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14

살아계신 하나님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단6:26)

다니엘에 대한 이방황제 다리오의 애정은 특별했던 것 같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으나 자신이 음모에 속아 찍은 조인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다니엘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트자 마자 다니엘의 사자굴로 달려가 그의 생사여부를 확인한다.

사자굴에 달려간 외친 첫마디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굴 속에서도 다니엘을 보호해주셨음을 듣고 그가 고백한 말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었다.

오늘아침 이 고백을 이방 왕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생경스럽다. 오늘의  우리들은 삶의 교훈과 정통 교리와 사회적 이념의 틀로 박제된 하나님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어느새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사라져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 이방 제왕의 입으로 듣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고백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오늘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

9/23/14

다니엘에게 기도란?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이방세계 속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다니엘을 다니엘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기도였다.

다니엘에게 기도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1. 그에게 기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할 매일의 습관이었다. 정적들의 음모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경배는 사자굴에 처하게 되는 위험이었지만,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기도하는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2. 그에게 기도는 그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는 일상의 습관이었다.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맥을 끊지 않으면 안된다. 메대바사의 3총리 중 한 사람인 그가 처리할 정무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는 것은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행위였다.

3. 그에게 기도는 그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는 습관이었다.  그는 매일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다. 그는 비록 바벨론에서도, 메대바사에서도 이방 왕을 섬기는 신임받는 고관이었지만,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높은 지위와 권력과 부에 도취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망국이 되어버린 고국을 향해 하루 세번씩 기도함으로 자신을 지켜갔다.

예수님께서도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와 세상에 압도되어 길을 잃고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기 쉽다. 기도는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우리의 몸부림이요, 하나님의 백성된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다.

9/22/14

직장인 다니엘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단6:3)


시대가 바뀌어 바벨론은 패망하고 메대바사제국이 들어섰다. 다니엘은 새로운 제국에서 3인의 총리중 하나로 임명되었다.  다니엘이 유대인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왕들마다 그를 높히 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니엘서 6장에서 직장인 다니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1. 탁월성.  성경은 다른 이들보다 다니엘이 뛰어났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실력과 탁월성을 보였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에서 추구해야할 바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있으되 맡겨진 일에 전문성이 없으면 비그리스도인 직장동료들에게 간증을 남길 수 없다.


2.도덕성.  사람들은 다니엘을 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다"(4절).  그리스도인들도 부정에 연루되어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은 안타깝다. 사람들은 다니엘에게서 인사문제든 돈에 관련된 문제든 어떤 부분에서도 부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3.성실성. 성경은 다니엘이 '충성되었다'(4절)라고 말한다. 충성의 다른 말은 성실이다. 맡겨진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실하게 임하여 그 일에 태만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다니엘의 업무에 있어서도 허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4.영성.  사람들이 유일하게 허물을 찾고자 했던 것은 그의 신앙문제였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5절) 그의 정적들은 음모를 꾸몄다. 이는 주변사람들에게 다니엘이 신앙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이나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나 직업의 현장은 치열하고 그 가운데 생존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그 치열함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쉽게 타협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직장세계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보여주었던 다니엘은 우리들이 본받아야할 모습이다.

9/20/14

무명한 자 같으나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단5:29)


다니엘이 손 글씨의 뜻을 해석한 그날 밤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다(30절). 죽기 전 그가 한 일은 다니엘은 높혀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세운 일이었다.


느브갓네살은 그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을 높혀 "바벨론의 온 지방을 다스리는 자"로 삼았었다(단2:48). 그후 왕위가 바뀐었고 다니엘의 위치에도 변화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러다가 벨사살이 이 일로 그를 다시 높혀 셋째 통치자로 세운 것이다.


그후 바벨론은 메데-바사제국에 정복당하고 바벨론의 셋째 통치자 다니엘은 새로운 제국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다. 그렇게 그가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벨사살이 죽기 전 그를 높혀주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는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이 나온다.  바벨론의 등장과 패망, 메데-바사 연합제국, 바사 제국, 그리고 세계사에서 듣던 제왕들의 이름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니엘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읽고 있다.


세계사적 제왕들에 비해 다니엘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제왕들이 다니엘을 위해 쓰임받았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벨사살,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다리오 왕을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이들은 다니엘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도록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다.


그리보니 그 제왕들 보다 다니엘이 크게 보인다. 바울은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라고 말한 바도 이런 뜻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무명한 자들이다. 정가나 재계에 우리의 이름을 내놓지도 못하고 혹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위치에 있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역들이며 필요하면 하나님은 세계사적 인물이라도 우리를 위해 쓰신다. 

