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14

성숙의 표지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은사가 성숙의 표지는 아니다. 하나님은 각자 다른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에 남이 가진 은사를 부러워할 수도 있고, 남이 갖지 못한 은사를 자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은사를 사랑없이 사용하는 것은 전혀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방언은 좋은 은사이나 다른 이들에게 이해가 되지 못한다면 공적인 예배에서 자제함이 사랑이요 성숙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만마디 방언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마디가 더 가치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가졌느냐 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를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로 우리는 그의 사람됨을 판단한다.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지식으로 사람을 죽인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느냐 보다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로 그를 알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리보다 섬김이 더 중요하다 하셨다.

우리가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는 것이 나를 증명하지 못한다. 남들이 갖지 못한 은사나 자리나 부나 지식도 나를 증명하지 못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도 자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으로 행한 것은 나를 말해준다.  

마더 테레사는 위대한 사람이란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위대한 사랑으로 하는 사람이라 했다. 

예수님은 시골동네의 평범한 목수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은 그가 우리의 구세주이며 만왕의 왕되심을 보여주었다. 

12/06/14

부분과 완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이 땅의 모든 것은 부분적이다. 절대적으로 확신했던 것들도 종종 우리를 속인다. 이 땅에서의 '완전'은 복음 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후일 우리는 그저 부분만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완전한 사랑이라 여겼던 것들이 후일 이기심과 숨겨진 욕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부분적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무언가를 '완전히' 확신하는 자들은 때때로 위험하다. 그들의 '완전'은 다른 이들의 것을 '불완전'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대화의 여지가 없다. 불완전은 완전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이 '부분적'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남들이 있어야 자신이 '부분'이 완성되기 때문에 다른 이를 기쁘게 수용한다. 이 땅의 우리들은 부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부분적'이라는 것이 우리를 목마르게 한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사랑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확신할 수 없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분이 완성되는 완전을 꿈꾼다.  

그래서 C.S.루이스는 이 땅의 기쁨은 천국의 표지판이라 했다. 이 땅의 어떤 것들이 아무리 기뻐도 부분적일 수 밖에 없기에 그 부분성에서 오는 갈증은 어딘가 완전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천국만이 완전한 기쁨을 제공할 수 있다. 

바울도 우리는 이땅의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구리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파악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부분이 완전으로 완성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사랑은 서로의 부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언하는 자도, 놀라운 지식을 가진 자도, 흠모할 만한 은사를 가졌다 해도 그 모든 것은 부분적이다. 그것을 완전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에서는 분란만 일어난다.  사랑은 서로의 부분성을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며, 그래야 다른 지체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형성된다.

12/05/14

깊이와 사소함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어느 책의 제목처럼,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적 추구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놀라운 은사들을, 어떤 이는 깊은 말씀과 지식을, 어떤 이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어떤 이들은 희생적인 섬김을, 어떤 이들은 순교적 신앙을 추구한다. 

사람들의 영적 추구는 늘 끝점으로 향한다. 성령의 신비와 은사를 추구하는 이들은 더 깊은 세계를 갈망한다.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은 더 깊이 있는 말씀과 지식을 사모한다. 이런 지향점은 옳고 바람직하다.

한가지, 영적 추구는 쉽게 영적 교만으로 통한다. 남들이 가보지 못한 영적 세계에 이르렀다는 뿌듯함이 이내 자랑으로 변하고 결국 거기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정죄로 끝나는 경우들이 많다. 

바울은 그런  "깊은 경지"의 영적 추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말한 사랑은 깊은 세계라기 보다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느껴진다. 

무례하지 않기, 짜증나는 사람을 오래 참아주기, 나는 갖지 못했지만 남들이 가진 것들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기, 사람들이 준 상처를 기억하지 않기, 자기만 먼저 챙기지 않기, 실망을 안기는 사람들을 끝까지 믿어주기 등등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소함"을 챙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깊은 영성을 내세우면서도 사소한 영역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습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선교지에서의 희생적 섬김을 하면서도 선교지의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선교사를 보고 아연질색한 적도 있다. "깊이"는 "사소함"과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 사소함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깊이"는 그저 색바랜 영성이 될 뿐이다.

12/04/14

지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구원은 개별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갖는다. 한 사람의 회심은 개인적인 믿음과 결단으로 시작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 생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회심을 위해 믿음이 필요하듯이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지체의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체란 의미는 무엇일까? 고린도전서 12장은 몇가지 빛을 던져준다.

첫째, 지체란 함께 느끼는 이들이다. 다른 이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없다면 같은 몸에 붙어있다고 할 수 없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6절)

둘째, 지체란 서로 돌보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지체란 자기만 돌보는 이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이다. 다른 이에게 관심이 없다면 지체라 말하기 어렵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신 이유가 "서로를 돌보게" 하기위함(25절)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셋째, 지체란 서로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나와 다른 이들을 만난다. 다름이 갈등도 일으키지만, 한편 그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문에서도 다양한 은사들이 나온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한 개인에게 주신 '은사'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God has placed in the church) 이들(28절), 즉 교회에 주신 선물들이라 말한다.  은사는 선물이란 뜻이다.

나에게 기쁨을 주던지 혹 갈등을 일으키던지 그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지체로 고백하는 것이다.

12/03/14

기업과 교회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12:23)

한때 기업모델을 교회에 적용하고자 했던 시도가 많았다. 기업은 효율적 운영을 생명으로 하고,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사실상 효율성으로 교회를 평가해보고 기능이나 효율이 떨어지는 부분을 과감히 혁신하자는 기업문화가 사실상 교회에 많이 잠식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나 기능성이라는 것이 교회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교회는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상 더 중요할 수 있고, 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요긴할 수 있다. 기능과 효율이 떨어지는 지체가 사실상 교회에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니 덜 귀히 여기는 이들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교회됨의 생명이다. 그래서 교회는 장애인과 노인과 가난한 자 등 교회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중요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배제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 나라의 묘미는 가장 연약한 이들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2/01/14

넓은 가슴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6)

오늘 만나는 하나님은 넓은 가슴을 가진 하나님이다.

기독교계 안에는 다양한 사역,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웬지 나와 다른 사역과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편하지가 않다. 심하게는 공격한다.

오늘의 본문은 다양한 사역,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동일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와 다르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사역에도 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넓은 가슴을 가지고 세상의 다양성을 즐기신다.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종의 식물과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은 얼마나 다양함을 좋아하는 분이신가를 느낀다. 하나님의 가슴은 넓다.

이 하나님의 다양성에 대해선 관념적으론 쉽게 받아들여지는데 실제로는 쉽지는 않다. 우리에겐 조금만 달라더 거부하려는 경향성이 분명 있다. 

하나님을 얼마큼 닮았는가의 하나의 기준은 그의 가슴의 넓이가 아닐까?  동일한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일하시고 계심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품는 가슴을 가질 것을 오늘 아침 말씀은 내게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