의 깊이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우리의 죄인됨의 깊이를 아는 것이며, 우리의 죄인됨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깊히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 해리는 우리에게는 4개의 자아가 있는데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와 나는 아는데 남이 모르는 나와 남은 아는데 내가 모르는 나와 남도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그만큼 자기 인식에 있어서 무지하다. 남의 티끌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자신의 들보에 대해서는 둔감한게 우리다.

우리가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함을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들어옴으로 우리의 범죄가 늘게 되었다. 즉 죄가 죄인줄 모르다가 말씀을 통해 죄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씀을 대할 수록 우리의 범죄가  많아짐을 느낀다. 우리의 죄인됨을 더 한층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성경은 인간의 실상에 대한 고발장이다. 심지어 하나님 벗이라 칭해졌던  아브라함에게도 치졸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다윗에게서 일어났던 성적 범죄와 은폐, 그리고 살인의 죄를 그대로 보여준다.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범죄의 씨앗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고, 의인은 없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자신의 죄가 많다고 느끼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않는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감동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죄인됨과 추함을 들여본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느끼게 된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은혜 위의 은혜"라고 했다.  죄가 더하면 은혜가 넘친다. 

11/18/12

그래도 부족한가?

오늘은 감사절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떤 인생조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혀 부족할 것이 없는 완벽한 삶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 고백을 하게 된다.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누리는 풍성한 축복들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의 풍성한 축복들이 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인생과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1절).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2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벽은 피조물된 물질이나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피조물도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줄 수 없다.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시편23). 믿음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샬롬의 관계를 만들어 준다. 샬롬은 단지 화해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모든 조화, 모든 충만함, 모든 채워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은혜와 샬롬을 경험하게 된다.

2.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망의 풍성한 축복들이 있다. 그리스도인 소망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우리가(롬3:23)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땅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이땅에서도 부분적으로 맛보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완벽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롬5:2).

이 즐거움은 인생의 어떤 시련과 고난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난도 견뎌내게 된다. 우리 인생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은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상쇄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우리의 상처와 고난을 상쇄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니 이 땅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도 되지 못한다(롬8: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이들은 고난을 견뎌내고, 고난을 이겨낸 이들은 연단을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소망하는 바들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게 된다(롬5:3-4절).

3. 그리스도 안에서는사랑의 풍성한 축복들이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가 실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는 일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롬5:6),  죄인되었을 때에도(롬5:8),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도(롬5:10) 부어지는 사랑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의 기대는 아프도록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오늘은 감사절이다. 이 감사절에 나는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것으로 만족스럽지 않은가? 이 풍성한 축복들이 있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가?

11/16/12

부활신앙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신앙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런데 바울이 어떤 면에서 부활신앙을 강조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된 아들을 출산하기에는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았다(롬4:19). 이삭의 출생은 죽음에서 나오는 생명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종의 부활의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였다(롬4:17). 이 부활의 신앙으로 그를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22).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서 부활하셨다(롬4:25).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출생하기에 “죽은 것 같음”과 동일한 것이다. 사라의 몸이 더 이상 아들을 출산할 수 없었듯이, 우리들은 의를 출산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사라의 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듯이, 우리들은 의에 대해서는 소망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시다. 사라의 몸에서 기적의 아들이 나왔듯이,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게 된다.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부활의 체험이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여정에서 “죽은 것 같음”을 경험했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죽은 것 같음”을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음”에서 새생명의 역사를 믿었듯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죽은 것 같음”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11/15/12

Credit



오늘의 사회에서 Credit이 없으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금융거래가 매우 어려워질 뿐 아니라 생계 자체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영원한 세계에 Credit이 없으면 끔찍한 결과가 찾아온다. 이 세상에서 Credit이 없으면 잠깐의 고통이지만, 다가올 세상에서 Credit이 없으면 영원한 고통이 찾아온다.
 
로마서 4장에서는 Credit이란 말이 매우 많이 나온다(3, 4, 5, 6, 9, 10, 11, 22, 23, 24). 8절의 Count와 Credit은 원어에서 같은 단어(logizomai)다. 하나님 앞에서도 Credit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Credit이 없다. 우리는 Credit이 0상태인 죄인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스스로 Credit을 쌓는 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그렇게 하려고 했다. 성경은 이 방법은 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Credit이 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Credit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둘째는 우리가 자격이 안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Credit을 주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credit)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Credit을 보유하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두 번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회심의 순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은 과분한 Credit을 허락하신다. 내 실제 모습보다 과분한 인정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것들은 내가 쌓아놓은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이었다.