9/19/14

진실을 말하기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단5:22)

또 다시 다니엘이 불려 들어갔다. 이번에는 벨사살의 연회장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다니엘은 글씨의 뜻만 풀이하지 않았다.

먼저 느브갓네살이 교만의 죄로 인해 쫒김당했던 일을 지적하고(20-21절), 그의 후손인 벨사살이 똑같은 죄를 지었음을 지적한다.  

제국을 창설한 군주인 느브갓네살을 불경스럽게 언급하는 것도 모자라 현 왕의 잘못을 대쪽같이 지적하는 것은 절대군주사회에서 목숨을 내놓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다는 것은 그 만큼의 책임도 따른다는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는 특별한 책임도 뒤따랐다. 

다니엘은 벨사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글씨의 뜻만 겨우 풀이한 것은 아니었다. 말해야될 진실을 용기있게 말했다. 이는 은사를 가진 자로서의 그의 책임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에는 그만큼의 책임도 있다. 부를 주셨다면 그에 걸맞는 책임이 있고, 교회의 직분을 주셨다면 그 직분이 감당해야할 책임이 있고,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있다.

진실은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다니엘이 벨사살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했던 것 처럼, 용기있게 진실을 말해야할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누군가를 권면해야할 때가 있고, 그렇게 설교해야할 때도 있고, 그렇게 목장을 인도해야할 때가 있다.

다니엘에게도 목숨이 염려스러웠을 것이고, 우리들도 관계가 상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21절)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다.

9/18/14

과시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단5:2)

벨사살이 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연회를 베풀고 예루살렘 성전 그릇들을 술잔으로 사용한 것은 바벨론 제국의 왕으로서의 자기 과시였다.

사람들은 크기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대형 이벤트, 대형 모임,  대형 프로젝트, 대형 건물 등을 좋아한다. 크기가 능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크기가 아니라 생명력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같다 하셨다. 지극히 작지만 생명이 있기에 자라나 뭇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된다. 누룩과 같다 하셨다. 생명이 있기에 온 그릇에 퍼져나간다.

반면 크기로 자신들을 과시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벨탑이다. 그들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크기로 자기를 과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바벨탑은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작은 혀가 꼬이는 지극히 작은 일로 무너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누리는 대형화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벨사살의 과시는 곧 이어 바벨론이 무너질 것을 알지 못하는 헛된 과시였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바닷가 자기가 쌓아놓은 모래성이 얼마나 큰가를 자랑하는 격이다.

정복한 예루살렘의 성전 그릇을 술잔으로 사용한 것은 그들에겐 소수민족으로 보였던 유다민족의 신보다는 거대한 바벨론 제국의 신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유다민족의 작음이 그들이 섬기는 히나님의 작음이 아니다. 우리는 크기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크기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작은 민족을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키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책으로 전달하셨고, 십자가 사건의 현장이 되게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작은 자들을 통해 큰 일 이루시는 간증집이다. 다윗, 예레미야, 기드온, 베드로...한결같이 작은 자들이었지만 크신 하나님으로 인해 위대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보이는 크기를 과시하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진정 위대한 자다.




9/17/14

마음 얻기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단4:36)

꿈에 본 대로 느브갓네살은 사람들에게 쫒겨나 들짐승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의 정신에도 이상이 온 것 같다. 정해진 때가 되었을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총명이 다시 회복되고 그를 쫒아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찾았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권세와 인간의 총명함과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의 주권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손이 그를 떠나자 사람들도 그에게서 돌아섰고, 다시 회복시켜주실 때 사람들이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권력세계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서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사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사람들을 향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온전한 해답은 아니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을 향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돌이키신다.

9/16/14

그루터기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4:26)

느브갓네살의 꿈에 나무는 베임을 받는데, 그루터기는 남겨진다. 다니엘은 이를 느브갓네살이 왕위에서 쫒겨나지만, 후일 회복될 것이라 해석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메세지 가운데 '그루터기' 혹은 '남은 자'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진노하여 왕국의 멸망시키지만, 아주 멸하지 않으시고 그루터기를 남겨두신다. 후일 남겨진 그루터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그루터기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동일한 은혜를 이방 왕 느브갓네살에게도 베푸신다. 그의 교만으로 그를 아주 멸하실 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겨두시고, 후에 그를 회복시키신다.

