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10

주님은 우리가 과격신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열왕기하18:1-4에서 주님께 질문이 생겼다. 주님은 내가 과격신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히스기야의 모습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분명 과격한 모습이다. 과거 선왕들 중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철저히 산당을 제거했다. 아세라 목상을 제거했다. 모세 이후 사람들이 숭배해오던 놋뱀을 깨뜨려 부쉈다. 깨뜨리고 부수고 제거하는 히스기야에서 이스람 과격단체나 자살특공대가 연상되기도 한다.

나는 기질상 과격한 사람들이 싫어한다.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질린 적도 많다. 그런데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도가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비칠 정도로 철저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철저함은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과격하다, 광신적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등등의 반응을 자아낼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당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아닐까? 

히스기야 이전에도 선한 왕들은 많았다. 그러나 히스기야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열심있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녀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하신 과격하게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적다. 바울이 말한바 "내가 미쳤어도 주를 위한 것이면...' 말할 정도로 주님께 미쳐버린 사람들은 적다. 주님은 우리가 Radical Christian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내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 그렇게 철저해져야할까?
산당의 문제다. 고질적으로 내 삶에 자리잡은 우상의 문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묵인하는 생활태도의 문제다. 관습적으로, 문화적으로 허용되지만,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산당이다. 어쩌면 이 산당은 내게 너무도 익숙해서 제대로 문제의식 조차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 내게 있어 아직도 남아있는 '산당'은 무엇일까?



9/29/10

혼합주의를 경계하자

열왕기하 17:24-41에서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경계하신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 한편에서는 다른 신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패망한 이스라엘 사마리아의 빈 땅에 앗수르 제국의 다른 이민족 사람들이 대신 채워지게 되었다.  사마리아 땅에서 몇번의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나서 그 땅에 여호와를 섬기는 도를 가르치는 제사장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전 풍속대로" 자기들이 섬기는 각종 신들을 그 땅에 들여와 그 신들도 섬기게 된다.  여호와 신앙과 다른 신들을 신앙이 혼합되어 있다.
오늘의 교회의 자리에 사람들이 채워지고 사람들은 여호와의 도를 설교단을 통해서 듣는다. 그래서 한편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을 갖지만,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이전 풍속대로' 생활하는  종교혼합주의적 모습은 오늘의 교회에도 만연하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적인 세계관과 충돌을 일으키는 이세상의 세계관과 생활방식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9/28/10

우상은 인생을 망친다

열왕기하 17:13-23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우상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묵인하지 않으신다. 북이스라엘이 결국 주전 722년에 망하게 되었고, 성경은 그 이유를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상은 나라를 망치며, 인생을 망친다.
그렇다면 내게도 우상이 있을까?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혹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 오늘의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9/26/10

다시 생각해 보는 예배


느헤미야 12장의 성벽봉헌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재고하게 된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성회였다.  예배에 임하기 앞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몸을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성전 예배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존전에 나가는 거룩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둘째, 예배는 온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였다. 43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이 무려 4번이나 반복되었다.  우리는 예배를 장례식으로 연상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은 유머와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거룩이 아니시다. 43절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주체가 오히려 하나님이라 하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예배일진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즐겁게 하시고 그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신다.
예배의 즐거움은 찬속의 곡조나, 심미적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왔다. 십자가를 통해 구속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쁨,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기쁨, 아무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얻는 기쁨들.  예배는 즐거움의 축제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그저 의무감으로 임하고 있지는 않은지?

셋째, 예배는 자신을 주께 헌신하는 자리이다.  성벽이 보수되고 예배가 회복되고 나서 제일먼저 달라진 것은 그들의 주앞에 드리는 헌신이었다. 첫열매들과 십일조를 주앞에 드렸다. 예배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기대로 예배에 임한다면, 무언가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예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촛점은 내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자칫 오늘의 설교단이 사람들의 필요에만 초점을 맞출 수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이며, 헌신하는 자리이다. 내 물질과 시간과 자신을 주께 드려,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다.

9/24/10

사랑은 경청이다

아가서 8:11-14을 통해서 사랑은 경청임을 다시 확인하다. 사랑의 노래 아가서의 대단원은 이렇게 끝맺음한다 :

"친구들이 네게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하려므나"

사랑은 더 말하기 보다는 더 듣게만든다.