11/14/12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1.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순간의 결심만은 아니다. 로마서 4장에서 언급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전생애에 일관되게 나타는 모습이었다. 3절에 언급된 믿음은 창세기 15장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그의 신앙 여정 초창기의 믿음을, 19절에 언급된 믿음은 그가 100세때에 가졌던 믿음을 말한다.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은 한 순간만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가 보여준 믿음이다.  한 순간에 잠깐 반짝이고 사그러들었다면?  나는 그 진정성을 신뢰하지 못할 것 같다.

2.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2절). 믿음은 어떤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하다 인정받고, 일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받았다면 자랑할 것은 없는 것이다(4-5절). 사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는 많은 인간적인 실수를 그대로 노출한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이다.

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인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이스라엘 민족이 좀더 종교적인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모세시대부터이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면서 이스라엘은 율법과 제사와 할례와 성막제도 등이 제도화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이전인물이다(9-16절).  즉 이스라엘이 종교화되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다. 즉 믿음과 종교화는 다르다. 교회생활도 믿음과 상관없는 종교적 활동이 될 수도 있다. 믿음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주고 받는 대화이며 신뢰이다.

4.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가능성과 개발에 대한 믿음이 퍼져있다. 이런 태도는 인생에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성경이 의미하는 믿음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다(18절). 100세된 그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믿음은 가능성에 대한 절망을 시인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구원문제를 인간이 해결한 가능성은 없다. 우리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가능성은 절망이다. 우리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절망 속에서 구원과 희망을 가져올 것을 믿는 것이다.

11/12/12

십자가의 은혜



로마서 3장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은혜를 보여준다.

1.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한다(24절).  구속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값을 치루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자유케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2. 십자가는 화목제물(25절, a sacrifice of atonement, NIV)이다. 이 단어는 NASB에서는 propitiation으로, RSV에서는 expiation으로 번역되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의미가 있고,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는 의미가 있다.  C. H. Dodd같은 학자는 propitiation은 이방제사의 개념이라고 거부하지만,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속죄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5의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물이란 뜻이 맞다고 생각된다. 십자가에서 우리르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

3.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24, 26, 28절).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로운 삶)을 함축하는 단어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을 제공한다.

감사한 것은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11/11/12

자유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3:29)

사람이 자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유대인들도 나름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은 우리가 유대인처럼 되는 것에서 자유하게 해준다. 유대인들은 믿음을 가지려면 유대인이 되는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지만, 바울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도 안되고, 그 다른 것들을 복음의 일부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바울 당시 상당수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에는 할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느 특정 훈련 프로그램을 마쳐야만 되는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처럼 말하고 다른 이들을 정죄한다. 이들을 대하면 우리는 이방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분이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11/10/12

회심



내 신앙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 몇몇 주제는 반복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수면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 중 회심, 제자도,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교회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마다 계속 곱씹어 보게만드는 주제들이다.

이제까지 내가 견지해왔던 회심에 대한 입장은 종교성과 대비된 회심이었다. 나 자신도 그러했고 주변에서도 교회생활을 단지 종교성의 차원인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회심은 분명 종교성과는 다른 차원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 만남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가르쳤고 설교해왔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회심도 분명 종교성과 대비된 회심이라고 믿는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했던 이유도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들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회심은 인간의 종교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런데 이런 회심관에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곤 한다. 나를 포함해서 자신의 회심을 확신하는 이들 속에 나타나는 도덕적 무력감과 실패, 그리고 얕은 수준의 인격과 삶을 지속적으로 목격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회심이 이런 정도의 결과만 산출하는 것이라면 기독교 복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회심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의"라는 단어이다.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구원관의 핵심은 바로 이 "의"라는 단어이다. 로마서 3:20절이하에서 거의 모든 구절에서 "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다분히 구약적 배경을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경건한 삶의 총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회심은 우리를 의로운 삶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만약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의"와 무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믿음의 진정성을 신용하기가 어렵다. 회심은 어떤이들에게는 바울처럼 한 순간의 결정적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시작하는 그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회심과 제자도는 절대 구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11/09/12

깨달음



깨달음의 국어사전 뜻은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이다. 그런 면에서 지식과 정보와는 차이가 있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가 성경에서 지식을 얻는 것과 깨달음을 얻는 것은 차이가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한 깨달음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목적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로마서 3:10절에 “의인은 없나니...”로 시작되는 죄의 고발은 18절까지 이어진다. 이 구절들은 율법이라 말할 수 있는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구절들이다. 바울은 앞서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염두에 두고 “율법”이라고 말한다. 이 율법은 우리 모두 심판아래 있음과(19절) 아무도 자신을 의롭다할 수 없음(20절)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 모습, 우리의 죄인됨을 깨달아야 한다.
 