그루터기는 하나님이 남겨주신 희망이다. 우리 시대의 나무들이 베임을 당하고 쓰러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남겨두신 그루터기가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가 되는 이들을 통해 쓰러진 가정과 교회를 회복시켜주시리라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도 남겨두신 그루터기가 있다.  모든 것이 쓰러지고 베임당하는 상황가운데도 무언가를 남겨두신 것은 이를 통해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희망이다.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의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오니...'는 유명한 어구가 되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잃은 130여척의 배들 가운데 겨우 남겨진 12척의  배들은 조선 수군 재건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그루터기, 그것은 쓰러진 나무의 실상을 보여주는 참담함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보여주는 희망이다. 메시아의 왕국은 그루터기를 통해 세우진다.

9/15/14

자리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단4:17)

느브갓네살이 또 꿈을 꾸었다. 하늘까지 자라난 큰 나무의 꿈이었다. 이 꿈에 등장한 '거룩한 순찰자'는이 나무는 베임당할 것이라 외친다. 그리고 이 꿈의 뜻은 나라의 주권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 세상 속에 펼쳐짐을 믿는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에 제한되지 않고 온 세상에 펼쳐져 누구를 세우고 폐함이 그의 손에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자리에 있게될 때 자칫 우쭐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우리는 이를 위해 애쓰고 노력했겠고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을 갖추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 대신 자격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천한 자'를 세우실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의 자리가 나의 자격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자리인지 모른다.  하나님에게는 나 대신 세우실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나를 거기 세워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지금의 자리, 지금의 기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감사하는 우리가 되자.

9/13/14

간증이란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단4:8)

느브갓네살에게 비친 다니엘은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였다.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 불렀다. 

주변인들에게 각인된 것은 이들의 인격이나 실력이나 행적이 아니었다. 사실 이것들은 비신자들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다. 

다니엘이나 요셉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을 주변인에게 나타냈다. 이들의 꿈의 해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혜였다. 

우리는 이들과는 동일한 은사를 가질 수는 없으되, 우리 역시 비신자들에게 우리의 인격이나 탁월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간증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간증집회에서 종종 느끼는 씁쓸함은 사람들의 특이한 인생체험은 부각되지만 하나님은 실종되는 경우들이다.  간증은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신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스토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들이 정말 갈망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인생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주어진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해 능력을 베푸시기"(대하 16:9) 때문이다.

9/12/14

하나님의 개입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단3:24-25)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결국 풀무불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 사람이 들어갔으되, 네 사람이 거기 있었고, 네 번째 사람은 신성한 모양이었으며, 네 사람 모두 풀무불에서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엔 깨달음이 있지만, 그것만 목적하게 되면 복음은 관념종교나 삶의 철학, 인생잠언으로 전락할 수 있다. 복음의 능력은 철학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살아있는 개입에 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야기의 위대함은 그들의 굽히지 않는 절개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그들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때로 특별하게, 때로 조용하게, 때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

복음은 2000년전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믿는 것일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인생의 풀무불 가운데도 함께 하신다.

9/11/14

금신상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8)

누구나 느브갓네살의 신상앞에 절해야 했다. 그가 정복한 다민족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길을 신상참배로 본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통일되이 신상앞에 절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이었다.

우리 시대는 다문화주의 시대다. 다양한 생각과 철학과 종교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금신상들이 필요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신상 앞에서는 통일된 목소리를 내야하고 통일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문화주의 사회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받는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숭배하는 금신상들이 있다. 동성애나 어떤 정치적 입장, 혹은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기 원하는 어떤 금신상들이 있다.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과 소망씨는 허영의 시장에서 박해를 당하고 소망씨는 순교를 당한다. 이유는 허영의 시장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쓰고, 그 시장에서 파는 물건을 사지 않으려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허영의 시장에서는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니엘의 친구들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대의 금신상 앞에 참배를 요구받고 있다.  우리는 다니엘의 친구들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9/08/14

제국과 바위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5)

다니엘의 해몽한 꿈은 느브갓네살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몇가지 추론해 본다.

1.그가 세운 왕국도 다른 왕국으로 대체될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어떤 왕국도 바람에 불려 흔적없이 사라지는 겨처럼 될 것이다. 이 땅에 영속적인 제국은 없다. 

왕국 뿐 아니라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제국'도 어느 순간 흔적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제국은 누군가에겐 기업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성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35절)라는 구절처럼 그렇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2.그가 왕국을 건설한 것도 '하늘의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37절). 

그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후일 그는 이 메세지를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룬냥 교만해졌다가 비참한 쫒김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3. 그는 두려워해야했던 것은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으로 상징되는 나라들이 아니라 이것들을 부수는 바위였다. 