코스타에 참석한 후의 소감

코스타에 참석한 후의 소감 :

"교회가 다른 길을 보여주는 창문 대신 주변 사회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 필립 얀시

9/23/10

사랑은 강하다

아가서 8:6-10에서 사랑은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죽음보다도, 홍수보다도, 산불보다도, 지진보다도 강하다. 사랑이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난도 피해가지 않는다.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작지만, 우리를 향한 주의 사랑은 십자가를 감수하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9/22/10

사랑은 댓가를 치룬다

아가서8:1-5에서 사랑은 댓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가서의 여인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은 듯 하다. 내가 아는 한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와 시와 소설과 그외 문학작품에서 연인을 '오라비'같았으면 좋겠다고 노래한 것은 아가서가 유일한 케이스인 것 같다. 그러면 자기가 '없신여김'을 받지 않을 것이라 한다. 시골출신의 왕비는 아무래도 왕궁에서 순탄하지 않은 듯 하다. 또 왕궁의 절차들 속에서 왕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표현하기도 쉽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차라리 함께 자라난 오누이라면 함께 놀고 함께 장난치고 하는 것들이 전혀 이상스럽지 않을 것이라 노래하는 것이다. 왕과 시골처녀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댓가가 있었다. 사랑을 위해서 치루어야할 댓가가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의 여정도 댓가가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것이니라"(눅9:23)

9/18/10

사랑은 당당하게 만든다

아6:10-13 묵상. 아가서 6장에서 두번이나 '군대같이 당당한' 신부를 노래한다. 신부는 원래 시골처녀였다. 그러나 화려하기로 소문난 솔로몬 궁정에서도 그 처럼 당당했다. 이 신부의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신랑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이 많다. 학력, 재력, 외모, 언변, 지식, 기타... 그러나 이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사랑을 확신하는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진저...

9/17/10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6:4-9은 사랑의 회복에 대해 말씀한다. 신랑을 찾아 헤맨 신부는 정원과 꽃밭으로 상징되는 왕궁의 다른 여인들 사이에 있는 왕을 발견한다. 왕은 다시 아가서의 여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왕궁의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시녀들 사이에서 오직 한 여인 술람미 여인만 있다고 고백한다.

신앙의 여정에도 '영혼의 어두운 밤'이 존재하고 우리의 사랑이신 그분에게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아가서의 여인처럼 주님을 찾고 찾으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고, 소원해졌던 사랑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 다시 사랑의 고백이 피어나고, 사랑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 사랑은 다시 회복되며, 침체된 우리 영혼도 다시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을 회복하며, 주님의 임재를 다시금 느끼는 순간들이 오게 된다.

9/16/10

사랑에 갈등이 있다.

아가서 6:1-3에서 사랑엔 갈등이 있고, 사랑엔 때로 소원함도 있지만 사랑은 결국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 따라가는 길에도 때로 갈등이 있고, 침체도 있고, 의기소침도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아가서에서 신부가 신랑을 찾아나선다. 결국 신랑은 왕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꽃밭과 풀언덕에 머물며, 백합화를 꺽고 있음을 발견한다. 신랑은 신부를 정원이라 노래하고 신부와의 입맞춤을 백합화라 부른 적이 있다. 그런데 정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복수형 "가님"이다. 즉 왕은 왕궁의 다른 여인들 사이에 있음을 보여준다. 3000년의 세계관을 우리가 다 따라가기 어렵지만, 아가서의 여인은 실은 왕궁의 여인들 중에 하나였고, 그 상황 속에서 사랑을 꽃피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저만치 멀어져 있는 거리감이 찾아온 것이다. 사랑엔 갈등이 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노래한다.“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 6:3)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되...... 그는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 6:3) 차이를 발견하는가? 비록 왕이 멀어져가 있지만 여인은 사랑을 붙잡고 사랑을 확신한다. 사랑은 결국 갈등을 이겨낸다.

9/15/10

사랑은 찬양이다

아가서 5:10-16에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함을 보게된다. 찬양은 마음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찬양의 신비는 찬양할수록 대상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부는 신랑의 모든 면들을 한가지 한가지 칭송한다. 신랑의 피부며 머리결이며, 몸매며, 입술이며, 눈이며 모든 것들을 한가지 한가지 거론하면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노래한다. 신앙으로 적용해보자면 이것은 찬양이다. 찬양은 주님의 한가지 한가지를 칭송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찬양이 끊이지 않는다. 결혼의 관계에서 사랑이 죽어가는 것은 실은 찬양(?)이 죽어가는 것이 원인일 때가 많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여정에서 찬양을 더 많이 개발할 필요가 있다. 찬양은 예배시간의 찬양시간, 기도시간의 찬양과 같은 공적인 찬양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사에서 비형식적으로 나타나는 찬양들도 있다.  어떤 일들이나 스쳐가는 생각이나, 일상사의 작은 케이스들을 통해서 한마디 올려드리는 '쏜살 찬양'을 연습하자

9/14/10

사랑은 지체하지 않는다

아가서 5:2-12에서 사랑 때문에 주님은 나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심을 다시 보이셨다. 처음 주님 영접할 때 뿐 아니라, 주님의 나라 가기까지 주님은 계속 우리의 문을 두드리신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교제를 위해서 두드리신다. 
아가서의 신부는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서 신랑은 밤이슬 맞도록 계속 문을 두드리지만, 신부는 왠일인지 일어나 문을 열지 않고 지체한다. 지체하다 다시 문 틈에 내어민 신랑이 손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문을 열지만, 그 때는 신랑은 이미 어디론가 가버리고, 뒤늦게 신랑을 찾지만 찾지 못하는 악몽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이일을 실제 일어나는 악몽인 경우가 많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더 깊은 교제요 사랑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신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홀로 산책할 때에, 책을 읽을 때에, 어떤 일을 통해, 여러 경우를 통해 우리에게 문을 두드리신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지체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주님과 더 깊어질 수 있었던 기회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는 것이다.