유대인들도 성경말씀에서 인간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다. 동일한 오류를 우리도 범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깨우침이 아닌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성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11/08/12

치우침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
 
성경은 모든 사람은 치우쳐있다고 증언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갈등의 현장에 자주 있게 된 편이다. 목회자와 교인들의 갈등도 많이 지켜보게 되었다. 수학으로 치자면 함수문제를 도형문제로 푸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목회자의 기대 이하의 인격과 품위 없는 말들과 도덕적인 integrity의 문제 제기를 목회자는 교우들의 훈련되지 못함과 신앙의 미성숙과 목회자가 주도하는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들을 많이 목격했다. 목회자는 다른 방정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수학문제가 무슨 문제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학문제는 풀지 못하는 난제가 되어버린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의 치우친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성령이 조명하시는 비추임이 필요하다. 그 성령의 빛 안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11/07/12

미쁘심과 두려움


미쁘신 하나님!  우리의 감사의 제목이다. 동시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미쁘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씀대로 약속하신 축복을 주시지만, 또 경고한 심판도 반드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들이 직면해야할 하나님의 미쁘심이었다.  말씀을 파기하지 않는 미쁘신 하나님이시기에(3절) 그분이 심판하신다해도 '하나님이 옳습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다(4절).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분은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 앞에 두려워해야 했다. 우리들도 두려워해야한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 앞에서 판단을 받을 것이다. 말씀에 미쁘신 하나님은 말씀을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11/06/12

미쁘심



 
현재 우리는 이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영어성경에서는 ‘faithfulness’으로 성실하심, 신실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주로 말과 관련이 있다. 즉 입으로 발설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는 성품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단어가 말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 1:18)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딤전1:15)
“미쁘다 이 말이여...”(딤전3:1)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4:9)
“미쁘다 이 말이여 ..”(딤후2:1)
“이 말이 미쁘도다...”(딛3:8)
 
말과 관련하여 “미쁘다”고 표현될 때는 그 말은 반드시 이행될 것을 확신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서도 이 말이 자주 사용된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히10:2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 11:11)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과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미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 아침 로마서 3:3절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미쁘심은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는 우리의 믿지 아니함(lack of faith, NIV) 혹은 언약에 대한 불성실함(faithlessness, MESSAGE)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의 인생과 운명이 변덕스러운 우리들의 성품에 좌우된다면 우리에게 사실상 희망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닻을 미쁘신 하나님에게 내린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분의 미쁘심으로 우리 인생을 붙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11/05/12

탓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원망의 대상이 된다. 로마서 3장의 유대인들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자부심, 하나님이 이방인들은 심판할지 몰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살지 못하다면 이방인들과 똑같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유대인들은 억울함을 느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냐?(3절), 그래 우리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좀더 부각되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드린 것이 아니냐? 그런 우리를 벌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5절) 어째서 우리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7절)"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싶어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기를 싫어한다. 대신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이라도 원망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바울은 단호하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faithlessness vs faithfulness, 3절), 우리가 거짓된 것이지 그분은 항상 참되시고(lie vs truth, 4절), 우리가 의롭지 못한 것이지 그분은 항상 의로우신 분이시다(unrighteousness vs righteousness, 5절). 하나님을 탓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

한밤이 되면 별은 더욱 빛난다. 그러나 별은 별이다. 어둠이 별의 빛을 만든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별은 더욱 빛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더욱 의롭게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의 거짓이 하나님을 더욱 참되게 만든 것도 아니다. 어둠은 결코 칭송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어떤 궤변과 핑계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탓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다.

회개의 시작은 누군가를 탓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1/03/12

질문을 알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답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바울은 사람들의 질문에 매우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 3장을 보면 복음에 대해 진술하다가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의식하고 있는 대목을 본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1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3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5절)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오늘의 현대인들은 다른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 질문 때문에 복음 앞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대답을 알아야 하고 변호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무지해서는 안된다. 




11/01/12

교회 연합의 기초 2


인간의 죄인됨은 교회 연합의 기초이다. 로마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내면의 죄를 실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냥 비난하기가 어렵다. 타인의 눈의 티끌에 비하면 자신의 들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상처로만 인식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상처로만 인식하게 되면 상처를 준 누군가를 비난하는 마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처 이면의 서로의 죄성을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밖에 없다.
 
로마서 3장은 교회 연합의 또 하나의 기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율법 등의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베푸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로가 없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사람들의 모든 자랑이 무색해진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열심과 활동과 헌신도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다. 우리 각자의 대단한 신앙배경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그 위대한 구속의 교리를 진술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꺼내는 이야기가 30절 말씀이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
 
이 믿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 복음의 기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