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0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그리스도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레위기 24:20

구약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때로 이것은 상충하는 것 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몇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

먼저 구약의 이 말씀은 사회적 규범을 정의내리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한 사회에 범죄에 대한 처벌이 없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구약의 이 말씀은 그 처벌의 기준을 정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상해나 피해를 입혔을 때에는 최소한 피해입힌 만큼 보상하고 변상하는 것이 마땅하다. 때로 어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이를 악용하기도 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니 모든 것을 눈감는 것이 마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먼저 다른 사람의 피해를 철저하게 보상하라는 말씀이다.

동시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보다 과도하게 피해를 보상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원칙은 동해의 원칙이다. 동등한 기준의 처벌 내지 보상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기준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소한의 삶의 규범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방인도 따라갈 수 있는 기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낫기를 원하셨다. 원수도 사랑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오리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리까지 함께 가주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기준은 아가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한다. 솔직히 우리는 이런 말씀의 기준대로 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므로 인간적인 연약함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8/19/08

레21:8-15 지도자는 더 엄격해야 합니다

본문은 구약 제사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만인 제사장의 입장을 받아들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에서 설명하듯이, 제사장은 당시 "백성들의 어른"이었습니다.
즉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지도자는 더 엄격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에 더 엄중하게 처리해야하고
가정의 애사가 있을 때라도 당시 장례식장에서 볼수 있는 행동들을 자제하라고 합니다.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옷을 찟는 것은 가족으로서의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맡겨진 일에 더 우선순위를 가져야합니다.

가정사역과의 균형을 고려해야하지만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8/15/08

레20:23-27 하나님이 거룩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다른 민족과는 다른 특별한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들어가는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그들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였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는 더 거룩한 삶의 기준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생각하면 방종적인 자유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더 철저한 거룩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실 수 있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구별해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는 주인이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두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가? 둘째는 내 삶의 주인은 누군인가?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믿는 자는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8/13/08

공경과 정절

레위기 20장의 QT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할 삶의 모습들을 하나님은 미리 짚어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9-17절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서 절대넘어서지 말아야할 기준들을 보여줍니다.
이 기준의 엄격함은 그 형벌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죽음의 형벌이었습니다.

가정생활의 한가지 기준은 부모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기준은 배우자가 아닌 그 어떤 대상과도 간음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가나안 뿐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삶의 기준입니다.

8/04/08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배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9:9-10

남겨둔 밭 모퉁이, 떨어진 이삭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 말씀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키기위한 것임을 알 때 더 흥미롭습니다. 유목생활만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농경생활을 해야합니다. 가나안이란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해야합니다. 안해보던 일을 해야합니다. 낯선 기후에도 적응해야합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단어는 '생존'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가나안에서 잘 생존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안해보던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민교회를 섬기다보니 이민자들의 고민도 동일함을 느낍니다.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고 적응해 가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생존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비자문제도 해결해야되고, 직업과 직장이 문제도 해결되야하고, 자녀들의 진로도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차원에서 한층 더 나가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난한 자들과 타국인들을 위한 배려를 마음에 새기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사가 생겨나기도 전에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함을 보여줍니다. 단지 이윤창출이 우리들의 첫번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많이 모으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삶의 모퉁이를 다른 이들을 위해 남겨두는 배려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잔돈일 수 있습니다.
일정부분을 떼어놓는 헌금일 수 있습니다.
일정시간을 떼어놓아 그들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만을 위해 몰입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가락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들려줄 수 있는 운율이 없다면 너무 메마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가만히 돌아다보니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너무 적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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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셔서 다른 사람들을 품어안을 수 있게 하옵소서.
지혜를 주셔서 내 삶의 어떤 모퉁이를 남겨둘 수 있는지 보게 하소서.

8/02/08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인생의 늦은 시간 또 다른 삶의 장소로 옮기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고, 자녀들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징후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도 아브라함은 헷족속 사람에게 땅을 사야만 했습니다.
그땅에 머문지 25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약속의 아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 받아 골드코스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가장 두려운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질까 두렵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인 것 같습니다.
빠른 인터넷 시대에 우리는 더디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도 그런 답답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고 있으라고 하는 장소에 있다보면
언젠가 인도하심의 이유를 발견하리라 봅니다.

아브라함에게 흔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실수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기다림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기는 기다림으로도 주님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갈증이 목마름으로만 남는다 해도 주님이 제 모든 것이니까요...