9/13/10

사랑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아가서 4:12-5:1에서 기다림 끝에 풍성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신다. 신랑은 신부를 "잠긴 동산, 덮힌 우물, 봉한 샘"이라 부른다. 때가 될 때까지 성적 순결이 지켜졌고, 하나님의 때까지 동산은 잠겨졌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이르렀을 때에 봉한 샘에서, 덮힌 우물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고, 잠긴 동산에서 각종 아름다운 꽃과 과실수들이 열리며, 향기 가득한 향품을 누리는 풍성함을 이야기해준다. 
우리의 동산은 잠가두는 시기가 필요하다. 우리의 샘물을 봉해두는 기간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나사렛 목수로서 하나님의 때가 될 때가지 봉해져 계셨다. 아브라함도 웃음(이삭)을 만나기 전에 기다림의 연습을 많이 해야만 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기다림의 길이기도 하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때를 기다릴 때 하나님은 마침내 풍성한 기쁨을 허락하실 것이다. 기다림 끝에 맛보는 신랑의 기쁨이 이렇게 기록되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 5:1)

9/10/10

사랑은 전존재를 기뻐하는 것

아가서 4:1-7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첫날밤의 신랑의 기쁨과 흥분과 같다 말씀하신다. 신랑은 신부의 전존재를 한가지 한가지 거론하면서 칭송하며 기뻐하며 사랑한다. 그런데 이 신랑의 기쁨은 행위 기쁨라기 보다는 존재의 기쁨이다. 즉 신부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신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사랑하고 기뻐한다.
우리를 향한 주의 사랑이 그러하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러하듯이, 주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 그것도 첫날밤의 신부를 향한 신랑의 흥분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9/09/10

사랑은 존귀하게 여기는 것

아가서 3:6-11에서 하나님은 사랑은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시골처녀가 솔로몬 왕을 만나 가마타고 예루살렘으로 오는 가마의 행렬은 웅장하다. 각종 향품으로 향내내며, 빼어난 용사들이 호위하며, 최고급 목재와 금은 보석으로 장식된 가마타고 온다.  왕이 왕관쓰고 기다리는 왕궁으로 향한다.  시골출신이지만 왕은 최고로 대우하여 영접한다. 사랑은 상대방은 존귀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또 주님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다. 옛날 시골교회 장로님은 기도할 때마다 "타다 남은 부지깽이 보다 못한 나"라고 기도하시곤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릴자로 불러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최고로 존귀하게 여겨주신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담아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며 존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신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만나듯이 그렇게 존귀히 여기는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9/08/10

사랑엔 열정이 있다

아가서 3:1-5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열정에 대해서 상기시켜주신다.  여인은 꿈속에서도 연인을 찾아 길거리를 헤메며, 사람들에게 그의 행방을 묻는다. 그러다가 그를 만나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랑의 열정을 보인다.
사랑엔 열정이 있다. 그러나 열정은 격정과는 다르다. 20대의 사랑의 열정과 50대의 사랑의 열정은 다르다. 20대가 격정적인 열정이라면, 50대는 우정적 열정인 듯 하다. 함께 인생의 기쁨의 시간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이들의 열정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색깔이든지 열정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세월의 급류 속에서 사랑의 열정 자체를 놓쳐버리는 경우다. 열정으로 시작된 관계가 무미건조함만 남을 수 있다. 

신앙의 여정도 대개는 연인과 같은 열정으로 시작하여 친구와 같은 열정으로 전이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 자체가 식어져 버리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가 그러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열정이 있는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  시편기자의 이 고백의 오늘의 나의 기도여야겠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9/07/10

사랑은 섬김이다.

아가서 2:14-17에서 하나님은 사랑은 섬기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여인은 왕에게 포도원의 여우를 잡아달라  부탁도 하고, 왕은 여인의 목장에서 양들을 치기도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한 수고와 섬김을 기쁨으로 여기게 하지만, 사랑이 빠진 결혼과 종교는 모든 것이 짐이 된다.