이 바위는 결국 온 세상에 가득해 태산처럼 될 것이라 했다. 우리는 이를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라 믿는다.  그리스도 앞에서 이 땅의 모든 것은 부숴짐을 경험한다. '우리의 견고한 제국'이라 여겨지던 것들도 그 바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만이 이 땅에 영원히 서게될 것이다!

9/05/14

기도의 모험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단2:19)


기적적인 기도응답이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의 꿈의 내용을 알게해달라는 기도가 다니엘에게 환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다니엘은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 하실 수 있는 것들에 놀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기대감을 생각케 한다.


믿음은 기대감이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은 목수 예수에게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다. 그래서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예수께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 기도다. 예수님을 정말 기대하면 기도한다. 즉 기도는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기도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요청하는 것 이상이다. 다니엘의 경우처럼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것까지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한 기도제목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니엘처럼 용기를 내어 기도하는 모험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것들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그렇게 기도의 모험을 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9/04/14

친구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단2:17)

다니엘과 친구들에게도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다. 해몽하려면 꿈까지 알아맞춰야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나서지 못하자, 왕은 모든 지혜자를 죽이라 명했고, '지혜자' 그룹에 속해있던 그들도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다니엘은 일의 정황을 듣고 왕을 찾아가 말미를 구한다. 그리고 친구들을 찾아가 일의 심각성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한다. 다니엘이 빛나는 것은 그에겐 위기의 순간에 함께할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란 평안의 때 뿐 아니라 위기의 때를 함께 하는 이들이다.  좋은 관계들도 위기의 때에 많이 갈라선다. 그래서 고난은 진정한 친구를 감별해주는 시금석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친구는 있는가? 만일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하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를 해주실 것 같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사마리아인의 얘기를 통해 네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답해주셨다. 친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9/03/14

인생의 주도권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단2:1)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애굽 왕의 꿈을 통해서 였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왕의 꿈은 다니엘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꾸고 싶다고 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그들이 쓰임받게된 것은 그들 스스로 기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장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무언가를 진행하지 않은 상태가 힘겹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도 실상은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고 우리만 거기있는 경우가 많다.

느브갓네살의 꿈을 꾸었다는 것에 하나님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은 듯 보이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신 기회였다. 하나님은 때때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신다. 침묵하시는 듯 하지만 변장된 모습으로 일하시며 말씀하신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다. 다니엘이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일하셨고 그가 쓰임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다. 우리 인생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장을 만들어 주신다. 짧은 세월이었지만 나 자신의 생애를 돌아봐도 항상 하나님이 먼저 장을 열어주시고 나를 그곳에 초청해 주셨다. 그리고 그를 기다림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가장 다이나믹한 체험이 되곤 한다.

9/02/14

거룩한 몸부림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단1:12)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던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많은 일이 두려움과 걱정거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신들이 이교적 문화권 속에서 더러움을 입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세상 속에 살도록 보냄받았고 세상 속에는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다니엘은 신앙양심상 음식과 관련된 어떤 것을 허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다른 신앙양심의 문제로 싸울 수 있다. 세금 문제든 정직의 문제든 회식문화든 직장에서의 어떤 문화가 신앙양심상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자신들을 순수하게 지킬 "뜻을 정했고"(8절) 용기를 가지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갔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다고 했다. 결국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들의 신앙양심에 거리낌을 주었던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들의 문제는 자신들을 지키고자 하는 고민없이 너무 쉽게 우리의 신앙양심을 괴롭히는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해서 자신들이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경우들이 많다.

거룩을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문이 닫힌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린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7:8)

9/01/14

희망의 출구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1:2)

몰락의 날이 왔다. 왕은 잡혀가고 성전 기물들은 탈취당했다. 

왕은 정치를, 성전기물은 종교를 상징적으로 대변해준다.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사실 이 때만이 아니라 역사는 어떤 정치도, 종교도 사람들이 영속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왔다.

본문은 '주께서 ...넘기셨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이 이것을 허용하셨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상황과 교회를 바라보며 두려운 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두운 것을 허용하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탈취당하는 것도 허용하셨다면 그가 오늘 우리에게 허용하지 못하실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시의 지도층에서는 주목하지 않았을 몇명의 소년의 이름들이 언급된다. 그리고 다니엘서를 계속 읽어가면 이 소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히 쓰임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희망의 출구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 아닐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평범한 목수이신 예수,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멸시받았던 땅 나사렛, 학문을 하지 않은  갈릴리의 투박한 어부들...하나님의 희망의 출구가 거기에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들을 통해 세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