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11

우리를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

출28:15-30 말씀에서 우리를 보석처럼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다. 대제사장의 옷에 붙어있는 보석만 30억을 상회한다. 그 열두개의 이름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표하는 이름들이 도장새기듯 새겨져 있다. 이것을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인다. 가슴은 다른 말로 마음,열정, 애정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말이다. 즉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미 양어깨 띠에 두개의 보석을 달아 한 보석에 여섯 이름씩 새겨놓았는데, 다시 가슴에 한 보석에 한 이름씩 열두개의 보석이 제사장의 가슴에 달려있다.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마음 판에 보석처럼 새겨져 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이름들을 기록한 이유는 우리는 이중삼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엔 우리의 부족, 우리의 모습이 생각이 나서 이런 나를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실까 자꾸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체득해온 이 세상의 세계관 때문인 것 같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결과는 항상 노력의 댓가라는 것을 가르쳐왔다. 무엇인가를 노력해야 결과를 얻고, 성취해야 인정을 받고, 열심히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치 않은 것 같은 우리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보석들이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려있다. 대제사장은 죄인과 자격없는 이들을 위해 제사드림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열납되도록 돕는 이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업적과 성취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4/28/11

재능과 인격

삼손은 재능이 있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힘이 있었다. 그 힘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도덕성이나 인격은 준비되지 못했다. 인격이 준비되지 못한 재능은 때로 본인에게, 때로는 이웃에게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4/27/11

등불을 밝히라

출애굽기 27장에서 하나님은 성소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하신다. 후일에 엘리 제사장 시대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삼상3:3)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등불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엘리 시대에 여호와의 등불이 거의 꺼질 지경이었음을 보여주듯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등불들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성경읽기다. 이 성경읽기가 지속되는 때는 어김없이 영적으로 충만한 때였고 이것이 소홀해지는 때는 영적으로도 희미해질 때였던 것 같다.

4/26/11

십자가를 진다는 뜻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하셨다. 그런데 십자가의 의미는 해석자마다 분분한 것 같다. 우리는 먼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먼저 염두에 두고 십자가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청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가 중요한 것 같다. 당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이었고, 아직 십자가 질 것을 예고하기 전이었으로 당시의 청중은 그냥 사형틀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있었던 열심당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2000명이나 십자가형으로 사형당한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십자가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고 함께 말씀하셨던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즉 별개의 말씀이 아니라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반복하시는 예수님의 어법이 여기서도 나타난 것이다.

주님 따르는 길은 확실히 나를 부인해야하는 길이고 내가 죽는 길이다. 주님 따르기 위해서 내게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다. 오늘 아침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내 안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실체를 보여주신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죽는 길이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주를 따를 수 없다.

익숙함으로부터의 자유

지난 주간은 미디어를 자제하며 보냈다. 이미 생활화된 미디어들이 어느새 나를 압도하지 않는가 하는 자성에서였다. 묵상의 글을 올리는 블로그나 페이스북, 트위트가 거룩한 형태라 하더라도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짧은 시간이지라 결과를 운운할 것은 못되지만, 어느 자유로움이 있었다. 이 자유의 정체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고립의 자유가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아도 되고, 답글을 달지 않아도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웅켜잡고 삼키고만 있어도 되는 것. 어떤 면에서는 익숙함으로부터의 자유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들이 습관이 되면 습관은 우리의 주인도 될 수 있는 것. 그런데 습관과 익숙함의 길에선 주님의 음성이 반감되어 들어오는 듯 하다. C.S.루이스의 명저 "시편사색"에서 익숙하지 않은 시편의 하나님 모습은 세련되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게해준다 했다.때때로 익숙하지 않은 길을 돌아가면 내가 가지 않던 길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4/12/11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 장소를 본문에서는 '속죄소'라고 부른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는 뚜껑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겠다 하신다. 이곳은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리는 장소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곳을 '은혜의 보좌'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라 했다(히4:16).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싶어하시는 곳, 그곳은 하나님의 긍휻과 은혜가 있는 곳, 이것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4/11/11

하나님의 이름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 나라 대부가 나라를 대신 다스려달라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는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 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첫번째 사역은 이름짓는 사역이었다. 바벨탑의 저주는 언어의 혼란으로 시작되었다. 이 몇가지를 종합해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을 바로잡아가는 길은 언어를 바로 잡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잡아야할 첫번째 언어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불러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망령되게 불려지는 것을 얼마 싫어하시는지는 십계명 중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신앙개혁은 하나님을 바로 부르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4/09/11

고독의 권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교제의 축복이 있다. 그러나 가끔은 홀로 주앞에 나오기를 요청하실 때가 있다. 교제의 축복 못지않은 것이 고독의 축복이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이 고독의 시간이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권위가 세워지는 기초가 되었다.

요즘 한기총 사태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수에 의해 인정된 권위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권위는 아닌 듯 하다. 기독교 지도자의 권위는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나와야 되지 않을까? 우리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자질이나 천부적 리더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고독한 만남의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출 24:2)

4/07/11

더딤의 은혜

조급증 시대에 더딤은 우리를 답답하게도 하지만, 때로 더딤이 하나님의 은혜요 배려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 23:29-30)

4/05/11

절기는 또 다른 의미의 안식

출23:14-19 의 3대절기에 대한 말씀을 통해 주간 단위의 안식 뿐 아니라 연중 안식도 필요함을 깨우쳐 주신다. 이스라엘은 절기 때마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각처에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 이동해야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며칠씩 걸리는 일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안식의 시간이다.

우리의 일년 중에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연중에 기도하기 위해서, 금식하기 위해서, 혹은 주께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들을 조정해 놓고 주님과의 깊은 시간을 보내는 시기가 필요한 것 같다.

4/04/11

이웃 사랑의 범위

출20 10-13의 안식에 대한 언급 중에서 이웃 사랑의 범위가 종들에게 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적용됨을 발견한다. 주인이 안식함으로 종들도 더불어 안식할 수 있고, 동원되는 짐승들도 안식할 수 있기에 안식일을 꼭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나, 농토 희년을 통해 야생동물들이 그 땅에서 먹을 것이 있도록 하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창조물에게 애정이 있음을 보여주신다.

4/01/11

약자들을 위해 분노하시는 하나님

출22:21-31 말씀에서 약자들 때문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오늘 본문은 나그네, 고아, 과부, 가난한 이들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이들이 학대받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3-24).

누군가 이를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라고 불렀다. 그렇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지만, 이들이 잘못 취급받을 때 이들을 위해 분노하시며 일어서신다. 대신 복수하신다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약자들을 학대하거나 착취하거나 잘못 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판단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오늘의 나와 교회가 다시 한번 자신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본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