'사랑의 5가지 언어'라는 책은 사람마다 사랑을 듣는 사랑언어의 코드가 약간씩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이는 선물을 받을 때, 어떤 이는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어떤 이는 신체적인 Toutch를 통해서, 어떤 이는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이는 상대방의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셨다. 사랑 때문에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고 이를 기뻐하셨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다.  사랑은 섬김을  기뻐하게 한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신다.

9/06/10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아가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남자는 여인을 향해 산들과 작은 산들을 넘어 온다. 산중의 노루가 가만히 와 창을 들여다 보듯이 여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프로포즈한다.  황송하기만 그녀에게 사랑은 모두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주님도 먼저 손을 내미셨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 찾기도 전에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내게 오셔서 "함께 가자"고 하셨고, 그와 함께한 그 동안의 시간은 그저 행복한 동행이었다.  그분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 그리고 이제 동일한 사랑의 사명을 주신다.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라고...


9/03/10

사랑은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다.

아가서 1:9-16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이신다. 여인을 위해 금 사슬 은 구슬로 치장해 주시리라 고백하는 왕, 여인을 위해 아름다운 침상과 튼튼한 집을 마련한 왕... 왕은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신다. 사랑은 낭비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아가서 1:9-17을 풀어보았다.

9.(남자) 나의 사랑, 그대는 애굽의 바로의 전차를 끄는 준마들처럼 야성미가 넘쳐나고

10절. 당신의 땋은 머릿결이 흘러내린 두 뺨과 아름다운 보석 목걸이를 두른 당신의 목이 사랑스럽기만 하다오.

11절. 내 금 사슬 은 구슬 보석을 만들어 당신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에 주리다.

12절(여자). 왕이 식탁에 앉으실 때에 내가 부어드린 나드 향은 온 집에 가득하다네.

13절. 그대를 내게 가슴으로 품은 몰약의 향주머니, 당신을 품을수록 향이나고

14절. 그대는 내게 삭막한 이 세상에 엔게디 포도원의 한 송이 고벨화, 당신의 존재는 내 삶의 기쁨입니다.

15절.(남자) 어여쁘고 어여쁜 나의 사랑, 당신의 두 눈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오.

16절.(여자) 나의 사랑, 당신은 얼마나 멋지고 매력있는 분이신지요. 당신이 준비하신 침상은 늘 푸르르고

17절. 백향목으로 전나무로 튼튼하게 지어진 우리의 보금자리는 얼마나 멋진지요.





9/02/10

사랑은 갈망이다

아가서 1:5-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란 갈망하는 것임을 깨우쳐주셨다.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맨다. 그가 있는 곳을 찾아 헤메지만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갈망하는 것.
아가서 1:5-8을 풀어서 적어보았다.

5.(여인)솔로몬을 사모하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여, 저를 그렇게 보지 마세요. 내 비록 검은 피부를 가졌지만 그분은 절 아름답다 하셨어요. 광야의 성막을 덮은 거무칙칙한 게달의 가죽처럼 검지만, 솔로몬 성전의 성소에 있는 아름다운 휘장 같다 하셨어요.

6.내가 검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햇빛에 그을렸을 뿐이에요. 내 오빠들이 포도원을 돌보라 하셔서 정작 내가 돌봐야할 포도원, 내 피부는 돌보지 못했을 뿐이에요.

7. 나의 사랑하는 이시여, 당신이 어디 계신지 말씀해 주세요. 양떼들을 어디에서 먹이시는지, 정오의 뜨거운 태양이 있을 때는 양떼들과 함께 어디에서 쉬시는지 알려주세요.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어요. 저는 마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을 걷듯이, 당신 친구들의 양떼 사이만 헤맸답니다.

8.(남자) 뭇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가 나 있는 곳을 모르겠거든 내 양떼들의 흔적을 보고 찾아오다가 목동들이 천막친 곳을 만나면 거기서 당신의 염소를 치면서 기다려주세요.



9/01/10

사랑은 구속사만큼 소중하다.

아가서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구속사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 이야기가 정경의 한부분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이 땅을 살며 우리가 이루는 사랑을 아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구속사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책이다. 이 거룩한 경전에 인간의 사랑의 노래들을 포함시켜 놓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사랑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아가서를 영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본문 1:1-4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여주신다. 목동 처녀와 왕과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행복을 보여준다.  아가서를 새롭게 풀어보았다.


1절. 솔로몬이 지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2절 . (여인) : 제게 키스해주세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최고급 포도주을 맛보는 것보다 더 달콤해요

3절. 당신에게서 나는 내음은 향기롭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향수를 쏟아놓은 것 같아요. 그러니 뭇여인들도 당신을 사모한답니다.

4절. 나의 임금이시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서둘러 주세요. 빨리 당신의 침실로 가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우리는 기뻐하리. 즐거워 노래 부르리. 포도주에 취하는 것보다 당신의 사랑에 취하는 것이 더 행복해요. 이러하니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사모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